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194
193화. 기연 (1)‘이건…… 과거의 기억이로군.’
눈을 뜬 순간, 백수룡은 이곳이 과거의 혈교임을 깨달았다.
물론 현실은 아니었다.
역천신공의 공능이 전생의 기억을 꿈의 형태로 재현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무공이라기보다는 술법이라고 불러야겠네.’
오감이 완벽하게 느껴질 만큼 생생했다.
감탄하며 익숙한 풍경을 감상하려는 찰나,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앞을 가로막았다.
“왜 대답이 없어? 선배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눈이 호랑이처럼 크고 사납게 생긴 청년이었다.
“아니면 귓구멍이 처막혔어? 내가 뚫어 줄까?”
백수룡은 사나운 웃음을 흘리는 청년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초혁.’
혈교를 지탱하는 팔대가문 중 하나인 초(楚)가의 직계혈손.
교주의 친위대인 혈룡대 소속 선배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려 하지 않았으나, 입에서 저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과거에 겪은 일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놀랍도록 생생해. 상대의 표정과 말투, 기세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다니.’
백수룡은 관찰자의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죄송한 줄은 아나 보네?”
초혁이 다가와 하인 취급하듯 머리를 툭툭 쳤다. 무인에게는 당장 칼을 휘둘러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얌전히 있자, 초혁의 입가에 맺힌 거만한 웃음이 진해졌다.
“하긴. 남의 자리를 빼앗아서 차지했으면 당연히 미안해야지.”
“…….”
혈룡대에 들어온 첫날의 기억.
교주의 친위대인 혈룡대에 속한다는 건, 출셋길이 보장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혈교의 수많은 젊은 고수들이 이 자리를 노렸다.
하지만 자리는 한정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힘과 권력을 가진 팔대가문의 자식들이 차지했다.
“원래 이 자리에 누가 올 예정이었는지 알아?”
“……모릅니다.”
“당연히 모르시겠지. 알면 감히 이곳에 올 생각조차 못 했을 테니까.”
초혁은 그중에서도 가장 위세가 대단한 가문의 자식이었다.
정식 직위는 아니었지만, 나이로나 무공으로나 부대주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첫날부터 초혁에게 찍혔다.
“내 동생이 내정돼 있었다. 그런데 출신도 비천한 놈이 그걸 가로챈 거야. 너라도 화가 나지 않겠나?”
“…….”
초혁뿐만이 아니었다.
혈룡대의 다른 선배들도 자신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대부분 팔대 가문 소속이었고, 초혁과 척을 질 이유도 없었다.
백수룡은 자신을 둘러싼 선배들의 시선에서 경멸과 질시를 느꼈다.
‘다시 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구나.’
어느 무력대건, 첫 인사 자리에서 신입을 길들이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초혁은 그 핑계로 자신을 철저하게 밟아 놓을 속셈이었다.
“네가 역대 최연소로 혈룡대에 들어왔다며? 어떤 무공이든 세 번만 보면 파훼식을 만들 수 있다던데. 그럼 나 정도는 가볍게 이길 수 있겠군?”
히죽 웃은 초혁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붉은 혈포가 미친 듯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한번 보자. 얼마나 강한지.”
“…….”
대답 없이 차분한 시선으로 초혁의 기도를 살폈다.
몸의 형태와 근육이 발달한 정도, 손발의 위치, 그리고 방금 전 언행을 통한 성격을 가늠했다.
‘강하다. 절정 중에서도 상위.’
혈룡대 전원이 절정 이상의 고수라지만, 초혁은 그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
“……선배님. 지금 제 실력으로는 십 초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호오. 꼭 나중에는 이길 것처럼 말하네?”
“…….”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초혁의 몸에서 가공할 살기가 후욱! 끼쳤다.
동시에 다른 선배들이 물러나며 원이 만들어졌다.
사실상 도망치지 못하게 가둔 셈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닥치고 무기 들어. 그리고 앞으로 내 말에 토 달면…….”
초혁이 한 걸음 보법으로 내디뎠다. 쿵! 육중한 진각이 바닥을 울리고, 막강한 내력이 두 손에 일렁였다.
“죽인다.”
퍼엉!
순식간에 짓쳐든 장법이 허공을 격하고 폭발했다.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피하자 이어서 발길질이 날아왔다.
칼을 뽑을 시간조차 없었다. 두 손을 교차해 급히 발을 막았다.
빠바바박!
“크윽!”
하나하나가 뼈를 울리는 타격이었다. 단단하기가 무쇠 같고, 빠르기는 벼락과 같았다. 일격 일격에 담긴 내공은 혈교의 무공답지 않게 깊고 정순했다.
‘과연 혈룡대는 다르구나. 이렇게 생각했었지.’
백수룡은 느긋한 마음으로 싸움을 관찰했다.
어차피 몸을 움직이는 것은 과거의 자신이었으니까.
오히려 초혁의 무공을 꼼꼼히 살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또 다르군. 당시에는 초가의 권각이 폭발적이고 직선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초식이 섬세하기가 이를 데 없어. 초혁 이놈이 어설펐던 거지.’
백수룡은 습관처럼 상대의 무공을 파악하고 분석했다.
이 당시보다 보는 눈이 훨씬 높아졌기에, 보이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혈교 팔대 가문 중 하나인 초가의 권각은 신공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무공이었기에, 보면서 얻는 것이 많았다.
‘몇 가지는 녹림십팔식에 응용해서 익혀도 되겠어. 내가 직접 사용해도 되고, 제자들에게 가르쳐도…….’
그러다 문득,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잠깐만. 이거 어쩌면……!’
이곳은 백수룡의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재현한 꿈속이었다.
그리고 전생에, 백수룡은 혈교의 수많은 고수들을 만났다.
한 번 출진할 때마다 정파무림을 공포에 떨게 한 무력대의 수장들.
한 명 한 명이 구파 장문인에 필적한다던 장로들.
혈교의 기둥인 팔대가문의 가주들.
여기에 혈교의 지존인 혈마까지!
‘그리고 아직 시기는 꽤 멀지만…….’
혈교의 지하 뇌옥에는 천하제일을 논했던 네 명의 절대고수들이 갇혀 있다.
그들의 무공을 다시 볼 수 있다.
‘상상도 못 했던 기연이다.’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희열로 몸이 부르르 떨렸을 것이다. 하지만 전생의 그는 초혁의 공세를 피하기에 바빴다.
“제법이군!”
좀처럼 유효타가 들어가지 않자, 초혁은 이를 악물더니 공세를 더욱 높였다.
촤아아악!
초혁의 손톱이 공간을 찢는 소리가 매서웠다. 백수룡이 훌쩍 뒤로 물러나자 초혁이 쫓아오며 쌍장을 내밀었다.
공격에 담긴 내력에 주변 공간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였다.
퍼어어엉!
여파가 반경 오 장에 이를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하지만 초혁의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해 보였다.
건방진 신입이 여전히 두 발로 서 있는 탓이었다.
“……제가 졌습니다.”
내상을 입은 듯 얼굴이 창백하고 입가에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백수룡은 당당하게 두 발로 서 있었다.
“제가 졌으니 그만하십시오.”
혈룡대의 선배들이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이 정도로 신입이 기가 셀 줄은 몰랐던 것이다.
초혁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게 진 놈이 지을 표정이야?”
“저보고 어쩌란 겁니까?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뭐라고? 건방진……!”
초혁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그 위로 전류가 치직, 치직 하고 튀었다.
혈룡대의 무공인 혈뢰신공을 끌어올린 것이었다. 기세가 한층 강렬해졌다.
“후배가 가져야 할 겸손함을 몸에 새겨 주마.”
“저도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이 당시에는 상대에게 한 번 얕보이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꽤 날카로운 성격이었네. 지금 같으면 적당히 숙이고 들어간 후에, 음모를 꾸며서 거꾸러뜨릴 텐데.’
사실 교활함을 얻은 것은 단전을 잃고 나서였다.
이 당시의 백수룡은 전형적인 무인에 가까웠다.
그만큼 스스로의 무공과 자질에 자신이 있던 시절이었다.
푸화악!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동작에 살의를 담자 기도가 바뀌었다. 초혁도 경시하지 못하고 표정을 굳혔다.
두 사내의 살기가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낼 때였다.
“그쯤 하도록.”
“!!”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초혁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황급히 돌아선 초혁과 혈룡대의 선배들이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백수룡도 그들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대주!”
“대주!”
스무 명에 달하는 혈룡대 전원이 동시에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얼굴에 압도적인 강자를 맞이하는 공포와 경외가 어렸다.
얼굴에 큼직한 흉터가 있는 거한이 걸어왔다.
“더 이상 하면 둘 중 하나는 죽을 것 같군.”
거상웅이나 야수혁을 떠올리게 하는 거한이었다. 하지만 그 기도는 차원이 달랐다.
‘혈룡대주.’
백수룡은 복잡한 심경으로 옛 상관을 바라봤다.
교주의 친위대인 혈룡대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주의 권한은 특별했다.
혈룡대주는 교주와 교주의 친족을 제외한 누구라도 즉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타당한 이유만 있다면 장로도, 팔대 가문의 가주도 참한 후에 교주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만한 무력이 갖춘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혈룡대주의 존재감이 공간을 꽉 채웠다.
과거의 기억인데도 불구하고, 눈을 마주한 순간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이었다.
‘천검, 그 이상인가? 남궁제학만큼은 아닌 것 같지만…….’
백수룡은 직접 대면해 본 현 십대고수와 혈룡대주를 비교해 보았다.
정확한 수위는 직접 붙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현재의 십대고수와 싸워도 쉽게 밀리지 않을 강자인 것만은 분명했다.
“신입 환영식은 나중에 하도록.”
혈룡대주는 덤덤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초혁에게 말했다.
“……예.”
그 자존심 강한 초혁이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를 혈룡대의 부대주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대주와 그사이에는 까마득한 격차가 있었다.
혈룡대주의 시선이 백수룡을 향했다.
“신입은 나를 따라오도록. 함께 갈 곳이 있다.”
“예.”
벌떡 일어난 백수룡은 대주의 뒤를 따라갔다.
등 뒤에서 초혁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혈랑대주가 옆에 와서 걸으라고 말했다.
그는 보기와 달리 아주 무뚝뚝한 사내는 아니었다.
“전에 혈랑대에 있었다고 들었다.”
“혈랑대 십삼조에 반년 동안 조장으로 있었습니다. 별호는 사갈검(蛇蝎劍)입니다.”
사갈은 뱀과 전갈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그만큼 독종이라는 의미였다.
“이름은?”
“없습니다. 쭉 이십칠호로 불렸습니다.”
그 순간, 혈룡대주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맺혔다.
“숫자로 불리는 녀석은 오랜만에 보는군. 나는 삼십팔호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혈룡대주는 고아 출신이었다.
고아 출신으로 교주의 친위대인 혈룡대의 대주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
혈교의 수많은 하급 무사들에겐 희망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 사내는 내게도 목표였지.’
고아 출신이라는 공통점에서 약간의 동질감을 느낀 것일까.
혈룡대주가 조금 부드러워진 어조로 물었다.
“어떤 무공이든 세 번만 보면 파훼식을 만들 수 있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사실이 아닙니다.”
“흐음.”
순간 혈룡대주의 표정에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백수룡이 다음 말을 잇기 전까지는.
“웬만한 무공은 한 번이면 족합니다.”
“……푸핫!”
한 박자 늦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옆을 돌아보는 혈룡대주의 눈에 흥미가 가득했다.
“자신만만한 녀석은 싫어하지 않는다. 물론 능력이 받쳐 줄 때의 이야기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같은 고아 출신이라고 해서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마라. 나는 초혁과 네 사이를 중재해 줄 마음이 없다. 그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좋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혈룡대주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백수룡은 처음 들어와 본 혈교의 본성을 살펴보기 바빴다.
높고 견고한 성벽은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들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위엄이 느껴졌다.
곳곳에서 고수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말단 무사들은 평생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백수룡도 본성 안쪽까지 들어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혈룡대주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혈룡대로 소속을 옮기라는 통보를 받았다.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시키는 대로 명령을 따를 뿐, 의문을 품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놀랄 것도 당황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교주님을 뵈러 갈 것이다.”
“!!”
이어진 혈룡대주의 말에, 백수룡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혈룡대주를 바라보는 불경을 저질렀다.
“교주님께서 저를 왜…….”
“이유는 모른다. 교주님께서 직접 널 보고 싶다고 하셨다.”
“…….”
혈교의 지존을 만난다는 생각에, 온몸이 떨려오고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반대로, 과거의 제 모습을 지켜보던 백수룡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군.’
역대 최강이라 불렸던 역천신공의 계승자.
자신을 죽인 혈마와의 첫 만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