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25
324화. 만약에 말이야
“사도…….”
방주는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신협이라면 충분히 알 수도 있는, 그리고 알아야 하는 정보라고 판단한 것이다.
“혈교의 사도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네. 한 명 한 명이 절세고수라는 것. 그리고 오십 년 전 혈교와 무림맹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정도가 그나마 알려진 사실이지.”
“……처음 보는 고수였다는 말입니까?”
“맞네. 그전까지는 누구도 사도에 대해 알지 못했어. 혈교에 그런 비밀병기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비밀병기’라는 말에 백수룡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저도 모르게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나? 조금 전부터 낯빛이 좋지 않은데.”
방주는 창백하게 굳은 백수룡의 표정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백수룡은 억지로 괜찮은 척하며 웃었다.
“조금 피곤할 뿐입니다. 계속 이야기해 주십시오.”
백수룡은 심호흡을 하며 날뛰는 감정을 조절했다. 침착해야 한다. 이 이상 과민하게 반응하면 방주가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야.’
차라리 내상을 입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 관리가 안 돼도 핑계를 댈 수 있으니.
다행히 방주는 백수룡의 몸 상태를 염려할 뿐이었다.
“힘들면 말하게. 이야기는 다음에도 해 줄 수 있으니.”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고집은……. 하여튼, 나는 지난 전쟁에 참여했었다네.”
오십 년 전 혈교와의 전쟁.
당시 젊고 패기 넘치는 무인이었던 방주는, 스승이었던 전대 방주와 함께 전장에 합류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 시절을 덤덤히 회고했다.
“무림맹은 승리를 낙관했지. 혈교는 내분으로 약해져 있었으니까. 장로들 중 절반이 죽었고, 혈교 본단이 초토화됐다는 세작의 정보가 있었어.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겠나. 사기충천한 정파의 무인들이 혈교의 본단이 있는 신강으로 쳐들어갔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 안에는 포함되지 못해도 한 지역에서 명성을 날리는 문파와 가문들 역시 집결했다. 여기에 의(義)와 협(俠)을 숭상하는 협객들도 합류했다.
독보강호하던 고수들, 은퇴를 선언했던 전대의 고수들, 심지어 고작 지학을 넘긴 소년 무인들도 함께 싸우겠다고 먼 길을 달려왔다.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만 해도 진땀깨나 빼는 일이었다.
척마멸사의 기치 아래 모인 정파무림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들은 혈교를 멸하기 위해 거침없이 진군했다. 누구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들었던 대로 혈교는 정상이 아니더군. 멀리서 봐도 파괴된 건물들이 보일 지경이었지. 흡사 커다란 지진과 폭풍이 휩쓸고 간 듯했어. 도사들은 천벌이라고 수군댔지.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무너진 벽을 타 넘었다네. 반대편에선 광신도들이 무기를 꼬나쥐고 달려들었고…….”
방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길게 호흡을 내뱉은 그가 말을 이었다.
“사방에서 피 냄새가 진동했지. 전장은 멀쩡한 사람조차 악귀로 만든다네. 옆에서 사형제들이 죽어가고, 눈먼 칼에 맞아 팔다리가 날아가지. 상상도 못 했던 끔찍한 일들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곳이라네.”
“…….”
지옥도를 펼쳐 놓은 듯한 광경.
오래된 과거를 훑는 노인의 주름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죽어간 친우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도저히 길게 이어 갈 싸움이 아니었네. 그래서 소수정예로 결사대를 이루어 동서남북에서 동시에 교주전을 습격하기로 했지. 나 역시 그중 한 곳에 포함되었다네.”
방주의 입을 통해,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모르는 전쟁의 비사가 풀려나오고 있었다.
“본대가 시선을 끌어주는 동안, 우리는 혈마가 있는 교주전을 향해 전진했네. 예상치 못했던 진법, 함정, 독, 강시 따위가 가로막았지만 모두 돌파했지. 모두 악에 받쳤어. 교주전으로 달려가 혈마의 목을 벨 생각뿐이었지. 그렇게 교주전까지 고작 백여 장이 남았을 무렵…….”
잠시 말을 멈춘 방주의 눈에 낯선 감정이 깃들었다.
공포. 놀랍게도 그것은 공포였다.
“사도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네.”
“……직접 사도를 보신 겁니까?”
방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본 것은 한 명이었네.”
“누구였습니까?”
순간 방주는 질문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누구였냐니?
얼마나 강했느냐, 어떻게 생겼느냐, 무슨 무공을 사용했느냐가 더 맞는 질문이 아닌가?
하지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상이 심한 모양이군.’
백수룡의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호흡도 일정치 않았다.
“자네. 아무래도 쉬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여기서 끊으시면 저 오늘 잠 못 잡니다.”
“꼭 옛이야기 들려달라고 조르는 손주 같구만.”
방주의 농담에 백수룡은 웃지 않았다. 혼자 멋쩍게 웃은 방주가 말을 이었다.
“흑립을 쓴 자였네. 온몸을 감싸는 흑의장포에, 흑립 아래로 드러난 얼굴에 검상이 가득했지.”
“……검상.”
“내 평생 그런 검객은 본 적이 없었네. 한 자루 검을 그야말로 귀신처럼 다뤘으니까. 아니, 그건…….”
방주는 적당한 말을 찾느라 잠시 고민했다.
“귀신 들린 검이 사람을 조종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군.”
“…….”
“당시 검왕이라 불리던 선배가 그자에게 패사했네. 내 기억으론 스무 합을 넘기지 못했을 게야.”
방주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찻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사도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깊이 각인돼 있었다.
“도무지 사람 같지 않은 자였네. 무림맹 고수들의 협공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피를 토하면서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더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어.”
“…….”
“결사대로 선별된 백 명 중, 살아남은 것은 나를 포함해 고작 열 명 남짓이었네. 그조차 우리가 놈을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놈이 스스로 물러난 덕분이었지. 끝까지 싸웠으면 놈도 죽었을 테지만…….”
무림의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치욕적인 이야기.
방주는 허탈하게 웃으며 백수룡을 바라봤다.
“그자가 바로 혈교의 일사도였다네.”
“일사도…….”
백수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더 이상 일사도의 정체를 부정할 수 없었다.
‘일호. 네가 일사도였구나.’
눈망울이 선한 녀석.
하지만 자신에 의해 감정이 말살되고, 결국에는 혈교의 비밀병기로 키워진 소년.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고작해야 하루에 한 시진에서 두 시진.
평소 짧은 수면 시간을 취하는 백수룡은, 지금도 종종 옛 제자들이 나오는 악몽을 꾸곤 했다.
백수룡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가 물러난 후, 우리는 교주전으로 향했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잘난 혈마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죽으려 했지.”
타구봉을 쥔 주름진 손등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방주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됐다.
“하지만 우리가 교주전에 도착했을 때, 혈마는 옥좌 위에 앉아 죽어 있었네.”
“……!!”
옛 제자에 대한 생각마저 잠시 잊게 만들 만큼 놀라운 이야기였다.
“누가 혈마를…….”
“더 놀라운 건, 주변에 싸움의 흔적은 없었다는 걸세.”
천하를 다 뒤져도, 혈마가 저항하지 못하게 죽일 살수는 없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백수룡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혈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입니까?”
“그렇네.”
“협공해서 죽였다는 이야기는…….”
“거짓일세. 누가 이런 허탈한 승리를 원하겠나? 각자 사문으로 돌아갈 우리에게는 영웅담이 간절히 필요했네.”
“…….”
그 혈마가 왜?
머릿속에서 온갖 의문이 들었으나, 정확한 답은 이미 죽어 버린 혈마만 알고 있을 터였다.
“놈은 웃고 있었네. 목숨을 걸고 그곳에 도착한 우리를, 옥좌 위에 앉아서 비웃듯 내려보고 있었지. 죽어서까지 우릴 농락한 셈이야.”
“…….”
긴 이야기를 끝낸 방주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새 몇 년은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군. 자네 몸도 좋지 않은 듯하니,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자리에서 일어난 방주는 백수룡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는 백수룡이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짐작했다.
무림맹의 무인으로서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몸조리 잘하게나.”
“……살펴 가십시오.”
백수룡은 방주를 배웅했다.
방주의 모습이 복도를 돌아 사라진 후에도,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푸른 달무리가 달 언저리에 뿌옇게 맺혀 있었다.
백수룡은 그 흐린 달을 올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
막연히 그 녀석들도 모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직접 확인하지도 않았으면서.
대체 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란 말인가.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백수룡은 자신의 성격을 잘 알았다.
이런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무의식 속에는 분명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옛 제자들에게 다시 검을 겨눠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피식.
백수룡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비겁한 놈. 이제 확실해졌으니, 도망갈 곳도 없구나.”
옛 제자들이 살아 있다.
방주에게 전해 들은 것은 한 명뿐이지만, 백수룡은 다른 녀석들도 살아 있으리라 짐작했다.
‘내가 그 녀석들을 죽일 수 있을까.’
전생이었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던 인간이었으니까.
상대가 누구건, 자신을 위협하고 죽이려 한다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
-교관님!
-선생님!
혈교의 옛 제자들과 청룡학관 제자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백수룡은 헛웃음을 흘렸다. 떨려 오는 손끝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하…….”
낮고 허망한 웃음이 밤공기 사이로 덧없이 흩어졌다.
“왜 혼자 청승을 떨고 있나.”
남궁수였다. 백수룡은 고개를 돌려 지붕 위로 올라온 남궁수를 향해 말했다.
“남궁수. 만약에 말이야. 이건 정말 만약의 경우인데.”
“…….”
“너 때문에 제자의 인생이 망가졌어. 그 녀석이 훗날 널 찾아와서 원망하면 어떻게 할래?”
“갑자기 무슨 소리지?”
남궁수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백수룡은 애써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럴 수 있잖아. 원하지 않는 무공을 익혀서 주화입마에 걸렸다든가, 어릴 때 매질을 당했던 일이 평생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든가, 거짓말을 한 스승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게 됐다든가……. 마지막은 좀 심했나?”
“…….”
정답을 원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속이 답답해서 아무렇게나 주저리주저리 지껄여본 말에 불과했다.
그런데 남궁수는 그 말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백수룡이 손을 저으며 웃었다.
“그냥 해 본 말이다. 너무 심각하게 듣지는 말라고.”
“나라면 다시 가르치겠다.”
“뭐?”
“내 잘못으로 학생이 잘못됐다면, 선생으로서 책임을 져야겠지. 그건 제대로 다시 가르치는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면?”
백수룡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물었다.
혈교는 그 아이들에게 온갖 세뇌와 암시, 금제를 가했다.
천하제일을 다투는 무공을 익힐 아이들이었다.
만약 배신이라도 한다면, 교에 어마어마한 위협을 끼칠 수도 있는 존재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감정을 잃도록 만들었고, 혈교에 대한 충성심만을 주입했다.
그들은 자신의 무공을 타인에게 전수할 수도 없었고, 스스로 무공을 폐하거나 자결할 수도 없었다.
오랜 시간에 거쳐, 그들의 육체와 혼에 새겨진 금제였다.
‘다시 가르치라고?’
불가능한 일이다. 백수룡이 아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불가능하다.
그 녀석들이, 자신을 다시 받아 줄 리 없다.
“불가능이라……. 해 보긴 했나?”
“…….”
“이상하군. 내가 아는 백수룡은 그렇게 말할 놈이 아닌데.”
“말이 쉽지…….”
“백수룡.”
남궁수가 단호하게 백수룡의 말을 끊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금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일타강사가 되는 것이 쉬운 줄 알았나. 어디서 사고를 쳤는지 모르겠지만,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져라.”
“…….”
“상담이 필요하다면 말하도록. 선배로서 조언 정도는 해 줄 테니.”
“큭큭…….”
백수룡은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남궁수의 말에서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대화를 나누다 보니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기는 했다.
“네 말이 맞아. 선생이라면 책임을 져야지. 어떤 식으로든…….”
해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책임을 진다.
그러려면…….
“일단 다시 만나야겠지.”
옛 제자들을 만날 것이다.
아직은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래도 만날 것이다.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
각오를 하고 나니, 손끝의 떨림이 조금은 잦아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