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37
336화. 그대로 가만히
다음 날 아침.
백수룡은 오랜만에 청의무복을 꺼내 입었다.
옷뿐만이 아니라 머리도 정성껏 빗고, 새 가죽신을 신고, 허리춤에는 은은한 향이 도는 향낭을 찼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한껏 꾸민 사내가 풍월화공의 장원으로 향하자,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저 사내, 아무래도 풍월화공을 만나러 가는 것 같지?”
“호오. 오랜만에 용기 있는 사내가 나타났군.”
“사내치고 제법 잘 꾸미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퇴짜를 맞을 것 같은데…….”
“혹시 모르지. 총관인 검노가 사람 보는 눈이 좀 특이하지 않소?”
“아무리 그래도 얼굴이 좀 평범하지 않나. 나는 검노가 다섯을 세기 전에 바로 퇴짜를 놓는다는 데 닷 냥을 걸지.”
“다섯이나 셀 필요가 있겠나? 나는 셋을 세기 전에 퇴짜를 맞는다에 걸겠네!”
백수룡이 풍월화공의 장원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몰려나와 수군댔다.
자기들끼리 퇴짜를 맞네, 안 맞네로 내기까지 하고 있었다.
‘서안에서 제일 재미난 구경거리라더니.’
백수룡은 지난밤 분타주가 만두를 쩝쩝대며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얼굴값 좀 한다는 사내들, 여인들이 풍월화공을 만나 보겠다며 찾아오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서안에서는 그게 불구경, 싸움 구경 다음으로 재미난 구경거리이지요.
정확히는 그들이 정문에서 퇴짜를 맞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난 구경거리라고 했다.
외모에 자신이 있다고 나선 이들이 장원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듯 서둘러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일품이라나?
-저희 개방에도 나름 잘생긴 꽃거지가 여럿 있어서 들여보내려고 해 봤는데, 전부 정문을 넘지 못하고 퇴짜를 맞았습니다. 형제도 혹시 모르니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내가 거지들이랑 같아?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형제랍시고 이것저것 조언해 주는 분타주에게 차마 못 할 말이었다.
“……형제는 무슨.”
잠시나마 거지들을 형제로 생각했단 사실에 백수룡은 몸서리를 쳤다.
혹시 거지들이 자신을 서서히 세뇌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앞으로는 웬만하면 거지들하곤 엮이지 말아야겠어.’
백수룡은 지킬 수 없는 다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그는 이 시험(?)을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옥면공자한테 얼굴 하나는 잘 물려받았거든.’
자신감으로 가득 찬 백수룡은 어느새 커다란 장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계십니까!”
잠시 기다렸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백수룡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안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쪽에서 조급한 모습을 보여 봤자 좋을 게 없지.’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반 각쯤 기다렸을까.
장원의 대문이 열리고, 체구가 큰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뉘시오.”
그 순간, 백수룡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고수다. 그것도 굉장한.’
웬만한 사람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인상이 살벌한 노인이었다. 기도를 억누르고 있음에도 그랬다.
‘풍월화공은 아닌 것 같은데.’
그때, 노인이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고 물었소만.”
“평소 풍월화공 선배님을 깊이 흠모해 온 후배입니다. 먼 길을 찾아왔는데, 차 한잔 얻어 마실 수 있겠습니까?”
백수룡이 포권을 취하며 당당하게 말하자, 노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오늘은 약속이 없을 터인데.”
“날이 좋으니 지금 약속을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백수룡이 웃으며 농을 건넸으나, 노인은 웃지 않았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웃을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저 말없이, 백수룡을 지그시 응시할 뿐이었다.
“…….”
“…….”
백수룡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피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멀리서 구경하는 구경꾼들이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허어. 저 사내는 목숨이 두 개라도 되나 보군. 방금 검노(劍老)에게 농을 거는 것 보았나?”
“무섭지도 않은가…….”
“저러다 송장 하나 치우는 것 아닙니까?”
멀리서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 노인을 검노(劍老)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진짜 별호일 리는 없고, 은거한 전대의 고수 중 한 명인가.’
검노의 존재만으로도 풍월화공은 도둑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무시무시한 고수였다.
“인피면구를 벗으시오. 이곳은 가짜 얼굴을 한 손님은 들이지 않소.”
검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말할 때 정확히 입만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이 구경꾼들에게 불러온 반향은 엄청났다.
“인피면구?”
“사기꾼이구나!”
“빌어먹을! 이러면 내기는 무효요!”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분노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풍월화공을 만나기 위해 인피면구를 쓰거나, 역골공으로 얼굴을 바꿔서 오는 무림인들.
하지만 그중 누구도 검노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하하.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사기행각이 들켰음에도 저 사내는 여전히 태연하게 웃는 것이 아닌가?
구경꾼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백수룡의 뒷모습뿐이었다.
“오는 길에 소란이 일어날까 걱정되어, 진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수룡은 천천히 인피면구를 떼어냈다.
어제 쓰던 것과는 다른 사내의 얼굴.
나름대로 잘생긴 편이지만, 본판에는 여전히 한참 못 미치는 거죽이었다.
찌이익-
인피면구를 뜯어내자 백수룡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
검노는 꽤 오랫동안 그 얼굴을 바라봤다.
겉으로 드러날 만큼의 반응은 없었으나, 백수룡은 검노의 눈에 이채가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백수룡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역골공이 의심스러우시면, 직접 만져 보셔도 됩니다.”
검노는 고개를 저었다.
“되었소. 이 집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가짜와 진짜 정도는 금방 구분할 줄 알게 되더군. 이 정도면 가짜라도 상관없을 것 같고.”
잠시 말을 멈춘 검노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난리가 나겠군.”
“예?”
“아무것도 아니오. 들어오시오.”
검노가 돌아서고, 백수룡이 그 뒤를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쿠-웅!
문이 닫힌 후에야, 숨죽인 채 대화를 듣고 있던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 사내가 대체 누구야?”
“방금 들었소? 소란이 일어날까 봐 인피면구를 쓰고 왔다는데?”
“검노가 찾아온 손님을 받아 주다니. 이게 몇 년 만인가!”
“대체 저 사내가 누구이길래! 아는 사람 없소?!”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방금 들어간 사내의 진짜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증만 점점 커져 갈 뿐이었다.
* * *
“검노라 하오. 이곳의 총관을 맡고 있지.”
검노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백수룡도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백수룡이라 합니다. 무림에서는 청룡신협이라는 과분한 별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렇군.”
백수룡이 별호를 말했음에도 검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따라오라며 몸을 돌렸다.
‘무림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인가.’
상대의 무심한 태도가 백수룡은 오히려 편했다.
최근 지나치게 올라간 명성 탓에 불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걸었다. 백수룡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완전히 별세계로군.’
눈에 보이는 풍경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신선들이 사는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럴까.
작은 새들이 나무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만발한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보였고, 그 주변을 사슴들이 노닐었다.
계절이 수시로 바뀌었다. 여름이었다가 겨울이 되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붉고 노란 나뭇잎이 피어났다.
‘풍월화공이 술법의 대가라더니.’
백수룡은 장원 곳곳에서 인위적인 기의 흐름을 느꼈다.
극도로 예민한 기감은 이 무릉도원의 일부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장원 전체에 술법을 부려 놨구나.’
만약 무작정 이곳에 침입하려고 했으면, 아무리 백수룡이라도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백수룡이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동안, 그들은 마당을 가로질러 별채에 도착했다. 검노를 따라오지 않았다면 한참을 헤맸을 길이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고 계시오. 장주를 불러올 터이니.”
“알겠습니다.”
“너무 멀리 나가지만 않으면 괜찮으니, 편하게 구경하시오.”
검노가 별채에서 나간 후, 백수룡은 별채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화공은 화공이군.”
벽마다 그림이 걸려 있었다.
바깥에 나가면 천금으로도 구하기 어렵다는 풍월화공의 미인도들.
아름다운 남녀의 모습이 여러 배경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표정이며 몸짓이 각양각색인데,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는 점은 같았다.
“……음?”
그렇게 그림들을 둘러보던 중, 백수룡의 시선이 한 곳에 정지하듯 멈췄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이런 곳에서 만날 리 없는 얼굴이었으니까.
하지만 보면 볼수록, 자신이 아는 얼굴이 확실했다.
백수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
지금보다 훨씬 젊은 모습.
심지어 백수룡보다도 더 어린 시절의 백무흔이었다.
잘생긴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호기심 가득한 눈과 자신만만한 미소는 숱한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 괜히 옥면공자가 아니었네.”
백수룡은 젊은 아버지를 보며 킥킥 웃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바로 옆에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
작고 아담한, 한눈에 봐도 몸이 약해 보이는 가녀린 여인.
하지만 반짝이는 눈동자는 누구보다 당돌했고, 입가에 맺힌 미소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 만큼 행복에 겨워 보였다.
“하하…….”
매약빙.
백수룡은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머니.
이런 곳에서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게 되다니.
여전히 혈교의 교관이었던 전생의 기억을 더 강렬하게 가지고 있는 백수룡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생의 기억들도 돌아오고 있었다.
-네 어머니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 애비의 마음을 평생 차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냐?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해 물으면 아버지가 웃으며 말해 주던 이야기.
그때만큼은 소년처럼 눈을 빛내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정할게요. 눈을 못 뗄 정도로 미인이시네요.”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바라보는 백수룡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맺혔다.
어떤 연유로 이곳에 걸려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백수룡은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그림을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대로 가만히, 움직이지 마시게.”
“음?”
백수룡은 낯선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방금 전 목소리의 주인이 벌컥 화를 냈다.
“움직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목소리는 노인의 것이었으나,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어 청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묶어 올린 백발은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자줏빛 비단옷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백수룡은 어렵지 않게 상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풍월화공이십니까?”
“지금 내가 누군지가 중요한가!”
그게 아니면 뭐가 중요한데?
황당한 마음이 들었으나, 백수룡은 무림의 기인이사라는 자들은 워낙에 특이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움직이지 말라니까! 제발 부탁일세!”
백수룡은 포권을 취하려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아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술법?’
떨쳐내려면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었지만, 백수룡은 그러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풍월화공을 바라봤다.
“내 바로 화구(? 具)를 가져올 터이니 그대로 있게. 알겠지? 절대 움직이면 안 돼!”
그렇게 말한 풍월화공은 몸을 돌려 날듯이 별채에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검노가 한숨을 쉬며 대신 사과했다.
“미안하오. 보다시피 저런 놈이라. 나이를 먹어서도 도통 철이 들지를 않는군.”
“저분이 풍월화공이 맞습니까?”
“부끄럽지만 그렇소.”
“그럼 저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소.”
“…….”
하는 수 없이, 백수룡은 풍월화공이 돌아올 때까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