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14
13화. 내가 졌다“짐은 그게 전부냐?”
“예.”
나는 가벼운 봇짐을 흔들어 보였다. 그 안에는 옷 몇 벌과 약간의 벽곡단, 금창약, 서책 몇 권 정도를 챙겼다.
전낭은 품 안에 따로 챙겼고, 허리춤에는 검을 찼다.
딱히 무기를 가리는 편은 아니지만, 검이 여러모로 사용하기 편하기에 검을 골라 들었다.
떠나기 전에 검으로 해야 할 일도 있고.
“넉넉히 한 달이면 도착하는 거리니까요.”
합승 마차를 타고 간다면 기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겠지만, 체력도 단련할 겸 두 다리로 갈 생각이었다.
“사부님! 가서 꼭 출세하셔야 해요!”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코흘리개들이 연무장에 잔뜩 배웅을 나와 있었다.
‘자칭 수제자’ 장이가 내 팔에 매달려서 말했다.
“열다섯 살이 되면 청룡학관에 입학시험 치르러 갈게요! 그땐 꼭 절세신공 가르쳐 주셔야 해요! 사내대장부 대 사내대장부의 약속이에요!”
어이구.
사내대장부라는 녀석이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나는 녀석의 볼을 꼬집으며 피식 웃었다.
“오냐.”
왜 열다섯이냐면, 청룡학관의 최소 입학 연령이 열다섯이기 때문이었다.
간혹 구파일방이나 명문세가의 뛰어난 기재가 추천서를 받아 입학하는 예외가 있지만, 그건 정말 가끔 있는 일이었다.
나는 장이의 찹쌀떡 같은 볼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런데 5년 뒤엔 이 사부님은 청룡학관이 아니라 천무학관에 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똑같은 무림 오대학관이지만 청룡학관과 천무학관에는 큰 차이가 있다.
당연히 월봉에도 큰 차이가 있다.
내 계획은 일단 청룡학관에서 신입으로 경력을 쌓은 후, 천무학관에 경력직으로 이직하는 것이었다.
“그럼 저도 천무학관으로 갈게요. 꼭 사부님한테 절세신공을 배울 거예요!”
장이는 여전히 내가 천하제일 고수라고 믿고 있었다.
무림인이라곤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시골 아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이 나이대 애들이야 매일 아침 장래희망이 바뀌는 법이니…….’
내가 떠나고 며칠만 지나면 무공에 흥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별생각 없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천무학관 입학시험은 힘들기로 유명하니 그동안 열심히 수련해야 한다.”
“네!”
평소 가르치던 무공에 녹림십팔식을 슬쩍 섞어 가르쳤으니, 그것만 꾸준히 수련해도 몸이 튼튼해지고 앞으로 잔병치레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수룡이. 조심해서 가게.”
“갈 때 먹으라고 전병 좀 챙겼어.”
“날도 더운데 이거 챙겨서 가. 우리 가게에서 제일 좋은 흑립이야.”
“멀리 가는데 신발이 그걸로 되겠어?”
장이와 코흘리개들 말고도 마을 사람들이 여럿 배웅을 나왔다.
사람들은 간식이며 신발, 흑립, 심심할 때 읽으라고 서책(슬쩍 펴 보니 춘화였다)까지 내게 안겨 줬다.
“아니 뭘 이렇게까지…….”
평소 아버지의 평판이 좋기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이 선물이 쏟아졌다.
나는 살짝 감동해서 마중 나온 사람들을 둘러봤다.
정말 많이도 왔다.
이 동네 유지 아들이 장원급제를 해도 이렇게는 안 모일 것 같은데…….
‘아니, 이건 좀 이상할 정도로 많은데?’
게다가 뭔가 기대하는 듯한 저 눈빛들은 뭐야?
“대체 비무는 언제 시작하누? 아들이 지면 못 간다며?”
팔십 먹은 노구를 이끌고 온 곽 노인의 눈치 없는 한마디에, 마을 사람들이 입을 합죽이처럼 다물고 내 시선을 외면했다.
‘그럼 그렇지. 이 인간들…….’
나는 홱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째려봤다.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셨나 봐요?”
“싫으면 지금이라도 안 가겠다고 하든가.”
“그럴 순 없죠.”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받은 선물을 한쪽에 내려놓고 아버지와 마주 섰다.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버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준비는 끝난 거냐?”
“예.”
대략 한 달 전.
하수오 세 뿌리를 다 털어먹고 아버지에게 대빗자루로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은 날.
그날 밤 나는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정말 청룡학관에 갈 생각이냐? 그것도 학생이 아니라 강사가 되겠다고?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그 학생들 중에는 벌써 일류의 경지를 넘보거나 넘은 아이들도 있다. 네게 그 아이들을 가르칠 만한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지금이야 좀 부족하겠죠. 하지만 한 달 후엔 달라질 겁니다. 아버지가 놀랄 정도로요.
-도대체가…….
-제가 단순히 객기 부리는 거로 보이세요?
나와 아버지는 한동안 눈싸움을 벌였고, 결국 먼저 한숨을 내쉰 쪽은 아니었다.
역시나 아들에게 약한 아버지였다.
-좋다. 그럼 떠나기 전에 날 납득시켜라. 그럼 보내 주마.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며칠 전 고주열에게서 연통이 왔고, 나는 청룡학관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공평하게 내공은 쓰지 않으마.”
스릉.
아버지가 먼저 검을 뽑아 들었다.
연습용 목검이나 가검이 아닌, 날이 제대로 서 있는 진검이었다.
하지만 더 바짝 날이 서 있는 것은 아버지의 눈빛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 한번 보자.”
독문 무공이자 가전 무공인 회풍검법(回風劍法)의 기수식을 취하며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아버지.
그 자세는 내가 본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빈틈이 없었다.
‘쉽지는 않겠군.’
물론 질 생각은 없었다.
나는 검을 뽑아 들며 아버지와 똑같은 기수식을 취했다.
“후우…….”
“후…….”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매일 새벽 아버지가 수련하는 검법을 보았다.
회풍검법은 충분히 일류라고 불릴 수 있는 무공으로 환검과 변검의 묘리가 깃든 검법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아버지의 검법에는 항상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무림의 선배답게 삼 초만 양보해 주시면 안 됩니까?”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검 끝을 슬쩍 움직였다.
“어림없는 소리.”
그가 경쾌한 보법을 밟으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나는 몸을 옆으로 슬쩍 틀며 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채앵!
날카로운 쇳소리. 나는 두 걸음 물러나며 손목의 충격을 해소했다.
아버지는 선공의 기세를 타고 나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채채채채챙!
폭풍이 몰아치듯 검이 몰아친다.
수많은 검의 잔상에 정신을 빼앗겼다간 요혈을 찔릴 것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검을 휘둘러 방어에 집중했다.
어깨를 노리던 검 끝이 낭창하게 휘어 허리를 노리고, 무릎을 노리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허벅지를 찔러왔다.
“우와아아!”
“엄청나다!”
수준 높은 검법이 펼쳐지자 구경꾼들이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나만 죽을 맛이군.’
일류의 끝, 절정의 경지를 눈앞에 둔 무인이 펼치는 검법이다.
내공을 담지 않아도 그 속도와 힘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해라! 더 하다간 다친다!”
대답할 여력도 없다.
나는 검을 휘둘러 아버지의 공세를 막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겨우 버티는 것조차 쉽지 않다.
당장이라도 검을 놓칠 것 같다.
하지만 버틴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보인다!’
어떤 초식이든 눈에 익게 된다.
더욱이 그 초식들이 지난 한 달간 수련하는 모습을 자세히 봐 둔 검법이라면.
―채애앵!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리.
초식과 초식이 이어지는 틈새를 정확히 찌른 내 반격에, 훌쩍 뒤로 물러나 피한 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
어떻게 반격할 수 있었냐는 의문이 담긴 눈빛.
나는 잠깐의 여유에 호흡을 정리하며 씩 웃었다.
“설마 이게 전부는 아니죠?”
“하.”
내 도발에 아버지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내 반격이 시작된 순간 그 웃음은 굳어 버렸다.
“이번엔 제가 갑니다.”
나는 폭풍 속으로 성큼 뛰어들었다.
사방에서 검이 쏟아지지만 내 몸에 직접 닿는 것은 없었다.
하나씩, 나는 내게 쏟아지는 검을 걷어 내고 반격하기 시작했다.
“……!!”
놀라 부릅떠진 아버지의 눈.
내 검에 의해 흐름이 깨지자 검이 어지러워지고, 몰아치던 폭풍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하압!”
당황한 아버지가 기합을 넣으며 억지로 몸에 힘을 넣는다.
패착이다.
회풍검법은 자유로운 변검과 환검의 묘리가 담긴 검법이지, 힘을 중시하는 검법이 아니다.
―후우웅!
억지로 힘을 준 초식에 빈틈이 커졌고, 나는 그것을 놓칠 만큼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죽은 건 아버지 탓이 아닙니다.”
“……!!”
찰나의 순간 아버지의 몸이 굳었다.
그의 검이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가고, 나는 과감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맞다. 이건 심리전이다.
하지만 반드시 지금 해야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가 약하게 태어난 것도, 아버지 탓이 아닙니다.”
“너……!”
내가 본 백무흔은 충분히 절정을 넘어, 어쩌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는 재능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를 벽에 가둬 두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고주열의 말에서 그 ‘무언가’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네 아비의 검 말이냐? 정말 대단했지!
잔뜩 취한 얼굴의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몽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또래 중에 청룡학관에서는 백 아우를 당해 낼 사내가 없었다. 뿐인 줄 아느냐? 매년 천무학관에서 열린 용봉비무에서 네 애비가 무려 4강에 들었지!
-형님. 민망하게 다 지난 이야기를…….
-그때 다른 천무학관 놈들 표정을 표정이 어땠는 줄 아느냐? 크하하! 그때 이 친구 덕에 우리도 덕 좀 봤지. 호북 시내에 나가면 옥면공자를 연호하던 아리따운 처자들이…….
-형니이임!
-크하하하! 그만큼 멋졌단 말일세. 그때 자네는 정말이지 자유로워 보였다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것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자유로운 영혼.
하지만 내가 본 백무흔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늘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투덜대면서도 항상 내가 고집을 부리면 결국은 들어주던 마음 약한 아버지.
‘아들에게 진 부채감이 일종의 심마(心魔)를 만들어 낸 거야.’
새벽마다 지켜본 그의 회풍검법은 완벽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 자유로움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나, 백수룡 때문이었다.
“저는 아버지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짐 덩어리가 아닙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누가 네가 짐이래!”
―후우웅! 후우웅!
마음이 어지러워지자 정밀했던 검법이 무너지고 동작이 커졌다.
더 이상 검법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몸부림.
그런 것에 내가 당할 리 없었다.
“끝입니다.”
툭.
어느새 내 검이 아버지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저는 오늘 아버지를 떠나겠습니다.”
“너…….”
“더 이상 저한테 미안해하지 마세요.”
“…….”
나와 죽은 내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한 명의 무인은 생기를 잃고 자유를 잃었다.
스스로를 벽에 가두고, 날아오를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나는 그가 진심으로 다시 자유를 찾아 날아오르기를 바랐다.
‘당신은 훨씬 더 높은 단계로 갈 수 있는 재능을 지녔으니까.’
“나는…….”
아버지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설마?
만약 그가 여기서 승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척 곤란해진다.
내가 이기긴 했지만, 어찌 보면 나는 비무 도중에 비열하게 말로 심리전을 걸었으니까.
그때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아버지가 천천히 검을 내렸다.
“그래. 내가 졌다. 가거라.”
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자기 몇 년은 늙은 듯 지쳐 보이면서도,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