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50
349화. 북해빙궁 (3)
백수룡은 설수련의 뒤를 따라 걸으며 자연스럽게 주변을 구경했다.
[다들 힐끔힐끔 너를 쳐다보는구나.]‘신기하기도 하겠지. 지금쯤 소문이 다 퍼졌을 테니까.’
그 옆에는 엉망진창이 된 설무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함께 걷고 있었는데,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설무걸과 설룡휘를 번갈아 보면서 수군대고 있었다.
“죽고 싶어? 뭘 봐!”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든 설무걸이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황급히 눈을 돌리는 사람들.
앞서가던 설수련이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으로 설무걸을 바라봤다.
“뭘 잘했다고 성을 내는 게냐.”
“고모할머님…….”
“그 입 다물거라. 내 손으로 찢어 놓기 전에.”
“……죄송합니다.”
입술을 깨문 설무걸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큰 망신을 당했다.
아무리 설수련이 소궁주인 자신을 아낀다고 해도, 더 이상 밉보였다간 정말 입이 찢어질지도 모른다.
“…….”
그 와중에도 백수룡은 무심한 표정으로 천천히 주변을 구경했다. 마치 두 사람의 대화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인 것처럼. 낯선 땅임에도 걸음걸이가 여유롭고 기품이 흘렀다.
‘혈교의 자금이 설가로 흘러들어 왔다더니. 제대로 호의호식했구나.’
북해에서 가장 높은 위세를 대변하듯, 설가의 혈족들이 모여 사는 지역은 부유했다. 건물을 지어 올린 자재부터 다른 곳과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였다.
건물 대부분이 최근에 지어진 것이었고, 높이도 전체적으로 높았다. 곳곳에 중원의 양식이 섞여 있었다.
[불온한 기운이 느껴진다.]‘마공의 흔적이 있어.’
겉으로 드러난 설룡휘의 표정은 무심했지만, 그 머릿속은 주변의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느라 바빴다.
‘혈교와 거래를 한 정도가 아니라……. 이곳이 혈교 지부라 해도 믿겠군.’
거리를 오가는 자들 중에서도 혈교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의 걸음걸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티 나지 않게 빙궁의 무공에 적당히 섞은 듯하지만, 백수룡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설가의 중심부로 들어왔다.
북해빙궁 안의 또 다른 궁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
설가의 직계들이 머무는 거처였다.
“무걸. 너는 네 방에 가서 열흘간 근신하거라. 한 번만 더 무단외출을 하면, 그땐 정말 각오해야 할 것이야.”
“……예.”
설수련의 매서운 눈빛에, 설무걸은 군말하지 않고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힐긋 설룡휘를 노려보았다.
설룡휘는 무심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여전히 손윗사람에게 버릇이 없군. 무공도 모자란 녀석이 예의범절까지 모자라니, 너는 앞으로도 가르침이 필요하겠다.”
“너 이 새끼……!”
“어허! 둘 다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설수련의 엄한 눈초리에 둘 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설무걸이었다.
이를 부득부득 간 설무걸은 몸을 홱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쉽군. 눈이 완전히 돌아간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설무걸도 마공을 익혔을지도 모른다. 그걸 확인할 수만 있다면, 아주 큰 패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백수룡은 아쉬움에 속으로 입맛을 다셨지만, 기회는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룡휘라는 이름을 쓰는 동안, 설가와 혈교의 관계를 낱낱이 파헤칠 테니까.
“너는 내 방으로 가자꾸나.”
“예.”
잠시 후, 백수룡은 차분한 시선으로 마주 앉은 설수련을 응시했다.
그들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은사부를 혈교에 팔아넘긴 자.’
여든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설수련의 얼굴에선 주름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고강한 무공으로 세월을 멈춰 세운 듯했다.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북해의 추위가 익숙하진 않을 터. 차가워진 몸을 따뜻하게 해 줄 것이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으나, 백수룡은 설수련이 내준 차를 마시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경거망동해선 안 돼.’
이 자리에서 설수련을 기습한다 해도 일격에 목을 날릴 수 있는 가능성은 낮다. 여유로운 표정과 달리, 설수련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습에 실패한 즉시 설가의 무인들이 몰려올 것이고, 이후엔 일이 아무리 좋게 풀려도 북해빙궁이 내전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네 아버지에 대해 말해 보겠느냐?”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마시면서, 설수련은 설신우에 대해 물었다.
‘검증이로군.’
설룡휘가 정말 설가의 핏줄이 맞는지 확인해 볼 심산일 터였다.
반쯤 비운 찻잔을 내려놓은 백수룡이 입을 열었다.
“불과 석 달 전까지, 저는 제 혈통이 북해에서 가장 고귀한 가문에 닿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백수룡은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짜 둔 사연을 말했다.
최대한 덤덤하게, 북해의 사내다운 냉막한 표정으로, 가문에서 도망친 설신우의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본인에게 직접 확인한 것이니 오류가 있을 리 없었다. 의혹에 차 있던 설수련의 눈빛이 점점 아련해졌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어떤 유언이었느냐?”
“북해빙궁으로 돌아가 대신 용서를 구하고, 너는 앞으로 설가의 사람으로 살아가거라.”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긴 손가락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설수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이 그 아이를 많이 닮았구나. 북해의 사내치고도 서늘한 눈매에, 이지적인 외모, 말투 또한 그 아이와 닮은 듯해.”
‘그야 충분히 연구했으니까.’
설신우의 외모뿐만 아니라 말투, 행동, 사소한 몸의 움직임까지.
설령 그에게 진짜 아들이 있다고 해도, 지금의 설룡휘보다 닮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닮았단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도다…….]탄식하는 창룡신검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백수룡은 설신우를 닮은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수련의 표정이 전보다 확연히 부드러워진 것이 보였다.
“고모할머님이라 부르거라.”
“예. 고모할머님.”
-고모님은 혈육을 끔찍이 아끼십니다.
설신우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북해빙궁의 주인이 되기 위해 기꺼이 혈교와 손을 잡은 여인.
이 야망 가득한 여인의 목적은, 설가를 북해빙궁의 영원한 왕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실로 기쁜 날이구나. 너를 환영하는 연회를 열어야겠다. 오늘 가문의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하자꾸나.”
“예.”
수십 년 전 가문을 등진 조카의 아들이 가문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이토록 헌앙하고 무공마저 고강한 청년이라니, 가문의 최고 어른으로서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적할 것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했다.
“무걸이는 너와 피를 나눈 혈육이다. 설령 그 아이가 먼저 무례하게 굴었다 해도, 조금 전 너의 손속은 지나쳤다. 다시 만나면 사과하거라.”
그러나 설룡휘는 고개를 저었다.
“손윗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녀석이 먼저 사과하지 않는다면, 제 태도 또한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단호한 대답에, 설수련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맺혔다.
“그 아이가 본궁의 소궁주인데도 말이냐? 훗날 그 아이가 궁주가 되면, 너의 입장도 난처해질 텐데?”
그러나 이 질문이야말로 백수룡이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반쯤은 유도한 것이기도 했다.
-고모님은 야망이 큰 사람을 좋아합니다. 성정이 심약했던 제게 가장 아쉬워하셨던 부분이지요.
설신우가 알려 준 설수련의 성격.
그렇다면 그녀의 마음에 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야망을 보여 주는 것.
“아버지에게 듣기로, 북해에서는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가 소궁주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설무걸보다 무공도 뛰어나고, 단언컨대 다른 모든 부분에서 뛰어납니다.”
“허…….”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데, 도무지 잘난 척으로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도 무공으로 설무걸을 압도했고, 기질적으로도 더 북해의 귀족다웠다.
가문의 위세를 믿고 오만방자하게 구는 설무걸과는 자연히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고모할머님은 제가 소궁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룡휘의 당돌한 질문에, 설수련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정말로 당돌하구나. 너는 오늘 북해에 도착했다. 그런데 감히 소궁주의 자리를 탐하는 것이냐?”
“…….”
“허! 눈빛을 보니 농이 아닌 듯하군.”
이미 결정된 소궁주 자리를 탐하다니.
빙궁의 오랜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는 일이다.
자칫하면 반란으로도 비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네가 설가의 핏줄이 아니었다면 경을 쳤을 것이다.”
“정말로 불가능합니까?”
“이미 늦었다. 소궁주는 이미 정해졌으니…….”
설수련은 말끝을 흐렸다.
포기하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이미 선례가 있기도 했다.
‘나 또한 그랬지.’
북해빙궁의 오랜 전통은 자신의 대에서 이미 한번 깨어진 적이 있었다.
빙월신녀 은예린의 실종.
이후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후계자 다툼 끝에, 설수련은 직접 옥좌에 올랐다.
비록 피치 못할 상황이었다곤 하지만, 한 번 무너진 전통은 언제든 또 무너질 수 있는 법이었다.
‘허어. 왜 이제야 이런 잠룡이 나타났단 말인가.’
설수련은 북해빙궁을 영원히 설가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더 단단한 반석 위에 왕좌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설룡휘를 바라봤다.
“……너와는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 듯하구나. 이 이야기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나눠 보자꾸나.”
“예. 고모할머님.”
설수련이 흐뭇하게 웃었다.
“네 성정이 아주 마음에 든다. 신우 그 아이는 유한 성격이었거늘.”
“성격은 어머니를 닮은 모양입니다.”
“그래? 네 어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려무나.”
두 사람은 밤이 깊어지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에 대해 파악하는 시간.
그렇게 대화가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였다.
설수련이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사람 속은 알 길이 없으니, 한동안은 너에게 간단한 금제를 가하고자 한다. 그러니 이해하려무나.”
처음 만난 종손에게 친근하게 대해 준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너무 쉽게 믿어 주더라니.’
목줄을 거절하면 의심이 커질 터, 백수룡은 은근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어떤 금제입니까?”
“이미 가했느니라.”
“……예?”
설수련은 턱짓으로 탁자 위의 찻잔을 가리켰다.
“네가 마신 차. 그 안에 독이 들어 있었다.”
“독, 이라니…….”
설룡휘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종손의 당황한 표정을 본 설수련이 깔깔 웃었다.
“왜? 상상도 못 했느냐?”
“…….”
설룡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치미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역력했다. 설수련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당황스러울 테지. 두렵기도 할 테고. 보통 독이 아니란다. 무음, 무미, 무취인 데다 해독하기도 거의 불가능한 극독이지.”
“……무슨 독입니까?”
설수련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혈교에서 가장 지독한, 독마가 직접 만든 독이란다.”
콰직!
독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설룡휘는 입술이 피가 나도록 질끈 깨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정을 드러내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 모습에 놀란 설수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놀랐나 보구나. 너무 걱정할 것 없다. 해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독이다.”
“독마의 독……. 큽……!”
설수련이 품에서 해약 한 알을 꺼내 백수룡에게 건넸다.
“내 농이 지나쳤구나. 독이 발작하기 전에 먹거라.”
“……감사합니다.”
겨우 감정을 수습한 백수룡이 해약을 받아 삼켰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던 것은 설수련이 생각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어쩐지 속이 좀 더부룩하더라니.’
자신에게 금제랍시고 독, 그것도 독마가 만든 독을 먹이다니.
북해에 온 이후로, 표정 관리가 제일 안 된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잖아.’
독마의 독은 백수룡의 몸 안에 흡수된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