Novelist Running Through Time RAW novel - Chapter (91)
EP 4 – 빨갱이 사냥
보육원 교사의 실수.
사춘기 청소년의 호기심.
평소 백일장을 돌아다니는 아이에게 교통비를 잘 챙겨주던 방정아 선생님의 친절. 눈물을 흘리며 읍소하는 아이를 도와준 동사무소 직원의 동정심.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수도권의 지하철과 버스 노선. 처음 보는 아이에게 직장 동료의 근황을 알려준 직장인의 무신경함. 그리고 SNS. 등등.
이런 여러가지 이유가 겹쳐 나는 마침내 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게 만든 비극이나 애달픈 가정사 따위는 없었다.
철 없는 두 사람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결혼을 했고, 얼마 안 가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으며, 둘 다 젊은 나이에 홀애비, 홀어머니가 되어 갓난아이를 키우며 인생을 소모할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이혼 과정에서 양측이 친권을 포기하고 아이를 보육원으로 보냈다.
끝이다.
그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들이닥친 폭풍은 그제서야 시작됐다. 새까맣고 무시무시한 생각들이 내 영혼을 검게 물들였다.
삶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물들었다. 중학교에서 부모 없는 놈이라며 놀림 당하고 뒤통수 몇 대 맞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그 고통의 이름은 ‘원망’이었다.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망하고, 날 버리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부모를 원망하고, 그 사실을 숨긴 보육원 선생님들을 원망하고,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이 따위로 만들어진 세상을 원망했다.
그러한 삶의 고통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게 여겨질 정도로 괴로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걷다가도 차도에 몸을 던지려 멈춰서는 일이 종종 있었고, 높은 건물만 보이면 옥상에 올라가 세상을 바라보곤 했다.
마음의 고통이 나를 서서히 죽이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내 얄팍한 자아는 병원균을 몰아내는 백혈구처럼 이 논리에 대항할 ‘항체’를 만들어냈다.
살기 위해서.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
내 마음에 평온을 되찾아줄 논리가 필요했다.
그 결론은 ‘여우와 신 포도’의 고사와도 비슷했다.
부모의 사랑 따위, 애초부터 별로 귀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삶의 고통 속에서 모성애가 신성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슬픔을 떨쳐냈다.
결국 부모 자식 관계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신성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자기 형편에 따라 끊어질 수 있는 천박한 것이다.
자기 자식을 지키는 원숭이는 유전자가 보존됐고, 자기 자식을 안 지키는 원숭이는 대가 끊겼다. 그것이 모성애의 실체다.
날 버리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부모를 원망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는 인간일 뿐이다.
* * *
“어린 생각이었죠. 다만 그 생각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쓴 소설이 바로 ‘빨갱이 사냥’입니다.
부모가 날 무한히 사랑해주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일개 인간에 불과했던 것처럼.
이 나라의 영웅으로 모셔지는 독립운동가들도 영웅이 아니라 제뜻대로 행동하는 인간에 불과했다는···”
말하는 것도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나는 지쳐서 잠시 말을 멈추고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쪼르륵.
물 따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촬영장은 조용했다. 내가 무언가 또 사고를 쳤다는 예감이 슬그머니 찾아왔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저질렀는데.
한숨 한 번 내쉬고서 말을 마무리했다.
“뭐··· 그런 소설을 썼습니다.”
“……”
“……”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구체적인 결론을 말했다.
“여하튼, 그게 빨갱이 사냥이라는 소설의 실체입니다. 그러니 영화화할 수 없습니다.”
이건 역사 소설이 아니다.
사소설이었다.
같은 독립운동가인데도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마구 잡아 죽이던 주인공의 증오와 원망은, 역사 속 참극이 아니라 부모를 원망하던 내 마음 속에서 온 원망이다.
주인공부터가 이럴 지경인데 어떻게 이걸 영화로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창피한 것도 창피한 거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뜯어고쳐지는 모습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이건 내 어린 시절의 가장 깊은 상처요, 그걸 극복해내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이건 소설 자체로 남아 있을 때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
“……”
“……”
그런데 아직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다들 넋 나간 표정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연세 지긋하신 어떤 출연자 분은 손수건으로 붉어진 눈시울을 톡톡 찍어내고 있었다.
스태프가 늘어선 곳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PD도 촉촉해진 눈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때.
침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문 구학준 교수가 식탁에 있는 휴지 몇 장을 뽑아 내 볼을 닦아주었다.
내 볼은 어느새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린 물방울로 촉촉이 젖어 있던 것이다.
“어라···?”
나 어째서··· 눈물이···?
* * *
[촬영 중단]-이라는 자막이 나오고, 화면은 잠시 출연진들의 개별 인터뷰로 넘어갔다.
유명 요리사가 붉어진 눈가를 감추지 못하고 착잡한 심정을 밝혔다.
[착잡했죠. 못난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서, 저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겠어요.]물리학 교수도 침통한 표정으로 의견을 말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저는 이게 문인 작가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상처를 가진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게 참 안타까웠죠.]이번엔 소태웅 감독의 차례였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카메라를 응시했다.
[···아차 싶었습니다.]그는 다시금 침묵을 이어가다가,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차분히 소회를 밝혔다.
[저는 좋은 작품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문인 작가에게 다가갔던 것인데, 결국 한 아이의 가장 깊은 상처를 찔러서 들여다보게 되었으니··· 어른으로서, 사람으로서 정말 미안했습니다.]화면은 촬영 당시, 소태웅 감독이 문인 작가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담았다.
문인은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소태웅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가며 사과를 전했다.
그 이후, 구학준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카메라에 대고 이야기했다.
[제 딸아이가 문인 작가와 동갑입니다. 실제로 학교 친구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말 마음이 편치 않네요···]하지만 구학준은 거기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구학준의 소신발언이 이어졌다.
[그런데··· 빨갱이 사냥이란 소설은 문인 작가의 말처럼 변변찮은 소설이 아닙니다.]화면이 바뀌어, 소태웅 감독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독립운동가들과 당시의 사람들이 일단 일제부터 몰아내자며 애써 외면하고, 덮어두던 내적인 갈등과 분열··· 그것이 마침내 찾아와서 이 나라를 반으로 가르고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 소설에 빠진 게 바로 이 이유였습니다.]소태웅이 고백했다.
[사실 제 아버지가 이북 사람이셨습니다.]소태웅은 잠시 죄송한 기색을 지우고, 창작자의 자세로 돌아와서 소신껏 이야기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남들보다 훨씬 깊게 공부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독립운동 중에 있었던 이념의 갈등이,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사실 거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 거였는데도 말입니다.]화면은 다시 촬영장을 보여주었다.
소태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문인과 눈을 맞추고, 무언가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곧장 소태웅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런데 문인 작가의 소설은 정확히 그 부분을 조명했습니다. 후배의 추천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저도 모르고 있었던 제 생각을 정확히 짚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이제는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읽는 내내 역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상처 받고, 싸우고, 미워하고, 그것을 봉합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과 싸우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거대한 악당을 몰아내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없이 괴로워하면서 냉혹한 현실을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화면 속 소태웅이 문인을 설득하고 있다. 구학준이 이따금 문인의 어깨를 토닥이기도 하고, 소태웅의 집착으로부터 문인을 지켜내려는 제스쳐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촬영이 중단된 촬영장 한가운데에서 한참 동안 이어졌다.
결국 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촬영장이었던 숙소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당 벤치에 앉아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했다.
카메라는 혼자 고민하는 문인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다. 소년은 한참 동안 혼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런 소년에게 소태웅이 다가와 옆자리를 채웠다.
* * *
“영화화 안 한다니까요.”
멋쩍게 다가온 소태웅 감독이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았다. 정말 지독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대체 무엇이 저 사람을 이렇게 미치광이로 만든 것일까 궁금할 즈음, 소태웅이 입을 열었다.
“얘야.”
“…!”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반말이었다.
소태웅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날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하마. 나는··· 굉장히 유명한 영화감독이란다.”
나한테 밉보이면 재미 없다는 말이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었지만, 소태웅이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운 좋게 유명세를 탔고, 외국 사람들 눈에 보기 좋은 작품을 몇 개 뽑아낼 줄 알아서 상복이 있었지. 그러다가 굉장히 유명한 상을 하나 타서 유명인사가 됐어. 영화 투자금 걱정도 없고, 원하는 배우를 캐스팅하지 못할 걱정도 사실 없는 편이지.”
“……”
“그래서 내가 고민할 건 딱 하나란다.”
소태웅이 진지하게 고백했다.
“재미.”
그는 재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 반쯤 미친 사람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본 그의 눈빛은, 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영화, ‘빨갱이 사냥’.
그것은 이미 소태웅 감독의 마음 속에서 완성되어 그의 눈앞에 상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광기에 가까운 확신을 담아 내게 약속했다.
“상업적 흥행은 요즘 영화판이 박살나서 나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약속하마. 정말로,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주마. 네가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주마. 한 번만 허락해줘라.”
“예?”
“부탁한다.”
그러니까 지금.
네 사정은 알겠는데 재밌을 거 같으니까 영화화 허락해달라고 말한 거 맞나…?
진짜로…?
진짜…?
“……맘대로 하십쇼.”
내가 졌다.
* * *
방송 당일.
전국이 뒤집어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