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189
188화. 숨바꼭질 (1)
“그놈. 지금 어디에 있소?”
매극렴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규칙적으로 검파를 툭툭 치는 손가락은 고된 수련으로 인해 마디마디가 굵직했고, 딱딱하기는 돌덩이 같았다.
백수룡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악인곡에서 저 손에 죽어 나간 마두만 두 자릿수가 넘었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동하는 순간 원하는 곳에 검을 찔러넣을 수 있는 절정의 검객, 그가 바로 매극렴이었다.
“백. 무. 흔…….”
한 자 한 자 씹어뱉는 목소리에는 철천지원수의 이름을 부르는 듯 살기가 넘쳐흘렀다.
그의 검이 적을 향할 때는 천군만마가 따로 없었지만, 가족 간에 칼부림에 사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백수룡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 할아버님…….”
“너는 가만히 있어라. 다시 묻겠소. 백무흔 그놈. 지금 어디에 있소?”
주변의 공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살기가 매극렴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헌원수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찾으시는 겁니까?”
비록 백무흔과 술 몇 잔 나눠 마신 것이 전부라지만, 헌원수는 백무흔의 몇 마디에 용기를 얻어서 선우 가주 앞에 나설 수 있었다.
때문에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살기를 내비치는 매극렴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매극렴은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혼잣말을 했다. 마치 곧 피를 먹여 주겠다는 듯 스산한 미소가 함께.
“그 개잡놈이 이곳에 왔단 말이지. 천하의 개잡놈. 포를 떠서 들개에게 나눠 줘도 모자랄 놈…….”
“이보시오, 어르신! 말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심하다고?”
두 사람의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백수룡이 다급하게 헌원수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분은 장인어른입니다!] [……예? 선생님 혼인하셨습니까?] [아니, 제 아버지의 장인어른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 외조부십니다. 어머니 일로 사위와 사이가 많이 안 좋으십니다.]백수룡이 빠르게 말하느라 복잡하게 설명하고 말았지만, 다행히 헌원수는 단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아이고…….”
절로 아이고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장인과 사위의 관계라니.
매극렴의 사나운 눈빛과 반응이 단숨에 이해되었다.
헌원수가 태도를 바꿔 공손하게 대답했다.
“백수룡 선생님의 부친과는 어제 함께 비무를 구경하다가 헤어진 이후로 보지 못했습니다. 해서, 저도 마침 선생님께 여쭤보던 참입니다. 서로 초면이었던지라 머무는 장소도, 연락할 방법도 묻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헌원수를 한동안 빤히 보던 매극렴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미안하오. 그 개잡놈만 떠올리면 감정이 주체가 안 돼서. 아직도 수양이 부족한 탓이오.”
“아닙니다. 그러실 수 있지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헌원수는 매극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백무흔을 부르는 호칭도 바뀌었다.
“백무흔 그자의 얼굴을 떠올리니, 어르신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마음은 고마우나 함부로 타인을 이해한다 말하지 마시오. 나는 그 개잡놈에게…….”
“제게도 딸이 하나 있습니다.”
“호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매극렴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뭔지 모를 유대감이 생긴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수가 말했다.
“그런 기생오라비 얼굴을 가진 놈한테는 절대로 딸을 못 주지요. 딸이 그놈과 같이 살면,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하겠습니까.”
“뭘 좀 아시는 분이로군. 딸이 어느 날 허우대만 멀쩡한 놈을 데려와서 혼인하겠다고 했는데, 글쎄 그때 그놈 별호가 옥면공자였소.”
“허어! 저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요절을 냈을 겁니다.”
“그러려고 했는데 딸이 막아서 못했지. 그리고……. 하여튼 그날부터 놈과의 악연이 시작되었소.”
“저런…….”
“가주께서도 늘 조심하시오. 무림에는 우리 딸들을 노리는 개잡놈이 아주 많소이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하오.”
딸 가진 아비들은 다 저런 것일까.
사내놈들은 다 적이라는 듯 의기투합한 모습에 백수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헌데.”
그 와중에 매극렴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가주의 딸은 나이가 어떻게 되오? 마침 내 손주가 혼기가 찼는데, 마땅한 배필이 없어서 걱정이라오.”
“……죄송하지만 아직 열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내 손자는 무공의 경지가 높아 오 년 후에도 능히 건강과 젊음을 유지할 것이외다. 게다가 청룡학관 강사라서 수입도 안정적이오. 무림에도 큰 뜻이 없으니, 밖에서 객사할 일도 없지.”
“할아버님? 이야기가 갑자기 왜 그쪽으로 진행됩니까?”
갑작스러운 전개에 백수룡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매극렴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가만히 있어라. 네놈이 생긴 것과 다르게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니, 나라도 나서야 죽기 전에 증손을 볼 것 아니냐. 가주께서는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흐음…….”
헌원수는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백수룡을 힐긋거렸다.
“선생님께서 훌륭하신 배필감인 것은 잘 알지요. 헌데 백수룡 선생님도 여자깨나 울리게 생긴 얼굴이라 걱정이…….”
“내 손자는 외탁을 해서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아이요. 간혹 날파리가 꼬이긴 하지만, 이 녀석 아랫도리 간수는 내가 옆에서 확실하게 시킬 것이오.”
“호오. 그렇다면야…….”
탐난다는 듯 자신을 훑어보는 헌원수의 시선에, 백수룡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두면 열두 살 꼬맹이와 맞선을 보게 생겼다.
백수룡은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만들 하시고요. 아무튼 가주님. 저희 아버지를 만나셨다고요?”
“예. 어제 뵈었습니다.”
헌원수는 백무흔을 만났던 상황을 두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짧게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기에 전할 것이 많지는 않았다.
“아드님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더군요. 바라보는 눈빛에서 애정이 가득 느껴졌습니다.”
“흥.”
매극렴은 여전히 못마땅한지 코웃음을 쳤다.
헌원수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십시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선생님.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진천도의 비급을 보물처럼 품에 안은 헌원수가 안으로 들어가고, 백수룡과 매극렴은 자리에 남았다.
“후우…….”
“…….”
백수룡은 한숨을 내쉬는 매극렴의 눈치를 살폈다.
심란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보던 매극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양심이 있다면 맨정신으로 나를 만나러 오지는 못할 테지.”
백무흔에게 하는 말이리라.
삼십 년 전, 자신의 딸과 함께 야반도주한 천하의 죽일 놈.
딸에게 먼저 의절을 선언한 것은 매극렴 자신이었으나, 설마 그대로 그렇게 떠나 버릴 줄은 몰랐다.
몸이 약했던 딸은 백무흔 그놈과 함께 무림을 떠돌아다니다 결국 객지에서 명을 다했고, 매극렴은 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
노인의 눈에 짙은 후회, 분노, 슬픔, 고통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하지만 나는 네놈을 꼭 만나야겠다. 단매에 쳐 죽이든, 아니면…….”
한참을 중얼거린 매극렴이 백수룡을 돌아봤다.
“수룡아.”
“예. 할아버님.”
“내가 이곳에 며칠 머물러야겠다.”
“예?”
백수룡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매극렴은 이미 마음을 굳힌 것처럼 보였다.
“그 개잡놈은 너를 만나러 왔을 것이다. 기회를 봐서 너만 보고 돌아갈 속셈일 터.”
백수룡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백무관에서 떠나오기 전, 백무흔은 자신의 장인어른을 무척이나 어려워했으니까.
“너와 함께 있어야 놈을 만날 기회가 생길 것 같구나. 그러니 한동안 출퇴근도 함께해야겠다.”
“음. 그게…….”
“싫으냐?”
백수룡은 고개를 저었다.
싫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요즘 백수룡의 퇴근이 매우 늦고 불규칙하기에, 평생 규칙적인 삶을 살아온 매극렴이 불편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신경 쓰지 말거라. 네 일에 방해되지 않게 할 터이니.”
“알겠습니다. 남는 방 많으니 편한 방으로 골라잡으세요.”
“……들어가기 전에 잠시 걷자꾸나.”
조부와 손자는 담벼락을 따라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나저나 혼인 생각은 정말 없느냐?”
“……있어도 최소한 열두 살은 아닙니다. 할아버님. 그건 범죄라고요.”
“네놈 일하는 꼴을 보면 최소 오 년은 혼인은커녕 여자도 못 만날 것 같아서 그랬다.”
“…….”
“고얀 놈. 아니라는 말은 못 하는구나. 그 개잡놈 씨에서 어찌 이런 훌륭한 목석같은 놈이 나왔는지…….”
“그거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역시 외탁을 한 모양이다.”
매극렴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농담을 하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백수룡은 그의 웃음이 평소보다 힘이 없고, 허탈하다고 느꼈다.
‘생각이 많으신 모양이군.’
백무흔과 매극렴.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백수룡도 그것만은 쉬이 예상되지 않았다.
* * *
며칠 후.
수업 시간.
빠악!
“아악!”
헌원강이 정수리를 감싸며 바닥을 굴렀다.
그 앞에는 흑룡편을 든 백수룡이 혀를 차고 있었다.
“이게 아주 빠져가지고. 파천도? 별호 좀 생겼다고 벌써 천하제일도객이라도 된 것 같냐?”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도법에 허세만 잔뜩 늘어서는. 이걸 콱 그냥.”
백수룡이 팔을 들어 올리자, 헌원강이 놀라서 목을 자라처럼 집어넣었다.
백수룡은 고개를 돌려 다른 학생들을 돌아봤다. 그의 표정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희도 마찬가지야. 최근에 회장 선거다 뭐다 해서 바빴던 건 아는데, 마음이 아직도 콩밭에 가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게…….”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동연 선거는 끝났고, 학생들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들뜬 마음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천무제 우승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제자들의 이런 태도는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시 정신무장을 시켜 주마.”
백수룡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목을 좌우로 우둑우둑 꺾자, 제자들이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자, 잠깐만…….”
“선생님! 저희 말로 해도 충분히 알아듣는다고요!”
“도망쳐!”
“젠장! 문이 닫혔어!”
눈치 빠른 몇 명이 도주를 시도해 보았으나, 강의실 문은 이미 밖에서 닫혀 있었다.
백수룡이 사악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흐흐흐. 오늘은 사파 놈들이 얼마나 악독하게 사람을 패는지 경험하는 실습이다!”
““뭐 이딴 실습이 다 있어!””
백수룡은 비호처럼 달려들어 정신이 해이해진 제자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빠바바바박!
매타작 소리와 제자들의 비명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끄아악! 이 악마!”
“사람 살려!”
약 반 시진 후, 백수룡은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손을 탈탈 털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다음 시간에는 눈에 더 독기를 담아 오도록.”
“으으…….”
“차라리 죽여…….”
“누가 무림맹에 신고 좀 해 줘…….”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제자들을 뒤로하고, 백수룡은 강의실을 나섰다.
수업을 마친 그는 곧장 생활지도부로 향했다.
백수룡의 공식적인 업무는 수업, 그리고 생활지도부 소속 선생으로서 학생들의 일탈과 비행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서류 정리와 비공식적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도 많았다.
하지만 요즘, 백수룡은 좀처럼 업무에만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양반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바로 부친인 백무흔 때문이었다.
헌원강이 동연 회장으로 당선되고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백무흔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이쯤이면 그냥 고향으로 돌아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기야, 매극렴의 감시가 워낙 철통같기는 하지만.’
요 며칠 동안 매극렴은 백수룡과 출퇴근을 함께했고, 백룡장에서도 뒷간 갈 때 빼고는 백수룡을 시야에 두었다.
백무흔의 입장에서는 다가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건 뭐, 살수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백수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할 말이 있으면 서찰로 전할 것이지, 번거롭게 직접 찾아올 필요가…….
“……맞다.”
서찰이 있었다.
악인곡에서 돌아와 무림맹 지부에 보고하러 갔을 때, 고주열이 아버지에게 온 거라며 전해 준 서찰이 있었다.
당시 백수룡은 나중에 읽어 봐야지 하고 대충 방 안 서랍 어딘가에 넣어 두었다.
“퇴근하면 읽어 봐야겠군.”
백수룡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킁킁.
후각을 자극하는 주향에 백수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학생 기숙사 쪽이었다.
“어떤 새끼가 신성한 학관에서 술을 처먹어?”
백수룡은 기척을 죽이고 술 냄새를 풍기는 범인을 찾아 움직였다.
그의 확장된 오감은 이제 백 장 밖의 술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기숙사 옥상이로군.’
휘익!
백수룡은 단숨에 경공을 펼쳐 기숙사 벽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옥상에 가볍게 내려서자, 앉아서 유유자적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남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길게 묶은 말총머리에 품이 넓은 무복.
옆으로 반쯤 누워서 태평하게 호리병을 홀짝이는 그 뒷모습에 백수룡은 어이가 없었다.
“동작 그만. 대낮에 기숙사 옥상에서 술을 처먹는 용기는 칭찬해 주마.”
“…….”
“도망쳐 봤자 벌점만 늘어나니까 서로 피곤한 짓은 하지 말자. 술병 내려놓고, 셋 셀 때까지 이리 튀어온다. 하나.”
“……하하하.”
“음?”
백수룡은 그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놀랍도록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기파…….
“세상에.”
상대가 누군지 깨달은 백수룡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학관에 숨어 있었어요?”
“집에는 야차 한 마리가 지키고 있으니, 널 만나려면 여기로 오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
남학생인 줄 알았던 사내가 술병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서더니 몸을 돌렸다.
“오랜만이다. 아들아.”
백무흔이 아들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