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64
363화. 선물
늦은 시각까지 백룡장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백수룡을 다시 만난 제자들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각자 방학 동안 어떤 수련을 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굴 만났고, 어딜 다녀왔는지 끝없이 떠들었다.
“우리 가문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글쎄 팽사혁 그 자식이 왔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 어이 팽사혁. 까불지 말고 조용히 있다 꺼져라. 그러니까 그 자식이 나한테 쫄아서…….”
한창 무용담을 늘어놓는 헌원강에게 선후배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딱 봐도 거짓말이네.”
“하려면 좀 제대로 하든가.”
“선배 상상 속 이야기 잘 들었수.”
“아, 진짜라니까! 약간의 양념을 치긴 했지만…….”
백수룡은 조용히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백수룡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다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청룡신협의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무림맹에서 혈교 첩자를 잡았다면서요?”
“독에 당한 개방 방주님을 구했다는 게 사실이에요?”
“거지들이 은혜를 갚겠다고 선생님한테 매일 동냥해 온 밥을 가져다준다던데…….”
“그 정도면 거지 왕초 아니냐고.”
“개방에서는 은근히 청룡신개라고 부른다던데?”
벌써부터 스승을 놀릴 생각에 제자들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특히 헌원강은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처럼 눈을 빛냈다.
“흐흐. 선생님…….”
“또 까분다.”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백수룡이 아니었다.
따악!
헌원강의 정수리에 흑룡편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끄악! 왜 나만 때려!”
정수리를 부여잡은 헌원강이 억울하단 얼굴로 항변했다.
백수룡은 그 이유를 아직도 몰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원강이 네가 손맛이 제일 좋거든.”
“……백수룡 조지기 백오십팔 번이다! 방학 특훈의 성과를 보여 주자고!”
헌원강이 기세 좋게 외쳤지만 아무도 함께 덤벼 주지 않았다. 미래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잠시 후 넝마가 된 헌원강이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털썩.
“아깝다……. 이번에는 한 방 먹일 수 있었는데…….”
“선생님은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였는데 뭐가 아까워?”
한숨을 내쉰 여민이 쥘부채를 들어 헌원강의 흙먼지를 대충 털어 주었다.
“맞다. 민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수룡은 커다란 행낭 안에 따로 챙겨 둔 보따리를 꺼내 여민에게 건네며 씩 웃었다.
“이건 너희 이모가 보낸 선물이다.”
“……이모요?”
백수룡은 자연스럽게 북해빙궁에 다녀온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해 주었다. 모두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여민 선배 어머니가 북해빙궁 출신이었다고요?”
“축하한다. 가족을 찾다니!”
“허. 선배, 대단한 가문 출신이었군.”
다들 가족을 찾은 여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여민은 현실감이 없는 얼굴로 은휘령이 보낸 선물을 바라봤다.
“……서리애 선생님한테 듣긴 했어요. 저희 엄마가 북해빙궁 사람일 거라고…….”
보따리 안에는 빙공을 익힐 때 도움이 되는 영약과 은휘령이 직접 쓴 서신, 북해에서만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그런 얘기를 한 번도 한 적 없었거든요. 그래서 가족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는데…….”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백수룡이 북해빙궁에서 보았던 많은 무인들과 같은 색.
그들이 여민을 보는 순간, 누구도 여민의 혈통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궁주에게는 이 학기가 끝나면 보내겠다고 말했는데, 만약 네가 그 전에 북해에 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백수룡은 여민이 당장 북해빙궁에 가겠다고 해도 막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천무제가 중요해도, 가족보다 우선일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여민은 일말의 고민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서리애를 통해서 엄마가 북해빙궁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여민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천무제가 끝난 다음에 갈래요. 당당하게 우승한 후에, 이모한테 가서 잔뜩 자랑할 거예요.”
여민의 대답에 백수룡뿐만 아니라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만 헌원강은 혼자서 복잡한 표정이었다.
“북해빙궁이라니…….”
저 먼 북해빙궁이 고향이라니.
여민이 고향을 찾게 된 건 좋은데, 헌원세가에서 너무 먼 곳이 아닌가.
“너 졸업하면 북해빙궁에 가서 살 거야?”
“그야 모르지. 아직 가 본 적도 없는데.”
“끄응…….”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헌원강을 뒤로하고, 백수룡이 여민에게 물었다.
“서리애 선생님은?”
“매일 아침에 오세요. 아마 내일도 오실 거예요.”
“그럼 좋은 소식은 내일 아침에 전해 드려야겠네.”
백수룡은 잊지 않고 북해빙궁에서 서리애의 사면도 받아 왔다. 이제 서리애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북해빙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한 시진이 훌쩍 넘게 지났다. 백수룡은 제자들에게 이만 들어가서 자라고 말했다.
다들 더 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백수룡이 흑룡편으로 손바닥을 몇 번 두드리며 씩 웃자 불만이 쏙 들어갔다.
“내일부터 다시 새벽 훈련 시작인데, 감당할 수 있겠어?”
“드, 들어가요 지금!”
“훈훈한 건 이제 끝이구나…….”
모두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백수룡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대충 정리했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창룡신검이 말했다.
[좋은 아이들이구나.]‘착한 녀석들이지.’
창룡신검에 관한 건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백룡장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무한에서부터 함께 온 남궁수와 제갈소영에게도.
창룡신검의 정체를 밝히면 현천신녀가 검에 깃든 이유도 설명해야 하는데, 백수룡은 역천의 운명에 대해서만은 아무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간단히 짐을 정리한 백수룡은 행낭에서 길쭉한 목함을 꺼냈다. 이곳까지 가져오면서 가장 조심히 다룬 물건이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내일 갖다 주어도 되지 않겠느냐?]“아직 안 주무실걸. 내기라도 할 수 있어.”
피식 웃은 백수룡은 백룡장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청룡학관에 있는 매극렴의 거처로 향했다.
예상대로 매극렴의 거처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백수룡은 문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할아버님. 저 수룡입니다.”
“들어오너라.”
백수룡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극렴이 침의(寢衣)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굳이 뭐 하러 왔느냐. 얼굴이야 내일 보아도 될 것을.”
제자들과 편히 이야기를 나누라며 백룡장에서는 자리를 비켜 준 매극렴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혹시 주무시는 데 깨운 겁니까?”
“……이미 깨 버린 것을 어쩌겠느냐. 이왕 왔으니 담소나 좀 나누자꾸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백수룡은 매극렴이 안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하지 못한 양반 같으니.’
자고 있었던 것치고는 침상 위의 이불이 펼치지도 않은 모양으로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방학 동안 어찌 지냈느냐? 내 간간이 들려오는 네 소문은 들었다만.”
조손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찻잔을 홀짝이며 이야기를 듣던 매극렴이 손자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구나.”
“예? 저는 잘 모르겠는데…….”
매극렴이 손을 뻗어 백수룡의 팔뚝을 이리저리 만져 보는데, 영 못마땅한지 미간이 찌푸려졌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은 게냐? 내가 지어 준 보약은?”
“그게…….”
“이놈! 내 그럴 줄 알았다. 제대로 안 챙겨 먹었구나. 젊다고 영원히 팔팔할 줄 아는 게지!”
한참 잔소리를 쏟아내던 매극렴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손자가 무리하는 것 같아서 항상 걱정이었다. 종종 병약했던 딸의 얼굴이 겹쳐 보여서 더욱 그러했다.
“네 부모들은 그렇게나 노는 걸 좋아했는데, 너는 누굴 닮았는지 소처럼 일만 하는구나.”
“……할아버님을 닮아서 그런 건 아닐까요?”
“허! 말은 잘하는구나.”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매극렴에게, 백수룡은 씩 웃으며 가져온 목함을 건넸다.
“사실은 할아버님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 괜한 것을…….”
매극렴은 투덜거리면서도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단정하게 말아서 끈으로 묶어 둔 족자가 들어 있었다.
“웬 족자더냐?”
“한번 펼쳐 보십시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족자를 펼친 순간, 매극렴은 숨을 멈췄다.
“…….”
그대로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하나의 화폭에 담긴 세 사람의 모습에 매극렴은 말문을 잃었다. 노인의 시선은 그 중 딸의 얼굴에 못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족자를 든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문득 호흡이 잘되지 않았다. 뛰어난 경지를 이룬 무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순간, 매극렴은 어린아이의 주먹도 막아 내지 못할 만큼 무방비했다.
“…….”
삼십 년 만에 본 딸의 얼굴이었다.
평생 꿈에서도 잊어 본 적 없는 얼굴이 화폭에 담겨 웃고 있었다.
매극렴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걸, 어떻게?”
“섬서에서 풍월화공이라는 분을 만났습니다.”
백수룡은 덤덤히 풍월화공을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그곳에서 젊은 시절의 부모님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본 것, 그리고 풍월화공이 해 준 이야기도 전했다.
“새벽에 그냥 쳐들어와서 그려 달라고 했다지 뭡니까?”
그러자 매극렴의 얼굴에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표정이 생겼다.
“……그 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려서도 어찌나 말썽꾸러기였는지, 또래 사내놈들 머리에 전부 땜빵을 만들고 다녔지.”
매극렴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본 백수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님.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꾸나.”
매극렴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는 문을 나선 손자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작아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녀석. 눈치만 빨라서는.”
그 순간, 충혈된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매극렴은 가만히 서서 소리 없이 울었다.
주름진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 늙어서 추태로군.”
소매로 눈가를 닦아 낸 매극렴은 족자를 들어 한쪽 벽에 걸었다.
그리고 하염없이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빙아.”
딸의 장례에 가지 못한 것은 노인의 가슴에 평생의 죄책감으로 남았다.
주변에서 딸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은 냉혈한이라고 수군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반박 한 번 하지 않았다.
심마가 두려워서 딸의 마지막도 지키지 못한 못난 아비가, 대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 생각이었는데.
“좋아 보이는구나.”
옆에 나란히 앉은 사위 녀석의 환한 웃음이 보였다. 이 순간만큼은 미워 보이지 않았다.
그 뒤에 서 있는 손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매극렴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자, 딸이 남기고 간 선물이었다.
매극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좋아 보인다. 행복해 보여.”
화폭 속의 약빙은 어여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매극렴은 손가락을 뻗어 조심스럽게 딸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저 종이일 뿐인데, 묘하게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에, 매극렴은 삼십 년 만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 애비를…… 용서해 주겠느냐?”
따뜻하게 웃고 있는 딸의 미소가, 이미 오래전에 그리하였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