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06
405화. 언제 이렇게
“으으…….”
악연호는 힘겹게 정신을 차렸다.
천살을 합공하다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진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밤새 악몽을 꾼 것처럼 몸이 무겁고,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불현듯 함께 있던 동기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두 괜찮으니 진정하게. 기력이 많이 쇠했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악연호의 어깨를 눌러서 진정시키는 손길이 있었다. 흠칫 놀란 악연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사연이 깊어 보이는 얼굴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옥……. 수룡 형님의 아버님?”
“강호에 나가서 별호를 새로 하나 만들든가 해야지. 손목 좀 이리 줘 보게.”
작게 한숨을 내쉰 백무흔은 익숙한 손길로 악연호의 손목을 잡아 진맥을 하더니, 품에서 은으로 된 작은 원통을 꺼냈다.
그 안에서 얇은 은침 몇 개를 꺼낸 백무흔은 악연호의 팔과 손바닥에 간단히 침을 놓았다.
“……의원이셨어요?”
“어깨너머로 익혔네. 예전에 의원을 만날 일이 많았거든.”
빙긋 웃은 백무흔은 악연호에게 마저 침을 놓았다. 그러자 몸 상태가 한결 편안해졌다.
“어떤가? 좀 낫지?”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의원을 여셔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수룡 형님이랑 다른 사람들은요?”
“뒤쪽을 한번 보게.”
백무흔이 턱짓으로 뒤를 가리키자, 악연호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명일오와 제갈소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둘 다 호흡이 일정한 것이, 안색이 파리한 것 말고는 괜찮아 보였다. 그들의 어깨와 팔에도 은침이 몇 개씩 꽂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보였다.
노군상은 부상자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악연호와 눈이 마주친 노군상이 안심한 듯 허허 웃었다. 평소보다는 힘이 없는 웃음이었다.
“악 선생. 일어났나?”
“관주님…….”
“걱정했네. 무슨 악몽을 꾸는지 계속 식은땀을 흘리더군.”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노군상 외에도 매극렴, 곽두용, 청천, 철두 등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크게 지쳐서 움직일 힘도 없어 보였지만, 다행히 위중한 환자는 없는 듯했다. 한쪽에는 곤히 잠든 청룡오망이 누워 있었고, 남궁수도 한쪽 벽에 등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다들 무사했구나…….”
악연호는 안심하면서도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백무흔을 바라봤다.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저도 그렇고, 다들 왜 여기 있습니까? 수룡 형님은…….”
“천살이 술법을 사용했네.”
백무흔은 악연호가 의식을 잃고 난 이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천살이 펼친 술법에 의해 사람들이 이지를 잃었으며, 백수룡이 그 술법을 멈추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청룡학관 안에서 백수룡이 천살과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악연호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서둘러 도우러 가야……!”
“그럴 필요 없네.”
백무흔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이곳에서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 해.”
그 눈빛은 평소의 백무흔답지 않게 엄격하기까지 했다. 아들이 신신당부한 말 때문이었다.
-잠시 후 탈혼마인들의 시선이 전부 저한테 몰리면, 아버지는 의식이 없는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세요.
천살의 술법을 빼앗기 전, 백수룡은 백무흔에게 전음을 보내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부탁은 분명 ‘이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청룡학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주세요. 아버지도요.
심상치 않게 굳은 아들의 표정에, 백무흔은 자세히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이기 싫은 무언가가 있는 게구나. 알겠다.
그 후, 백무흔은 천살의 술법이 멈추자마자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들을 학관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노군상과 백수룡의 동기들.
그리고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한 무인들을 옆구리에 한 명씩 끼고, 경공을 펼쳐 청룡학관 밖으로 옮기길 반복했다.
그리고 지금.
백무흔은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다른 분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들이 모여있는 곳은 청룡학관 정문 앞.
백무흔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며 정문을 막아섰다.
“싸움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아무도 저 안으로 들어가선 안 됩니다.”
콰콰콰콰콰……!
청룡학관 안에서는 붉은 기파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여파가 하늘까지 붉게 물들였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하고 두려운 기분이 드는 광경이었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청룡신협 혼자 남아서 싸우고 있다고?’
‘어찌 이런 살기가…….’
정신을 차린 무인들이 그 너머를 힐끔거렸으나, 백무흔은 그 이상의 호기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 대부분의 무인들은 더 이상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백 선생이 부탁한 일인가?”
붉어진 하늘을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노군상이 백무흔을 돌아보며 물었다.
“예. 관주님.”
“……내가 부득불 들어가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쩔 텐가?”
“죄송합니다.”
백무흔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힘으로라도 막아서겠다는 의미.
“…….”
“…….”
일순간 노군상과 백무흔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으나, 다행히 사람들이 걱정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부자가 똑같이 고집이 세군. 알겠네. 어차피 내가 지금 가 봤자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테지. 그런데…….”
노군상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궁금한 표정으로 백무흔을 바라봤다.
천살의 술법에 걸려 탈혼마인이 되었던 대부분의 무인들과 달리, 백무흔은 처음부터 술법에 걸리지 않았다. 혼자서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전부 청룡학관 밖으로 옮길 수도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자네는 어떻게 천살의 술법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나? 아, 오해하진 말게.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구살과의 싸움은 일검에 승부가 결정되었기에 피가 튀지 않았고, 힘겹게 싸워서 이긴 일살의 몸에는 천살의 술법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백무흔은 백수룡과 남궁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술법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술법이 모두 사라진 듯합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분들도 의식이 없을 뿐이니, 먼저 기력을 되찾으신 분들이 함께 의원으로 데려가 주시면…….”
그때였다.
콰콰콰콰콰……!
청룡학관 안을 휘돌던 붉은 기파의 폭풍이 갑자기 멈추더니, 일순간 거대하고 기이한 형상으로 변해 하늘로 치솟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찰나였으나,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붉은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승천하는 듯했다.
“저게 무슨……!”
“청룡학관의 하늘에 붉은 용이 나타나다니!”
“허어! 정녕 기사(奇事)로다!”
다들 놀란 표정으로 청룡학관의 하늘을 바라보는 가운데, 노군상만은 남들과 조금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저 기운은 역시 그자의……! 어째서 이곳에……!”
그의 눈은 두려움에 질려 있었고,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무흔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수룡아.’
마지막으로 남궁수를 업고 청룡학관에서 빠져나오기 전, 백무흔은 스치듯 보았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개세(蓋世)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던 적발적안의 사내.
비록 오랫동안 강호를 떠나 있었다지만, 백무흔은 그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전에 네 일기장을 읽고서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진정 혈마의 무공을 익혔더냐.’
무공은 무공일 뿐이다.
그로 인해 아들이 타고난 천형을 스스로 극복했다면, 백무흔은 오히려 칭찬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겠지.’
수백 년간 강호를 위협했던 혈교.
그 정점에 있는 혈마의 무공.
청룡신협이 역천신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간 쌓아 올린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걸로 끝나면 다행이겠지.’
지금껏 청룡신협을 찬양해 왔던 호사가들이 하루아침에 등을 돌려 그를 비난할 것이고, 정파를 기만한 혈교의 마인이라며 모함하고 깎아내릴 것이다.
어쩌면, 혈마의 무공을 익혔다는 이유만으로 무림공적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었다.
이토록 큰 비밀을 혼자 품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앞으로는 내가 함께 너의 비밀을 지켜 주마.’
세상 모두가 백수룡을 비난하고 죽이려 한다고 해도, 백무흔은 아들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림에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더 강해져야겠군.”
백무흔이 조용히 각오를 다지며 홀로 정문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수십 개가 넘는 횃불들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잠시 후 적지 않은 숫자의 무인들이 정문 앞에 도착했다.
서로를 알아본 무인들이 외쳤다.
“지부장님!”
“다들 괜찮은가!”
선두에서 무인들을 이끌고 온 사내는 무림맹 강서지부장 강소천이었다. 그의 뒤로 개방의 거지들, 관아와 갱생문의 무인들도 여럿 뒤섞여 있었다.
강소천은 부상당한 무림맹의 무인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천운이 따랐는지 죽은 사람은 없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천라지망을 이루던 무인들이 갑자기 청룡학관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듣고 남아 있는 무인들을 모아 왔네만…….”
잠시 후, 자초지종을 알게 된 강소천은 백무흔에게 우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무림맹의 모든 무인들을 대신해 대협께 감사를 전하겠소이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지금부터는 무림맹이 청룡신협을 도울 것이니, 문을 열어 주시오.”
“죄송하지만 그것은 불가합니다.”
“불가하다?”
백무흔은 그 이유를 설명했으나, 강소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우리가 들어가서 청룡신협을 도와야 하지 않겠소? 그 간악한 살수 놈이 또 무슨 사술을 부려 도망칠지 알 수 없거늘!”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들리실 줄 알지만, 제 대답은 같습니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뭔가 수상하군.”
강소천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오는 길에 저 안에서 치솟는 불길한 기운을 보았소이다. 저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소.”
“불가합니다.”
“이자가 정녕……!”
강서지부장이 무력이라도 불사할 생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설 때였다.
“기다려 주십시오!”
악연호가 백무흔 옆에 섰다. 아직 기력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해 창백한 얼굴로, 악연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산동악가의 악연호라 합니다. 강서무림맹의 지부장이신 강소천 대협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악연호뿐만이 아니었다.
“제갈세가의 제갈소영이라 합니다.”
제갈세가의 금지옥엽.
악연호 옆에 선 제갈소영이 창백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명일오도 조용히 그 옆에 섰다.
“이 일은 청룡학관 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아무리 무림맹이라 해도 오대학관을 마음대로 수사하실 수는 없습니다.”
정론이었다. 그러나 강소천도 반박할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저 안에 무림공적 중 하나인 천살이 있으니, 무림맹은 얼마든지 청룡학관을 수사할 수 있네.”
“그 논리대로라면 청룡신협 백수룡 대협은 무림맹 총사범입니다. 그분께서 이미 천살과 싸우고 있으신데, 더 이상의 지원이 필요할까요?”
“건방진!”
강소천이 일갈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갈소영의 반박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이곳은 내 관할이다. 맹주께서 직접 오시지 않는 한, 청룡신협이 총사범이라 해도 내게 명령을 내릴 권한은 없다!”
“청룡신협이 지부장님께 명령을 내렸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만! 아무리 봐도 문을 막아서는 이유가 수상하다. 당장 비켜서지 않으면 무림맹의 행사를 방해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문을 막아선 이들은 고작해야 몇 명이었다.
게다가 다들 지쳐 있으니, 힘으로 제압한다면 일 각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강소천과 함께 온 개방의 거지들이 일제히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개방의 강서분타주 왕손이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청룡신협은 거지들의 형제입니다. 허락도 없이 형제의 집에 쳐들어가는 짓은 거지도 안 합니다.”
“자네들까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갱생문은 정문을 막아라!”
철두의 명령에 갱생문도들이 돌아서며 눈을 부라렸고,
“관아는 무림인들의 일에 더 이상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무림맹이 불법으로 건물에 침입하겠다면 그것은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청천 또한 포졸들을 시켜 청룡학관의 정문을 막아서게 했다.
“이자들이 정녕……!”
어느새 문을 막아선 사람들이 수십 명으로 늘어나자, 강소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허! 언제 이렇게 친구를 많이 사귄 건지.”
백무흔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