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269
268화. 이 땅에서는
오늘도 백룡장 앞은 번호표를 든 무인들로 북적였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며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중 인상이 험악한 사내 하나가 투덜거렸다.
“젠장. 명성이 자자한 청룡신협을 만나려고 광동에서부터 달려왔거늘, 번호표나 받고 기다리란 말인가?”
“형장은 대기 번호도 많이 남은 것 같은데, 편하게 객잔에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소?”
다른 사내의 질문에, 인상이 험악한 사내는 팔짱을 끼며 백룡장의 담벼락을 노려봤다.
“좀이 쑤시는 통에, 객잔에서 얌전히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지금도 확 담을 넘어 버릴까 고민 중이오.”
그러자 주변 사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만류했다.
“청룡신협의 얼굴이라도 보고 돌아가려면 괜히 객기 부리지 마시오. 담을 넘었다가 제자들에게 얻어맞아서 내쫓긴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오.”
“뭐라? 이 몸이 고작 학관에 다니는 핏덩이들에게 질 것 같은가!”
“어이구. 자신 있으면 해보시든가. 우리야 재밌는 구경하고 좋지.”
“패기 넘치는 형씨. 빨리 넘어 보시오. 어떻게 되나 한번 봅시다!”
“이자들이 정녕……!”
인상이 험악한 사내는 씩씩거리면서도 함부로 담을 넘지는 않았다. 경고를 무시하기에는 왠지 찝찝했기 때문이었다.
‘담을 넘었다가 정말 어린애들에게 얻어맞기라도 하면 개망신이 아닌가.’
험악한 인상과 달리 소심한 사내가 속으로 분노를 삭일 때였다.
“어어? 저 사람 저거 새치기 아니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사내 하나가 호명되지도 않았는데 백룡장의 정문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봐!”
그때, 인상이 험악한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새치기하려는 사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침 너 잘 걸렸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대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돌아선 순간, 험악한 인상의 사내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그게…….”
깔끔한 인상에 표정이 거의 없는 사내였다. 가볍게 돌아서는 동작조차 절도 있게 움직여, 고집스럽다는 인상마저 들었다.
그런데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 위축이 된다.
인상파 사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번호표는 가지고 오셨는지…….”
“저는 공무(公務)로 이곳을 방문했습니다만?”
무표정한 사내가 눈매를 예리하게 좁히자, 인상파 사내는 갑자기 없는 죄라도 고백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갑자기 어린 시절, 술을 훔쳐 마시다가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고, 공무원이셨군요. 편히 볼일 보십시오. 하하하.”
“…….”
결국, 험악한 인상의 사내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구경하던 무인들이 모두 비웃었다.
“기세 좋게 나가더니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돌아왔군.”
“담을 넘어? 콩알만 한 간으로 잘도 그러겠소이다.”
“크흠흠!”
인상파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나름대로 변명을 했다.
“다들 못 들었소? 공무 집행 중이라잖소. 관에서 나온 사람이 청룡신협을 방문한 것이란 말이외다! 관무불가침 모르오? 관무불가침!”
관무불가침.
관이 개입될 만한 사고를 친 무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핑계이자, 조금 전 백룡장의 문을 열고 들어간 사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 말이 통한 것인지, 무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군관? 포두란 말인가?”
“옷을 보니 그런 것 같던데…….”
“포두라기엔 상당한 고수로 보였소. 그만한 고수가 뭐가 아쉬워서?”
백룡장에 들어간 사내의 정체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오던 중에, 누군가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말했다.
“지옥판관 청천!”
“뭐요? 그 사파의 대마두에게나 어울릴 법한 별호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모여들자, 떠들기 좋아하는 사내가 자신의 지식을 뽐냈다.
“이 도시의 별종 중 하나요. 포두인데 무공이 절정고수로 알려져 있는 데다가, 뇌물이 전혀 안 통하는 청렴결백의 화신이지. 특히 무림인들이 저지르는 범죄에는 자비가 없다고 해서 별호가 지옥판관이라오!”
떠버리의 거창한 설명에 몇몇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감히 무림인을 체포해? 관무불가침을 어기는 짓이 아닌가?”
“바로 그게 문제요!”
“응?”
“지옥판관이 가장 흔하게 쓰는 수법이, 무림인 범죄자의 팔다리를 자른 후에 무림인 대 무림인으로서, 비무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거요.”
“……정말이오?”
“이런 미친 자가 있나? 그걸 주변의 문파들이 내버려 둔단 말인가!”
“지옥판관에게 당한 자들이 대부분 명백히 죄를 지었고, 그가 의(義)와 협(俠)을 내세우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소?”
평소 군관들을 우습게 보던 무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관무불가침이고 뭐고 따질 명분이 없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무공이 고강한 데다 법과 공권력까지 등에 업은 포두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었다.
“하여튼, 형씨들도 저자의 눈에 띄지 마시오. 요즘 이 주변에 무림인 출입이 늘어서, 관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들었으니까.”
하마터면 범의 코털을 뽑을 뻔한 인상파 사내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청룡신협과는 무슨 인연이 있기에 저자가 이곳을 방문한 거요?”
“그건 나도 모르겠소. 설마 체포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남궁세가의 일 때문은 아닐지…….”
다들 궁금한 표정으로 백룡장을 바라봤지만, 청천은 이미 정문을 열고 들어간 후였다.
* * *
마당에서 수련하고 있던 제자들이 청천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청천 포두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너희 선생을 만나러 왔다. 안에 있나?”
“예. 방에 계세요.”
고개를 끄덕인 청천은 백수룡의 방으로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그리고 학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포두가 아니라 포도부장이다.”
“네?”
청천은 얼마 전 새로 맞춘 관복을 내공으로 크게 펄럭이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에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흘리듯 말했다.
“얼마 전에 승진했거든.”
멀어지는 청천의 뒷모습을 보며 제자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방금 승진했다고 자랑한 거지?”
“슬쩍 웃는 거 봤어요? 세상에. 그 청천 포두님이…….”
“승진한 게 좋긴 한가 봐.”
학생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청천은 곧바로 백수룡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백수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서자, 서류 더미에 파묻히다시피 한 백수룡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바깥의 줄이 길더군.”
“일하랴, 사람 상대하랴, 피곤해 죽겠어. 슬슬 손님도 그만 받으려고.”
백수룡이 길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열흘이 넘도록 오는 손님 마다하지 않고 전부 상대해 주었으니, 한동안 대문을 걸어 잠글 명분은 충분했다.
어차피 진짜 고수들은 소란이 잠잠해진 후에야 찾아올 확률이 높았다.
청천이 그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너도 어지간히 일 중독이로군.”
“남 말 할 처지야? 이 동네에서 제일 바쁜 포두 양반이.”
“포도부장이다.”
“아, 얼마 전에 승진했다며. 축하한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잠시 잡담을 나눴다.
청천이 백수룡 주변에 쌓인 서류를 둘러보자, 백수룡이 그중 하나를 들고 흔들었다.
“내일부터 기말고사거든.”
청천은 백수룡이 흔드는 서류에 적힌 글을 조금 읽었다.
잠시 후, 웬만해선 변하지 않는 청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시험이라고?”
“흐흐. 재미있을 것 같지?”
악마처럼 웃는 백수룡을 보며, 청천은 내일 시험을 치를 학생들에게 미리 애도를 표했다.
“그래서 갑자기 날 찾아온 용건이 뭐야?”
“최근 도시에 무림인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나 때문에?”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널 찾아온 무림인들이 객잔 등에서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있고, 무림인들이 모이니 서로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관의 인력으로는 이제 한계다.”
“음…….”
백수룡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다행히 그의 고민이 깊어지기 전에, 청천이 미리 생각해 온 해결 방안을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갱생문을 좀 빌릴 수 있을까?”
“갱생문 애들을? 호오…….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백수룡은 단숨에 청천의 의도를 이해했다.
“갱생문을 이용해서 도시의 치안을 해치는 무림인들을 때려잡겠다, 이거지?”
더불어 삼류 왈패들의 조직으로 시작한 갱생문의 평판을 바꿀 절호의 기회였다. 백수룡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음대로 데려다가 써. 그 녀석들도 이제 꽤 쓸 만해졌으니까.”
“마음이 한결 놓이는군.”
빈민가 출신인 청천이라면 갱생문도들을 다루는 데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용건은 그게 전부야?”
“한 가지 더. 무림맹주가 온다는 소식은 들었나?”
“들었지.”
백수룡은 개방과 하오문에서 정보를 꾸준히 받아보고 있었다.
무림맹주의 청룡학관 방문이 곧 공식적으로 발표될 것이다.
수행원만 백 명이 넘는 거창한 행차가 될 예정이었다.
“다행히 기말고사 기간이 끝나고 도착할 것 같아. 학사 일정이 안 꼬여서 다행이지.”
그런데 청천의 표정이 조금 묘했다.
“못 들었나 보군. 무림맹주가 청룡학관을 무림맹 산하로, 전시편제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뭐?”
백수룡의 표정이 굳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자세히 얘기해 봐.”
“무림맹주는 이미 혈교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모양이더군. 관에도 협조 공문이 내려왔다. 오늘 알게 돼서 바로 알려 주려고 온 거다.”
“…….”
“명목은 무림맹 강서 지부 및 청룡학관 시찰이지만, 진짜 목적은 청룡학관 자체인 모양이더군.”
청룡학관을 비롯한 오대학관은 무림맹의 산하 단체가 아니다.
오히려 협력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무림맹주는 준전시 상황을 핑계로, 청룡학관을 통째로 집어삼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 속셈을 알게 된 백수룡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누구 마음대로?”
청룡학관을 무림맹 산하 전시편제에 소속시킨다?
학생들의 생사여탈권을 무림맹주가 쥔다는 이야기였다.
이후의 학사 일정에도 개입할 것이 뻔했고, 어쩌면 전쟁에서 학생들을 미끼나 소모품으로 사용할지도 모른다.
현 무림맹주는 혈교를 박멸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내였으니까.
‘혈교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건 동의하지만, 멋대로 내 제자들을 끌고 가서 싸우게 하는 꼴은 못 보지.’
미리 알게 돼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당할 뻔했다.
백수룡이 청천에게 말했다.
“알려 줘서 고맙다. 덕분에 미리 대비할 수 있겠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도록. 무림의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 좀 해 보고.”
할 말을 모두 마친 청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를 길게 나누기엔, 둘 다 공사가 다망한 몸이었다.
다만, 청천은 한 가지는 묻고 싶었다.
“무림맹주와 맞설 생각이냐?”
“그건 그쪽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백수룡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누가 저런 말을 하면 객기를 부린다는 생각부터 들 텐데, 이상하게 백수룡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청천은 관아로 돌아가는 길에 이유를 깨달았다.
‘하긴. 이 도시의 상권에, 공권력에, 인맥, 무력, 이제는 천하를 들썩하게 하는 명성까지 얻었으니…….’
청천은 백수룡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천하십대상단인 금룡상단의 비호 아래 무섭게 성장 중인 백룡상단.
전례가 없는 승진을 거듭하고 있는 포도부장 청천.
서찰 한 통이면 만 명의 군사라도 당장 보내 줄 승상 공손수.
삼류 왈패들의 조직이었으나, 이제는 어엿한 무림문파로 변모 중인 갱생문.
“여기에 내가 모르는 것들도 분명히 더 있겠지.”
설사 무림맹주가 온다고 해도, 백수룡이 기 싸움에서 밀릴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청룡신협이 무림맹주보다 강할 것 같군.”
피식 웃은 청천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관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