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29
328화. 헌원세가의 망나니는 (2)
저벅, 저벅.
그저 걸어올 뿐인데, 모두의 표정에 긴장감이 어린다. 기파를 두른 것도, 살기를 일으킨 것도 아니다. 타고난 제왕의 기백이 군중을 압도한다.
“팽사혁…….”
헌원강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걸어오는 팽사혁을 바라봤다.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은 무복으로도 다 감춰지지 않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두껍게 발달한 대흉근. 그러나 거구임에도 전혀 둔해 보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비호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복 위에 감색 장포를 두른 채 주위를 둘러보는 눈빛은, 마치 구름 위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먹이를 찾는 대호(大虎)를 연상시켰다.
‘전보다 더 강해졌구나.’
헌원강은 팽사혁을 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예전의 망나니가 아닌 것처럼, 저기 있는 팽사혁도 예전의 그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청룡학관을 떠나 천무학관에 편입한 팽사혁이 훨씬 더 강해져서 나타났다. 헌원강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입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맺혔다.
“팽가의 소가주?”
“어찌 소가주까지 이곳에?”
“헌원가주가 팽가를 초대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연회장에 모여 있던 무림인들은 산서 지방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날리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무인들은 격이 다른, 한 지방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는 무림의 호족이었다.
하북팽가(河北彭家).
수백 년의 역사와 세력을 자랑하는 대가문.
오대세가의 한 축으로, 패도적이고 강맹한 도법으로 수많은 도의 고수를 배출해 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헌원세가가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절에도 고절한 도법으로 하북팽가와 비교되었지, 세력으로는 결코 하북팽가의 아성을 넘보지 못했다.
그런 하북팽가의 후계자가 헌원세가의 연회에 참석했다?
‘축하를 하러 온 것인가, 경고를 하러 온 것인가…….’
‘예삿일이 아니구나. 헌원가와 팽가의 복잡한 은원을 생각하면 더욱.’
‘헌원가가 다시 날개를 달고 비상하려 하니, 팽가가 그들을 억압하려는 것인가?’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연회에 참석한 여러 문파, 가문의 무인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흠…….”
그때, 팽사혁도 헌원강을 발견했다. 다소 따분해 보이던 표정에 잠시 이채가 스며들었다.
‘뭘 봐?’
헌원강이 눈을 부릅뜨고 팽사혁을 노려봤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눈싸움이 되었다.
하지만 헌원가주가 앞으로 나서면서 두 사람의 눈싸움은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허허. 하북팽가의 소가주께서도 오셨군요. 다시 뵐 때마다 안계를 넓히니, 소가주의 성취가 실로 놀랍습니다.”
헌원세가의 가주가 하북팽가의 소가주에게 공손히 말을 높인다. 그것이 현재 헌원세가의 위치였다.
그 모습에 헌원강은 이를 악물었지만, 팽사혁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하고 불쑥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허허. 이해라니요. 편히 즐기다 가십시오. 먼 곳에서 오셨으니, 오늘 밤은 본가에서 묵고 가십시오.”
“헌원세가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하룻밤 신세 지겠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친 팽사혁은 뒤로 물러났다.
계속 대화를 나누기엔 두 사람의 연배가 맞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팽사군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
헌원강과 팽사혁의 눈이 다시 잠시 마주쳤지만, 둘 다 서로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 * *
하북팽가의 축하 사절이 온 이후로, 연회는 어딘가 경직되었다.
다들 헌원세가가 아닌 하북팽가의 눈치를 살피기 바쁜 탓이었다.
연회의 주인공이 바뀐 듯한 분위기.
아니, 실제로 주인공이 바뀌었다.
“자자, 다들 한 잔씩 하시지요.”
팽사군이 잔을 들어 올렸다. 누구도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하북팽가는 오랫동안 헌원가와 친우의 우애를 나눈 가문으로, 오랜 부침을 딛고 마침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헌원가에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팽사군은 방금 ‘헌원세가’가 아닌 ‘헌원가’라고 호칭했다.
언뜻 말실수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한 가문의 대표로 온 사절이 이런 일에서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헌원세가의 기를 죽이러 왔군.’
‘팽가가 작정을 했구나.’
헌원세가를 은근히 무시하고 깔아보는 언행.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헌원가주는 애써 웃었다.
“……허허. 감사합니다.”
친우의 가문.
한때는 그렇게 믿었던 적도 있었다.
수십 년 전 광마혈사로 헌원세가가 몰락했을 때, 하북팽가는 누구보다 먼저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지. 하북팽가가 친우가 아닌 주인과 종의 관계를 원할 줄은.’
진천도를 되찾은 헌원세가는 더 이상 하북팽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하북팽가가 그 사실을 곱게 여기지 않으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연회에 찾아와서 이토록 노골적으로 압박할 줄이야.
“축하할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팽사군은 헌원가주와 나란히 서서 떠들고 있었다.
아무리 하북팽가가 헌원세가에 비교할 수 없이 큰 가문이라 한들, 손님으로서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헌원가에 청룡신협이라는 든든한 친우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 또한 마땅히 축하드려야 할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청룡신협이 정말 십존의 자격을 갖췄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지만 말입니다. 하하!”
“…….”
하는 말마다 가시가 박혀 있었다.
헌원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팽사혁은 남의 일인 듯 무신경하게 술을 마셨다.
“가주님. 새로운 친우가 생겼다고 저희 하북팽가와 너무 거리를 두지는 마십시오.”
“거리를 두다니요. 무슨 말씀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팽사군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개인의 무공은 기껏해야 백 년의 영광을 누리지만, 가문은 수백 년 이상을 갑니다. 쌓아 온 역사와 힘이 다르지요.”
“…….”
청룡신협을 믿고 까불지 말라는 경고.
멋대로 팽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이기도 했다.
“……팽사군 대협. 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헌원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가문의 연회에 불청객으로 참여한 것도 모자라, 모욕과 협박까지.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팽사군과 똑바로 마주 섰다.
팽사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무슨 실례되는 말이라도 했나?”
“지금 한 말이 협박이 아니면 뭡니까?”
팽사군의 입가에 여유 가득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 하수를 보는 눈빛으로 헌원강을 바라봤다.
“못 본 새에 많이 컸군. 예전에는 내 얼굴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던 소년이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순간, 헌원강의 입가에도 뒤틀린 미소가 맺혔다.
망나니 생활은 이제 청산했다지만, 이런 얘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백수룡의 제자가 아니었다.
“예. 제가 좀 많이 컸습니다. 지금은 그 얼굴에 한 방 먹여 드릴 수도 있을 정도로요.”
“……뭐라?”
예상치 못한 말에 팽사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뒤쪽에서 “큭큭” 하고 웃는 팽사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파천도라는 별호를 이었다더니. 그 잘난 무공을 내게 견식시켜 주고 싶은 모양이구나.”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헌원강은 하북팽가의 당주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하거라!]놀란 헌원가주가 아들을 말리려 했으나, 헌원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굴복하면, 헌원세가는 평생 하북팽가를 넘어서지 못해.’
상대는 하북팽가의 가주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다.
기껏해야 당주.
물론 그것만으로도 무림에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닐 수 있는 위치였지만, 하북팽가에서 손에 꼽는 고수는 아니었다.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아.’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불가능했을 생각.
하지만 지금 헌원강의 판단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헌원강이 도파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헌원세가의 도를 보여 주지.”
“건방진……!”
팽사군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헌원강을 노려보았다.
감히 하북팽가 앞에서 헌원세가의 도 어쩌고를 운운하다니, 청룡신협에게 무공 좀 배웠다고 건방이 하늘을 찌르지 않는가.
“오냐. 내 너에게 진정한 도법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도록 하마. 칼을 뽑아라.”
팽사군의 몸에서 패도적인 기세가 피어올랐다.
언제 칼이 뽑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순간.
“형님. 술맛 떨어지는 짓 좀 그만하시오.”
“……소가주?”
팽사군이 당황한 얼굴로,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팽사혁을 바라봤다. 둘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사촌 형제였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도를 넘는군. 시비는 먼저 걸어 놓고 왜 애새끼한테 화풀이야?”
팽사혁은 큭큭 웃고 있었다. 들썩이는 어깨, 한 손에 든 술병 탓에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가주. 어찌 그런 안하무인의 언동을 하는 게요?”
팽사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팽사혁을 바라봤다.
오늘 하북팽가가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헌원세가를 억압하고, 주제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함이었다. 가주에게도 이미 허락을 받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하북팽가의 소가주가 훼방을 놓는단 말인가.
“안하무인?”
팽사혁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남의 집 잔치에 와서 초치는 것이 더 안하무인이지. 작작 좀 하란 말이오. 나이도 자기 절반밖에 안 먹은 핏덩이한테 무슨 짓인지. 쯧쯧.”
“팽사혁!”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팽사군이 팽사혁을 노려봤다.
그러나 팽사혁은 태연히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술 마시러 왔으면 술이나 마십시다. 뻘짓하지 말고. 너희들도 손에 힘 빼라.”
팽사혁이 눈짓을 주자, 도파에 손을 올리고 있던 팽가의 무인들이 눈치를 보다가 손을 내렸다.
팽사군은 당주지만, 팽사혁은 하북팽가의 소가주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너, 돌아가면 가주님의 분노를 어찌 감당하려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요.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본가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짓을 해야 하지?”
혼잣말을 툴툴거린 팽사혁이 팽사군에게 말했다.
“형님은 먼저 돌아가시오. 난 남아서 술이나 좀 더 마셔야겠으니까.”
“……!!”
헌원가주도 내리지 못한 축객령을 팽사혁이 내렸다. 팽사군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못 들었나? 이거 명령인데.”
“……후회하게 될 거다.”
팽사군은 그 말을 남기곤, 데려온 팽가의 무인 절반을 데리고 떠났다.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팽사혁이 연회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씩 웃었다.
“자, 이제 다들 편하게 연회를 즐깁시다.”
주위를 둘러보던 팽사혁의 시선이 다시 헌원강과 마주쳤다.
그 순간, 팽사혁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축하해 줄 건 축하해 줘야지. 여기까지 오려고 죽어라 발버둥 쳤을 텐데 말이야.”
“저 자식.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그러나 연회가 마무리되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어색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 * *
늦은 밤.
연회가 끝난 후에도, 팽사혁은 헌원세가의 마당을 걸어 다니며 술병을 홀짝였다.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맹수 같았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고개를 돌린 팽사혁이 어둠 속을 노려보자, 그곳에서 헌원강이 걸어 나왔다.
헌원강은 대뜸 따지고 들었다.
“아까는 왜 그랬냐?”
“뭘.”
“너네 사촌 형 쫓아낸 거. 돌아가서 혼나는 거 아니냐?”
팽사혁이 큭큭 웃었다. 언제나 느꼈지만,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웃음소리는 경박했다.
“난 승계가 확정된 소가주다. 잔소리야 좀 듣겠지만, 아버지도 날 어쩌지는 못해.”
“그래. 네 똥 굵다.”
“다른 것도 다 너보다 굵지.”
우람한 팔뚝을 스윽 자랑한 팽사혁은 남아 있는 술을 단숨에 비웠다. 헌원강은 계속 팽사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또 뭐냐?”
“아까 왜 날 도와준 거냐? 네가 안 나섰어도 내가 팽사군을 이겼을 거다.”
“병신. 내가 널 도와준 것 같나?”
“이 씨발놈이?”
팽사혁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헌원강을 바라봤다.
“팽사군이 지면 본가가 망신을 당하니까 말린 거다. 그 멍청한 새끼는 상대의 실력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더군. 그런 주제에 겉멋만 들었지.”
“……흠흠. 내가 좀 많이 세지긴 했지.”
은근히 인정받은 것 같아서 헌원강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팽사혁은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그래. 눈빛이 제법 건방져졌더군.”
팽사혁은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청룡학관에서 다음에 다시 붙자는 약속을 했을 때만 해도, 헌원강이 이렇게까지 강해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
“…….”
헌원강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팽사혁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는 중간에서 막을 사람도 없었다.
“……역시 안 되겠다.”
짧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헌원강이었다.
뚜둑, 뚜두둑.
목을 좌우로 꺾은 헌원강이 허리춤에서 도를 뽑아 들었다.
“몸이 근질거려서 천무제까지 못 참겠다. 한판 붙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팽사혁도 기다렸다는 듯 도를 뽑았다.
“이번에는 패는 맛이 좀 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