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15
14화. 새장가는 무슨“……안 보내 줄 생각이었다.”
비무가 끝난 후 나는 아버지와 평상에 마주 앉았다.
구경꾼들도 모두 돌아가고, 넓은 백무관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아버지는 팔짱을 낀 채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노려보며 말했다.
“가면 어떤 꼴을 당할지 뻔히 아니까. 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붙잡으려고 했지.”
“그래도 끝까지 가겠다고 했으면요?”
“……못 이긴 척 따라갔겠지.”
사실 알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아버지가 몰래 짐을 싸 놓는 것을 봤으니까.
역시 아들에게 약한 남자라니까.
나는 태연하게 찻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제가 이겼으니 이제 말리지도 못하고, 따라오지도 못하게 됐네요.”
“……따라가면 안 되냐?”
“안 됩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으로는 그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의 앞날을 위해서도 나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돈 많이 벌어서 출세해서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백무관 안 망하게 잘 지키고 계세요.”
“고얀 놈.”
아버지가 나이답지 않게 입술을 삐죽였다.
이 마을 과부들이 봤으면 끔뻑 넘어갔겠지만, 내 앞에선 어림도 없었다.
“청룡학관에 가면…….”
잠시 머뭇거리던 아버지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네 외조부께서 계실 거다.”
“예?”
외조부라면 내 어머니의 아버지, 즉 외할아버지란 소리였다.
나로선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니 외가 쪽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청룡학관 학생주임이시다.”
“예?”
“네 외조부 말이다.”
“……아니,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주는데요!”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아버지가 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냐. 안 보낼 생각이었다고. 설마 정말로 네가 날 이길 줄은 몰랐지. 솔직히 내공만 썼어도 내가 그냥 이기는 건데…….”
“이제 와서 핑계 대지 마시고. 그런 인맥이 있으면 빨리 얘기해 주셨어야죠. 그럼 입사 시험도 더 수월하게……”
나는 신이 나서 말하다 말고 아버지의 표정이 썩어 가는 것을 보았다.
설마?
“……외조부랑 사이가 안 좋아요?”
“나도 그렇지만, 약빙도 장인어른과 의절한 지 좀 됐다.”
매약빙.
내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나는 불안감을 담아 물었다.
“왜요? 얼마나요?”
“……약빙과 내가 혼인한 이후로 쭉?”
“아, 한 30년쯤 됐구나. 그걸 좀 됐다고 하신 거구나. 그쯤 되면 그냥 남이라고 부르지, 왜 장인어른이라고 불러요?”
아버지는 아예 내 말은 못 들은 척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장인어른이 널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다. 약빙을 닮았다고 예뻐하실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니면?”
“날 닮았다고 죽이려고 들 수도 있고.”
“…….”
아버지는 표정을 찌푸린 채 “워낙 꼬장꼬장한 양반이라 말이지, 그렇다고 정말 죽이기야 하겠냐만.”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조심해라. 매 씨 성에 극(極) 자, 렴(廉) 자를 쓰시는 양반을 만나면 일단 백 장 밖으로 도망…….”
“거기까지만 들을게요.”
미리 걱정해 봤자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였다.
차라리 직접 가서 부딪쳐 보는 게 나았다.
……설마 정말 죽이기야 하겠어?
“역시 같이 가 주랴? 그래도 너랑 나랑 같이 가면 나부터 죽이려고 하실 테니까. 너라도 그때 도망을…….”
“당신 대체 장인한테 얼마나 미움 받고 있는 거야?!”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헤어짐이 길어지면 미련만 커질 뿐.
적당히 아쉬울 때 떠나는 것이 맞았다.
더 늑장을 부리다간 이러다 해가 질 것도 같고.
“그럼 아버지. 소자 이만 길을 떠나겠습니다. 출세해서 돌아올 때까지 보중하십시오.”
“안 어울리게 절은 무슨. 됐으니 얼른 가라.”
나는 아버지께 크게 절을 올린 후, 일어나서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선 몸을 돌렸다.
“…….”
봇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백무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몇 달 동안 정이 연무장과 낡은 건물, 오래돼 글씨가 누렇게 바랜 현판, 코흘리개들이 연무장 한쪽에 두고 간 공과 장난감들.
혈교 교관 시절에 살던 숙소와 건물이 훨씬 더 크고 웅장하지만, 나는 이곳의 흙냄새 나는 연무장이 더 좋았다.
아마 살면서 처음으로 가져 본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돌아와야겠어.’
몇 년 혹은 그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나는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다짐했다.
이제 이곳이 내 고향이니까.
“한 달에 한 번씩 꼭 편지 부쳐라! 연락 없으면 쫓아갈 테니 그리 알아, 이놈아!”
“예예.”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백무관의 대문을 넘었다.
그리고 청룡학관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 * *
“…….”
백무흔은 작아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는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매정한 놈 같으니. 끝까지 뒤도 한 번 안 돌아보는구나.”
죽었다 살아난 후로 몰라보게 달라진 아들이지만, 여전히 걱정이 앞섰다.
강호를 동경할 줄만 알았지, 그 비정함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녀석이니까.
“특히 여자를 조심해야 할 텐데…….”
사내 녀석이라 자신을 더 닮긴 했지만, 오똑한 코와 긴 속눈썹은 죽은 아내를 쏙 빼닮은 아들.
청룡학관에 가면 그 얼굴 때문에라도 난리가 날 것이다.
옛날에 자신도 그랬으니까.
백무흔은 청룡학관에서 아내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당신이 옥면공자인가요? 흠……. 그렇게 잘생긴 것 같진 않은데.
-댁은 뭐요? 왜 기분 좋게 술 마시는데 나타나서 남의 이목구비에 대고 시비요?
-그래도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술 한 잔 사 줄래요?
-뭐래…….
첫 만남은 썩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병약하게 생겨서는, 당돌하게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바라보며 술을 달라니.
하지만 어느샌가, 자신은 그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약빙. 나와 혼인해 주시오. 내 지금까지의 행실은 개과천선하고 평생 그대만 바라보며 살겠소!
-……난 몸이 약해서 오래 살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좋아요?
-상관없소!
-……어차피 나 죽고 새장가가 가면 된다는 계산인 거죠?
-무, 무슨!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소!
두 사람은 달빛이 비치는 호수 앞에서 혼인을 맹세했다.
하지만 딸 사랑이 지극했던 장인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 도둑놈의 새끼! 감히 누구와 교제를 허락해 달라고?
-자, 장인어른…….
-누가 네놈 장인이냐! 내 너를 단매에 쳐 죽일 것이다!
-그만하세요, 아버지! 이 사람 죽이면 저도 따라서 죽을 거예요!
-너, 너너! 네가 어떻게!
그 당시의 장인어른을 떠올린 백무흔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용케 살아남았지.”
결국 장인어른은 아내와 의절을 선언했고, 두 사람은 내쫓기듯 청룡학관에서 도망쳤다.
-약빙! 내가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겠소! 당신의 병을 고칠 방법을 찾을 것이오!
-괜한 소리 말고 강호 유람이나 실컷 해요.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꼭 해 보고 싶었거든요.
백무흔은 아내와 함께 강호를 떠돌았다.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응애 응애애애애!
-약빙! 약빙! 정신 차리시오!
-……사내예요? 딸이에요?
-사내아이요! 당신을 꼭 닮은 사내아이요!
“약빙. 그 갓난쟁이가 저렇게 컸소.”
백수룡의 모습은 이미 한참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백무흔은 아들이 떠난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죽을 때까지 평생 품고 살려고 했는데…… 이젠 필요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보내 줬소.”
어딘가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당신을 닮아서 여자 꽤나 울리고 다닐 거예요.
“하하. 아무래도 그렇겠지.”
홀로 웃음을 터트리던 백무흔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지금이라도 쫓아갈까?”
아내가 남기고 떠난 하나뿐인 선물이다.
그녀를 꼭 닮아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당돌하고, 자주 말썽을 부렸지만…….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어줄 수 있는 혈육이다.
“몰래 따라가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거라면…….”
-관둬요. 모양 빠지게 뭐 하는 짓이에요. 비무에서도 졌으면서.
아내의 한마디에 백무흔은 멋쩍게 웃었다.
“하하. 그렇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비무에서도 졌으면서 누가 누굴 지켜 준단 말인가.
비록 그 비무에서 자신은 내공도 쓰지 않고, 전력도 다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진 것은 진 것이지.
“내가 그 아이에게 졌소. 하, 하하……. 하하하.”
이상하다. 분명 즐거워서 웃는데 눈물이 나오려 한다.
웃음이 천천히 울음으로 변한다.
참아 보려 하는데도,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도리가 없다.
“약빙. 그 애가…… 말이오.”
백무흔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꾹 참으며 중얼거렸다.
“내 탓이 아니라고 했소. 당신이 죽은 것도 내 탓이 아니고, 자신이 허약하게 태어난 것도 내 탓이 아니라고 했소.”
-지금까지 당신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하지.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당신은 그렇게 빨리 죽지 않았을 거요. 그리고 저 아이도…….”
그의 입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아내가 대신했다.
-태어나지 않았을 거라고요? 진심이에요?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그런 뜻이 아니오.”
-난 당신을 만나 진심으로 행복했어요. 불행하게 몇 년 더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었겠어요?
약빙은 죽었다.
지금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환청이고, 어찌 보면 기만이다.
-우리 아들도 마찬가지예요. 아까 하는 말 들었잖아요? 이젠 다 컸어요.
하지만 위안이 된다.
“맞소. 대체 언제 저렇게 컸는지…….”
-이젠 우리 품을 떠나서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줘요.
“크흑…….”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왈칵 쏟아지며, 백무흔은 어린애처럼 끅끅대며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그곳에서 한참을 울었다.
“후우…….”
모든 것을 쏟아낸 후,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백무흔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이젠 뭐 할 거예요? 눈치 볼 아들도 없으니 새장가라도 들 건가요?
아내의 새침한 목소리를 떠올린 백무흔은 빙긋 웃었다.
“새장가는 무슨. 그동안 제대로 못 익힌 무공이나 익힐 생각이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 연무장 위로 붉게 노을이 드리워졌다.
백무흔은 그 아래에 가볍게 검을 쥐고 섰다.
“후우…….”
수십 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수련해 온 회풍검법을 오늘도 펼쳐 냈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달랐다.
그의 손짓에 따라 연무장에 흙먼지가 어지럽게 피어오르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잎들이 돌개바람을 따라 나선 모양으로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의 검은 한없이 자유로워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회풍검법의 모든 초식을 펼친 백무흔은 자리에 멈춰 섰다.
-축하해요.
“……고맙소.”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백무흔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검에 선명한 검기가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