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190
189화. 숨바꼭질 (2)오랜만에 백무흔을 마주한 순간, 백수룡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백무흔, 이 몸을 태어나게 해 준 아버지였다.
하지만 전에 알던 백무흔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백수룡은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백무흔의 눈빛이 표정, 분위기가 크게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껍데기는 그대로지만, 아예 다른 사람이 되셨네.’
과거의 백무흔은 일찍 사별한 아내와 허약한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괴로워했다.
겉으로는 밝고 유쾌해 보여도, 아들을 바라보는 눈에는 항상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백무흔은 전보다 훨씬 여유롭고, 자유로워 보였다.
마치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새처럼.
‘무공도 몰라보게 강해지셨고.’
백수룡이 백무관을 떠나기 전, 백무흔은 절정의 벽 앞에서 십 년 넘게 정체된 일류고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절정의 벽을 넘어, 이미 완숙한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면 무림을 다 뒤져도 흔치 않은 수준의 고수.
백수룡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뒷산에서 영약이라도 캐 드셨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너는 어디 절벽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기라도 했냐?”
“오랜만에 만난 하나뿐인 아들한테 웬 악담이에요?”
“여기까지 오는 길에 청룡신협이니, 악인곡이니,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아들을 보고 놀라기는 백무흔도 마찬가지였다.
백무관을 떠나기 전만 해도, 내공도 변변찮던 아들이었다.
그래서 아프지는 않을까, 청룡학관의 다른 강사들에게 무시는 당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그런데 오는 길에 들은 온갖 소문은 백무흔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백무흔은 그 소문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올해 천무제에서 청룡학관을 우승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한 신입 강사가 너냐?”
“예.”
“일타강사와 내기해서 수업을 하나 빼앗은 것도 너고?”
“맞아요.”
“악인곡에서 십대악인 중 하나를 죽이고, 청룡신협이라는 별호를 얻은 것도?”
“거 소문 참 빠르네.”
아들의 태연한 인정에, 백무흔이 입을 떡 벌렸다.
“무림에 남아 있는 기연을 쓸어 담기라도 한 거냐? 무슨 짓을 했길래, 오늘내일하던 놈이 몇 달 만에 초절정고수가 돼?”
“원래 무공에 관한 이야기는 혈육 간에도 함부로 전하지 않는 법입니다.”
대충 퉁치고 넘어가려는 아들의 모습에, 백무흔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참……. 어쨌든 말도 안 되게 강해졌구나.”
“아버지도요.”
불과 몇 달 만에 보는 것인데, 부자는 서로의 괄목상대한 모습에 감탄했다.
백무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이 불효자 녀석아.”
“장인어른한테 맞아 죽을까 봐 도망 다니느라 고생하십니다. 아버지.”
“한마디도 안 지는 걸 보니 내 아들이 맞구나. 옆에 와서 앉아라.”
피식 웃은 백무흔은 자리에 다시 털썩 앉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작게 한숨을 내쉰 백수룡이 그 옆에 가서 앉았다.
부자는 기숙사 옥상에 나란히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봤다.
백수룡이 질문했다.
“학관에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외부인은 출입 금지인데.”
무림 오대학관은 살수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기감이 뛰어난 고수들이 많은 데다가, 그 경계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무흔은 마치 제집 안방처럼 들어와 여유롭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백무흔이 호리병을 홀짝이며 웃었다.
“밖에서 며칠 살펴보니 삼십 년 전이랑 크게 달라진 것도 없더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학생들이 이용하는 개구멍이 있기 마련이지. 애들 심리가 다 비슷해.”
“에라이…….”
청룡학관의 원조 망나니가 이곳에 있었다.
백무흔이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소싯적 이야기를 계속했다.
“숨바꼭질이라면 옛날부터 도가 텄다. 그때도 네 외조부는 나를 잡지 못했어. 열 번에 여덟 번은, 야밤에 기숙사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
“두 번은요?”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그래도 안 죽었으니 된 거 아니냐?”
“어휴…….”
아들은 아버지를 철없는 학생 보듯 바라보며 혀를 차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보며 큭큭 웃었다.
“내 아들이 생활지도부 소속이라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외탁을 했나 보죠.”
“외탁이라니? 너 약빙이 소싯적에 얼마나 왈가닥이었는지는 외조부에게 못 들었냐?”
“진짜요?”
그러고 보니, 매극렴에게서 어머니 얘기는 거의 듣지 못했다.
백무흔은 오랜 과거를 회상하며 웃었다.
“약빙은, 말 그대로 내일이 없는 여자였다. 몸이 약한데도 기가 아주 셌지. 네 외조부도 하나뿐인 딸에게는 쩔쩔맸다. 다른 남자들? 말할 것도 없었지. 이 옥면공자를 휘어잡았던 걸 보면 말 다 한 것 아니겠냐.”
백무흔의 눈동자가 청룡학관 곳곳을 훑었다.
아내와 함께 걸었던 잔디밭, 기숙사 뒷길, 몰래 만나 사랑을 속삭이던 공간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아내에게 청혼했던 호수…….
과거를 훑는 백무흔의 눈동자가 아련하게 변했고, 속눈썹이 파르르 덜렸다.
“정말 대단한 여자였다. 그 작고 약한 몸으로 세상과 당당히 맞섰지. 그런 여자를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
“…….”
백수룡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백무흔은 그런 아들을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호리병의 술이 점점 줄어들었다.
“날이 좋아서 그런가, 오늘은 좀 취하는구나.”
“아버지. 딱 보니 새장가 가긴 글렀네요.”
“사실 우리가 첫 입맞춤을 한 장소가 여기다. 그때도 약빙이 먼저…….”
“아, 뭐래. 징그럽게스리.”
백수룡이 질색을 하며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백무흔은 옥상에 그대로 드러눕더니 푸흐흐 하고 웃었다.
이름 모를 철새 떼가 새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백수룡은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어른은 안 보고 갈 거예요?”
“지금 고민 중이다.”
백무흔은 팔베개를 하고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별로 고민하는 것 같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넌 신경 쓰지 마라. 어른들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할 테니.”
“아버지 때문에 외조부랑 출퇴근을 같이하는데, 집에 가서도 종일 감시당하는 아들 생각도 좀 해 주시죠?”
“되바라진 놈 같으니. 지금 고민 중이라니까.”
백무흔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이대로 두면 낮잠까지 잘 기세였기에, 백수룡은 얼른 본론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 아직 이걸 묻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너, 내가 전에 보낸 서찰도 안 읽었지?”
실눈을 뜬 백무흔이 노려보며 묻자, 백수룡은 멋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요즘 좀 바빠가지고. 거기 뭐 중요한 이야기라도 적혀 있었어요?”
“중요하지. 중요하고말고. 내가 백무관 문을 닫고 이 먼 곳까지 달려온 이유가 거기에 다 적혀 있지.”
“뭔데 그래요?”
백무흔이 몸을 일으켰다. 아들을 돌아보는 그의 표정에 조금 그늘이 졌다.
“그전에, 하나만 묻자. 너, 사고를 당하기 전의 기억은 좀 돌아온 게냐?”
순간 백수룡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사고’라 함은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마공을 익히다가 쓰러진 날이었다.
그날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진짜 백수룡은 죽었고, 과거 혈교의 교관이었던 자신의 영혼이 이 몸에서 깨어났다.
“뭐, 드문드문…….”
백수룡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진실을 밝히기엔 너무 늦었으니까.
백무흔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혹시 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기억나느냐?”
백수룡은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백무흔의 얼굴에 그늘이 조금 더 짙어졌다.
“무슨 날인데요?”
“약빙의 기일이다.”
“아…….”
매약빙은 이 몸을 낳아 준 어머니였다.
백수룡은 백무흔에게 하듯, 그녀 또한 부모로서 존중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제사를 지내려고요?”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백무흔이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약빙의 유언이 자기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거였다. 대신 기일이 다가오면, 너와 함께 천하를 떠돌면서 즐겁게 유람을 하라는 거였지. 자신도 와서 함께할 테니 말이다.”
“…….”
“그래서 매년 이즈음이면 너와 함께 유람을 다녔다.”
“죄송하지만 전혀 기억이…….”
그 순간, 백수룡의 머릿속에 있을 리 없는 기억이 밀려들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아버지의 얼굴.
아버지의 손을 잡은 자신의 작은 손.
함께 산으로, 강으로, 도시로 유람을 다니던 어린 날의 기억들.
-수룡아. 이 꽃은 네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란다.
-향이 정말 좋아요!
하지만 고개를 들어 올려본 부친의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슬퍼 보였다.
‘뭐야 이건?’
혼란스러운 기억으로 백수룡의 표정이 굳는 가운데, 백무흔은 그것을 다르게 오해했다.
“억지로 기억할 필요는 없다. 그것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니니까. 네게 줄 물건이 있어서 왔다.”
“……줄 물건이요?”
“네 방 깊숙이 숨겨져 있던 것인데…….”
백무흔이 품 안에 손을 넣으려는 순간, 그의 표정이 굳더니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젠장. 망했군.”
“……그러게요.”
“너, 알면서 말 안 한 게지?”
“저도 방금 알았어요. 잠깐 딴 데 정신이 팔려서.”
“그걸 믿으란 거냐.”
아들을 한 번 째려본 백무흔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 뒤편에 새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곳에 숨어 있었더냐.”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건물 옥상에 매극렴이 사뿐히 내려섰다.
백무흔은 흐트러진 옷가지를 단정하게 하고 돌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장인어른. 오랜만에 뵙습니다.”
“…….”
백수룡은 매극렴은 입에서 온갖 육두문자가 쏟아질 거라고 예상했으나, 의외로 매극렴은 조용했다.
스르릉.
다만, 검을 뽑아 들었을 뿐.
“여러 말 할 것 없다. 검을 뽑아라.”
“꼭 이러셔야 합니까?”
“검객은 검으로 말하는 법. 너 또한 검을 익히지 않았더냐. 그 잘난 검으로 말해 보아라.”
“장인어른…….”
매극렴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살이 베일 듯한 날카로운 바람이 노인의 전신을 휘감더니, 다음 순간 그는 백무흔의 앞에 있었다.
채앵!
검과 검이 부딪치고, 백무흔의 신형이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매극렴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세 걸음이라. 그간 놀고 있지만은 않은 모양이구나.”
이내 코웃음을 친 매극렴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허공에 수십 개의 점과 선을 만들었다.
촤촤촤촤촤!
수십 개의 얇은 검기가 기숙사 옥상을 난도질했다.
백무흔의 옷자락이 베이고, 생채기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백무흔은 수비에 집중하며 이를 악물었다.
“……장인어른. 그만 좀 하십시오.”
“살고 싶다면 혀를 놀릴 힘으로 검을 휘둘러야 할 것이다.”
“대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뭐라?”
취기가 오른 탓에 백무흔도 평소보다 감정이 격해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주향과 뻔뻔한 말투가, 매극렴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몰라서 묻는 것이냐!”
매극렴의 검초에 맺힌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검극이 백무흔의 귓불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이건 위험한데.’
백수룡은 굳은 표정으로 아버지와 외조의 싸움을 바라봤다.
일단은 지켜보고 있지만, 상황이 심각해지면 나서서 말릴 생각이었다.
두 눈에 핏발이 선 매극렴이 외쳤다.
“백무흔! 나는 도저히 네놈을 용서할 수가 없다! 내 딸을 도둑질해간 것도 모자라…….”
“빌어먹을! 용서할 수 없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 매극렴의 검이 멈췄다.
하지만 공격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매극렴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감히…… 네놈이 나를 용서하지 못해?”
그의 검에 맺힌 검기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백수룡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약빙의 장례식에는 왜 안 왔습니까?”
“…….”
그 한마디에, 검에 넘칠 듯 너울거리던 검기가 크게 휘청였다.
매극렴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었다.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린 백무흔이 말을 이었다.
“약빙이 아플 때 몇 차례나 서찰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답장 한 번 안 하셨지요. 대답해 보십시오. 딸보다 그깟 무인의 체면이 더 중요했습니까? 의절했으니 죽든 말든 상관없었던 것 아닙니까?”
“…….”
“그랬던 당신이, 이제 와서 나를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기어이 매극렴이 검을 멈췄다. 그는 이가 부러질 듯이 악물며 말했다.
“이놈.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나는…….”
“제가 지금까지 무서워서 장인어른을 안 찾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당신이 미워서였습니다.”
“…….”
“약빙은 끝까지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그때 당신은 뭘 하고 있었습니까?”
“나는…….”
“저를 죽이려면 죽여 보십시오. 딸이 다닌 학관에 제 피를 뿌려 보시란 말입니다. 당신이라면 하고도 남겠지요.”
“…….”
백무흔은 매극렴의 오래된 상처를 사정없이 후벼팠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한 사람은 백무흔이었지만,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 사람은 매극렴이었다.
보다 못한 백수룡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하세요.”
백수룡은 질책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부친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백무흔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오늘은 제가 술이 과했습니다. 서로 감정이 격해진 듯하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매극렴은 백무흔을 붙잡지 않았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몸을 돌린 백무흔은 경공을 펼쳐 기숙사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직전에 아들에게 전음을 남겼다.
[오늘 밤 학관 동쪽에 있는 호수로 오거라. 네게 줄 것이 있다.]“…….”
백수룡은 점점 멀어지는 부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옆에는, 매극렴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