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227
226화. 남궁세가의 비밀 (4)-사자전언(死者傳言)
현판에 적힌 글씨를 본 백수룡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나왔다.
“여기가…… 혈교의 지부였다고?”
현판 아래,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커다란 바위로 막혀 있었다. 누군가가 밖에서 막아 놓은 듯했다.
백수룡은 앞으로 걸어가며 검을 뽑아 벼락처럼 휘둘렀다.
촤촤촤촤촤!
수십 조각으로 변한 돌 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백수룡은 장력을 내뿜어 돌 더미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드러난 건 반쯤 우그러진 거대한 철문.
혈교가 숭배하는, 피 흘리는 마귀의 형상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아아아아-
“무슨 한기가…….”
백수룡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우그러진 철문 틈으로, 피부가 오싹해질 정도의 한기가 흘러나오는 탓이었다.
백수룡은 내공을 끌어올려 한기에 저항하면서 양손으로 문을 밀었다.
끼이익…….
불쾌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안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상태였지만, 백수룡은 긴장을 풀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
백수룡은 앞에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악인곡에서 보았던, 마뇌가 후대의 혈마를 위해 안배해 놓았던 보물창고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곳은 혈교의 교도들이 실제로 살던 곳이었다.
교도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물건, 옷가지, 싸움의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새하얗게 얼어붙은 수백 구의 시체가 있었다.
공동 안의 기이한 추위에 반쯤 얼어붙은 시체들이, 제대로 썩지도 못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
오랜만에 본 검붉은 의복 차림 교도들의 모습이 묘한 감흥을 주었다.
저벅저벅.
고요한 공동 안에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백수룡은 천천히 공동을 가로지르며 시체들을 살폈다.
망자들은 피부 위에 하얀 서리가 내린 모습으로 수십 년 만의 방문객을 맞이했다.
분노에 일그러져 있거나,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죽는 순간에도 영문을 모른 것인지 편안한 표정의 시체도 보였다.
시체는 대부분 어른이었지만,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인은 전부 한 가지였다.
‘전부 검상에 의해 죽었어. 단 한 명이 한 짓이야.’
백수룡의 눈에도 감탄이 어릴 만한 고절한 검법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정황상, 절세 고수 혼자서 수백 명의 혈교도를 몰살시킨 것으로 보였다.
무림을 다 뒤져도 이런 수준의 검객은 몇 없다.
그리고 지금, 백수룡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검객은 단 한 명이었다.
“창천검왕…….”
백수룡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공동의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죽은 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살아 있었다면, 결국 혈교의 부활에 일조해 무림에 혈겁을 일으켰을 자들이니까.
‘남궁세가의 사당 지하에 왜 혈교의 지부가 있는 거지?’
남궁세가의 용인 없이는 이곳에 혈교의 지부가 설립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남궁세가 지하에 혈교의 지부가 있었던 걸까.
혈교가 망하기 전?
아니면 망한 후?
설마 아주 오래전부터 남궁세가는 혈교에 장악당했던 걸까?
그렇다면 여기 있는 시체들은 뭐지?
창천검왕은 이들을 왜 죽였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가지 가정이 있었지만, 아직은 섣부른 추측에 불과했다. 조금 더 단서가 필요했다.
백수룡은 공동 안을 둘러보며 점점 안쪽을 향해 걸었다.
‘이곳이 정말 혈교의 지부로 사용됐다면…….’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제단은 공동의 안쪽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잠시 후, 백수룡은 높게 세워진 제단을 발견했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제단 꼭대기에 힘없이 기대어 앉은 시체 한 구가 보였다.
그런데 이 시체는, 왠지 낯이 익었다.
백수룡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설마…….”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얼굴은 반쯤 뭉개져 있었기에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흑(黑)과 백(白)이 좌우에 절반씩 섞인 특유의 의복을 통해, 백수룡은 전생의 기억 속에서 상대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백수룡이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음양마존?”
음양마존(陰陽魔尊).
오십 년 전 혈교의 오장로였던 자로, 음양지체라는 특수한 체질로 극양의 무공과 극음의 무공을 동시에 연성한 초고수였다.
음양마존은 죽는 순간까지 억울함에 눈을 감지 못했는지, 눈을 부릅뜬 채로 천장을 올려보고 있었다.
“……유언을 남겼군.”
백수룡은 음양마존의 시체 주변에 피로 어지럽게 휘갈긴 낙서를 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미 없이 휘갈긴 낙서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혈교의 암어였다.
배신자에게 죽음을!
마지막 글자의 끝에, 음양마존의 왼손 검지가 부러진 붓처럼 놓여 있었다.
자신의 이빨로 손가락을 끊어낸 후,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바닥에 사자전언(死者傳言)을 남긴 것이다.
백수룡은 음양마존이 제단 주변에 빼곡하게 남긴 혈교의 암어들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글자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첫 문장을 찾아냈다.
남궁제학. 처음부터 그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남궁제학은 창천검왕의 이름이었다.
놈은 무림맹에 쫓기던 나를 찾아와 제안했다.
천하에 숨겨 놓은 본교 재물의 위치와 교의 무공을 건네준다면, 본좌가 데리고 있는 일백 교도들이 머물 안식처를 마련해 주겠다고.
백수룡의 눈동자가 커졌다.
음양마존의 유언을 통해, 남궁세가와 혈교에 얽힌 비밀이 하나씩 풀리고 있었다.
처음 십 년 동안 놈은 약속을 지켰다.
남궁세가의 사당 지하에 우리의 은신처를 만들어 주고, 무림맹의 추격대에 쫓기는 교도들을 찾아서 데려오기도 했다.
나는 그 대가로 본교의 무공과 재물이 숨겨진 장소를 알려 주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백수룡은 과거에 보았던 음양마존의 모습을 떠올렸다.
혈교의 장로치고는 인정이 많은 사내였다.
특히 무공에 대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좋아했는데, 가끔 교관들이 찾아가 조언을 구하면 귀찮아하긴커녕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탓에 혈교의 교관들 중에서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십 년이 지나자 놈은 변하기 시작했다.
지원이 줄어들었으며, 본교의 비전(? 典)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때라도 이곳에서 탈출했어야 했거늘…….
본좌가 어리석어 알지 못했다.
이곳은 안식처가 아니라, 짐승을 가두는 우리였음을!
음양마존이 남긴 전언에서 분노와 후회의 감정이 절절히 느껴졌다.
놈은 본교의 무공 교관들도 탐냈다.
본교가 무인들을 양성하는 데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전생의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에, 백수룡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남궁제학은 본좌에게 약속했다.
때가 되면 지상에 은신처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결국 본좌를 따라온 교관들이 그동안 쌓은 교육기술을 남궁세가에 전수했다.
하지만 약속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그 세월이 삼십 년이 지났다.
그리고 며칠 전, 놈은 검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잠시 손가락이 멈췄는지, 그 부분에서 핏물이 짙게 고여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만은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비밀이 새나갈 것을 두려워한 놈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까지 참살했다.
백수룡은 잠시 유언을 읽는 것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음양마존의 절절한 분노와 한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잠시 냉정함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
머릿속에서 장면이 펼쳐졌다.
무릎을 꿇은 채 도륙당한 교도들을 바라보며 절규하는 음양마존, 그 앞에 무표정하게 검을 들고 서 있는 창천검왕의 모습.
정파의 가면을 쓴 위선자의 진짜 모습이었다.
“쓰레기 자식.”
다시 눈을 뜬 백수룡은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음양마존이 남긴 유언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헌데 놈에게도 한 줄기 양심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놈에게 마지막 소원이 본교의 제단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고 죽는 것이라고 말하자, 순순히 물러나서 입구를 폐쇄하곤 떠났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무공을 잃은 본좌가 아무것도 못 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겠지.
……그 말이 맞다.
본좌는 놈이 막아 놓은 문을 뚫고 나갈 힘은커녕, 이 자리에서 죽어가고 있다.
아마 일 각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유언으로 남긴 글씨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뒷부분이 조금 더 남아 있었지만, 백수룡은 잠시 읽기를 멈추고 생각을 정리했다.
“창천검왕이 무림맹에서 추격 중이던 혈교의 생존자 중 일부를 먼저 찾아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공과 재물, 무인 육성법을 대가로 안식처를 제공했다. 그리고 골수까지 빨아먹은 후에 토사구팽했다는 건가.”
달리 말하면, 혈교의 재물과 무공, 그리고 무사들을 교육시키던 비법이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는 지금의 남궁세가의 기반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밖에 알려지면 난리가 나겠군.”
만약 이 사실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혈교를 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남궁세가가, 혈교의 잔당들을 자신들의 집안에 수십 년 동안 가둬 두고 이용한 후 몰살시켰다니!
의와 협을 논하는 명문정파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남궁세가의 명예는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창천검왕. 당신은 정말 미친 짓을 저질렀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수룡은 얼마 남지 않은 음양마존의 유언을 마저 읽었다.
흐흐…… 하지만 놈은 모른다.
본좌도 삼십 년 동안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남궁세가의 미래에 파멸의 씨앗을 심어 두었다.
그것이 언제 발아할지는 모르지만…….
“파멸의 씨앗?”
글씨는 점점 옅어졌지만, 대신 진득한 살기가 느껴졌다.
다행히 놈이 우리를 토사구팽하기 전, 몇 명을 간신히 밖으로 내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 아이들이 본교의 본단을 찾아갈 수만 있다면, 십 년이 걸리든 백 년이 걸리든 돌아와 본좌의 복수를 하리라!
배신자에게 죽음을!
음양마존이 남긴 전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흐릿했던 글씨가 마지막에 다시 진해졌다. 죽기 전에 잠시 기력을 되찾는 회광반조인 듯했다.
“…….”
백수룡은 음양마존의 시체를 잠시 바라보다가, 혈교의 제단 위에 반듯하게 올렸다.
비록 증오스러운 혈교의 장로이기는 했지만, 드물게 교도들을 아끼던 사내였다.
혈교의 무공 교관이던 시절, 백수룡도 그에게 조언을 몇 번 구한 적이 있었다.
백수룡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장로. 화장을 치러 주겠소.”
작은 인연이었지만, 그것도 인연이었다.
백수룡은 혈교의 장례법대로 그를 화장해 주기로 했다.
혈교도로서가 아닌, 한때 존경했던 한 명의 무인에 대한 예의였다.
주변에서 태울 만한 것들을 가져와 시체 주변에 둘러놓고, 내공을 일으켜 주변의 냉기를 몰아냈다.
옷은 전부 벗겼다.
태어났을 때 모습 그대로 시신을 태우는 것이 혈교의 방식이었다.
“잘 가시오.”
백수룡은 종이에 불을 붙여 장작에 던졌다.
화르륵!
장작에 불꽃이 번져 나가고, 따듯한 온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음양마존의 몸에 숨겨져 있던 마지막 전언이 드러났다.
그대는 본교의 사람이구나.
무림맹 놈들이 본교의 암어는 해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옷을 벗겨 장례를 치러 줄 생각은 하지 못했을 터.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마지막 전언에 백수룡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슴에서 시작된 음양마존의 마지막 전언은 배 쪽으로 내려갔다.
내 배를 갈라 보거라.
이 안에 남궁세가를 파멸시킬 안배를 숨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