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33
332. 옛 상처
“육장로가 순교(殉敎)했습니다.”
“…….”
가부좌를 틀고 명상 중이던 흑립인은 눈을 떴다. 일순간 그의 안광이 새빨갛게 타오르다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후욱-
새하얀 숨을 내뱉은 흑립인은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누구에게?”
“청룡신협입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동안, 부복한 사내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이어진 흑립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요즘 그 별호를 자주 듣는군. 육장로의 마지막 보고는?”
“청룡신협이 무림맹에 나타났으며, 냄새를 맡은 것 같으니 처리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헌데?”
“그 후 연락이 두절되었고, 개방 방주가 청룡신협이 육장로를 죽였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
흑립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 몸을 일으켰을 뿐인데, 부복한 사내는 수백 자루의 검이 전신을 저미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절로 경외의 마음이 들었다.
‘일사도께서는 점점 더 강해지시는구나.’
부복하고 있는 사내는 혈교의 구장로였다.
그 또한 혈교에서 손꼽히는 고수였으나, 일사도 앞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비천하게만 느껴졌다.
‘무림의 어떤 고수가 저분의 검을 막을 수 있을까.’
구장로는 일사도의 압도적인 강함을 경외했다.
수십 년 전 비열한 무림맹을 상대로 가공할 신위를 보여 주었으며, 전쟁에서 패해 뿔뿔이 흩어진 교도들을 수습해 오늘날 교를 다시 일으킨 장본인.
최근에는 흑야마제의 반란을 제압하고, 지하 뇌옥에 가둔 혈교 최강의 고수.
‘교가 무림정복을 위해 진군하는 날, 정파의 위선자들은 모두 사도의 검 아래 무릎 꿇으리라.’
그런데, 최근 들어 교의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다.
“사도시여. 청룡신협에 대해 보고드릴 내용이 더 있습니다.”
“말하라.”
“그자가 검존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합니다.”
그 순간, 일사도의 흑립 아래 드러난 흉터들이 일제히 꿈틀댔다.
“방금 검존이라 했느냐?”
“예…….”
구장로는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보고받은 내용을 전했다.
청룡신협이 무림맹에서 자신이 검존의 무공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모용세가에는 무공을 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이야기.
구장로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일사도가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좌시하면 더 큰 후환이 되겠군.”
교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남궁세가 멸문 계획을 망치고, 팔장로 혈령자를 죽였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심어 둔 무림맹의 세작을 색출하고, 육장로 독마마저 죽였다.
‘본교의 장로 둘이 같은 자에게 당했다. 게다가 검존의 무공까지 익히고 있다니…….’
이 정도면 혈교와 지독한 악연으로 엮인 운명이 아닌가.
일사도가 구장로에게 물었다.
“청룡신협은 아직 무림맹에 있나?”
“며칠 전 무림맹을 떠났습니다. 현재 위치는 파악 중입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입니다.”
“이번 일은 살막에게 맡겨라.”
살막(殺膜).
명실상부 무림 최강이라 손꼽는 살수 집단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구장로는 놀라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천살(天殺)에게 직접 움직이라 전해도 되겠습니까?”
“허가한다.”
일사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청룡신협을 잡으러 가고 싶었지만, 그는 이곳에서 해야만 할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천살을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십존에 이름을 올린 고수다. 되도록 생포하되, 여의치 않다면 죽이라고 전하라.”
“알겠습니다.”
“놈이 어디로 향했을지 모르니, 다른 사도들에게도 전하라. 청룡신협과 접촉할 경우 최대한 생포해 검존의 무공을 회수하되, 불가할 경우에는 망설이지 말고 척살하라. 놓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이다.”
“존명.”
자리에서 일어난 구장로가 공손히 읍을 했다.
스르륵.
구장로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일사도는 그 모습을 일별한 후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청룡신협이라…….”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출신도 아니고, 이름난 고수의 제자도 아니다.
학관에서 무공을 가르치는 무공 강사 출신이라고 들었다.
“무공을 가르치는 실력이 무척 뛰어나다지.”
그 순간, 문득 오래된 과거가 떠올랐다.
-오늘부터 너희를 담당할 교관이다. 교관님이라 부르도록.
사나운 인상에 거친 언행을 일삼던 옛 스승.
-강해져라. 그것이 너희들의 존재 이유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매질을 당했다. 절세의 무공을 익히는 대가로 육체와 영혼을 개조당했다.
-너희 말고도 대체할 인력은 넘친다. 폐기한 후에 버려지기 싫다면, 죽도록 발버둥 치도록.
그 영향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랬던 주제에.
마지막에는 꽤나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켜라. 너희만큼은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다.
“…….”
얼굴에 난 오래된 흉터가 욱신거렸다. 이 중 일부는 옛 스승이 만든 것. 이유 없이 가끔 통증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저벅, 저벅.
지하로 내려갈수록 벽에 박힌 야명주가 빛을 잃었다. 마치 어둠에 의해 서서히 생명을 잃어 가는 듯했다.
목적지 앞에 도착한 일사도가 거대한 철문과 마주했다. 피 흘리는 마귀가 하늘을 올려보는 형상이 문에 새겨져 있었다.
끼이익…… 쿵!
일사도는 두 팔로 문을 밀어젖혔다.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좌우로 열렸다.
크르르…….
저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 비슷한 것이 들렸다.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사도는 익숙한 듯 걸음을 옮겼다.
꽤 시간이 흘러,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크크……. 크크크…….”
새카만 어둠 속에서 붉게 충혈된 두 개의 눈동자가 빛났다.
일사도는 어둠 속에 웅크린 짐승에게 말을 걸었다.
“오장로. 자숙은 충분히 하였느냐?”
팔다리에 쇠사슬이 휘감긴 흑야마제가 벽에 결박되어 있었다. 그가 몸을 꿈틀대자 쇠사슬이 부딪쳐 쩔그렁거렸다.
“크크크. 드디어 날 죽이려고 왔어?”
제대로 먹지 못한 몸은 뼈다귀만 남아 앙상했고, 두 볼은 홀쭉하게 파였다. 단전에는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커다란 금침이 꽂혀 있었다.
흑야마제는 쇠사슬을 쩔그렁거리며 일사도에게 다가왔다. 갈라진 목소리가 뇌옥 안에 울려 퍼졌다.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비밀 하나 알려 줄까?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매일 흑야마경의 구결을 음미하고 있어. 생전 처음 해보는 폐관 수련이지 뭐야. 크크크……. 크하하하!”
흑야마제는 뇌옥의 가장 깊은 곳에 갇히고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불면 꺼질 듯 쇠약해진 상태인데도 허리만큼은 꼿꼿했다. 공포와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다. 타고난 광기로 고독을 버텨 냈다.
일사도가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끝까지 반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크크. 지랄하지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날 죽이라니까? 내가 언제까지 목줄에 묶여 있을 것 같아?”
츠츠츠츳…….
내공이 봉인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어둠이 흑야마제와 공명했다. 단전에 꽂힌 금침이 부르르 떨렸다. 쇠사슬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댔다.
허세가 아니었다. 이대로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흑야마제는 자력으로 뇌옥을 탈출할 것이다. 그리고 전보다 더 끔찍한 괴물이 되리라.
어둠에서 태어났고, 태어날 때부터 광인이었던 자.
흑야마제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괴물이었다.
“오장로. 네가 더 이상 흑야마경을 익힐 일은 없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일사도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검지와 중지를 모아 만든 검결지(劍訣指)가 어둠을 베었다.
“크하하! 잘 생각했어. 자, 어서 날 죽이라고!”
흑야마제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결지의 궤적을 똑바로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서걱.
그러나 잘려나간 것은 흑야마제의 머리가 아닌, 그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었다.
“……이건 무슨 장난이지?”
쇠사슬에서 풀려난 흑야마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일사도는 그런 흑야마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이제부터 역천신공을 익혀라.”
“이제 와서? 왜?”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는 것보다 그편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거절한다면 이 자리에서 죽여 주지.”
흑야마제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격노와 환희가 뒤섞인 듯한 표정으로 그가 대답했다.
“……거절할 리가 없잖아?”
남궁세가에서 역천신공을 익힌 자와 싸운 이후로, 흑야마제의 머릿속에서는 그날의 일이 떠나지 않았다.
천하의 모든 마공을 짓누르는 위압감을 가진 신공. 그 압도적인 강함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익히기 위해 반란까지 일으키지 않았던가.
할짝.
혀로 입술을 핥은 흑야마제가 금침을 뽑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일사도를 노려봤다.
“내놔.”
일사도는 품에서 비급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역천신공(逆天神功)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힌 것을 확인한 흑야마제가 달려들어 비급을 펼쳤다.
뇌옥의 어둠은 그의 시야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다.
“크크크…….”
흑야마제는 천하의 진미를 탐하듯 게걸스럽게 역천신공의 비급을 읽어 나갔다.
“……내일 다시 오도록 하지.”
일사도가 몸을 돌리려 하자, 흑야마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불렀다.
“이왕 가르쳐 주는 거, 당신이 익힌 무극검도 가르쳐 주지 그래?”
흑야마제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눈앞에 천하에서 가장 패도적인 무공을 두고도 무극검까지 원했다.
“……불가하다.”
“왜?”
어린 시절에 당한 세뇌와 금제, 암시로 인해 사도들은 자신들의 무공을 타인에게 가르칠 수 없었다.
일사도는 그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몇 번 시도해 봤지만, 모두 내 가르침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리더군.”
“호오. 그러니까 더 흥미가 생기는데?”
“주제 넘는 욕심이다. 역천신공으로도 차고 넘칠 터.”
일사도가 단호하게 선을 긋자, 흑야마제가 히죽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역천신공을 익히면 가장 먼저 당신부터 죽여 버릴 건데. 그래도 상관없나?”
도발하듯 바라보는 흑야마제의 시선에, 일사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기대하지. 네가 역천신공으로 그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면, 나는 기쁘게 목을 내어 줄 것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흑야마제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어둠이 그를 따라 출렁거렸다.
“잊고 있었네. 당신도 나 못지않게 미친놈이라는 걸 말이야.”
“강해져라. 그것이 너의 존재 이유다.”
대화는 끝났다.
흑야마제는 다시 비급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를 일별한 일사도는 몸을 돌려 지상으로 올라왔다.
쿠웅!
문을 닫고 나온 후, 일사도는 교주전으로 향했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강해져라. 그것이 너의 존재 이유다.”
-강해져라. 그것이 너의 존재 이유다.
의식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옛 스승에게 들었던 말을 흑야마제에게 똑같이 해 준 것은.
그저 오래된 흉터처럼 가슴 깊이 남아 있던 말일 뿐.
“…….”
교주전은 텅 비어 있었다. 혈마가 부재한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일사도는 종종 이곳에 들르곤 했다.
그는 비어 있는 옥좌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순간, 옛 스승이 남긴 상처가 또다시 욱신거렸다. 오늘따라 유독 통증이 잦았다.
* * *
그 시각, 백수룡은 섬서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