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16
415화. 또 너로구나
전생의 기억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십칠호는 하루도 빠짐없이 뇌옥에 있는 사부들을 찾아가 무공을 배웠고, 함께 혈교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여전히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군.’
백수룡은 흘러가는 전생의 기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했지만, 이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혈마의 손가락 때문인가?’
지난번 이곳에 들어왔을 땐, 과거의 자신이 남긴 일기장에 남겨진 구결만을 사용해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혈마의 손가락’과 ‘독정’을 흡수하면서 동시에 역천신공을 운기했다.
독정은 체질을 고치는 데만 쓰일 뿐 역천신공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혈마의 손가락은 다르다.
죽은 혈마의 사념이 손가락에 남아 있다면, 이 공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가정일 뿐이지만, 그것 외에 다른 이유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혈마가 나타날 수도 있겠군.’
백수룡은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 바깥에 있는 현실과는 달랐다.
문율이 하룻밤 꿈에서 은사부와 백년해로했던 것처럼, 이것 또한 백수룡의 전생의 기억으로 만들어 낸 긴 꿈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사부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제법 반가운 일이었다.
“이 비실한 놈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다시 봐도 저 양반은 너무하지만.’
이십칠호가 약속한 대로 자신들의 몸 상태를 점점 호전시키자, 사부들의 태도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힘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게! 봐라, 이렇게, 이렇게, 그리고 이렇게 하면 된다니까!”
맹호악은 온몸에 쇠사슬을 매단 채 녹림십팔식의 시범을 보인 후 제자를 구박했다.
“이렇게 쉬운데 왜 한 번에 따라 하질 못해?”
“나 참…….”
이십칠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맹호악을 바라봤다.
그의 방식은 한 번 시험을 보이곤 “대충 이렇게 하면 된다. 참 쉽지?”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맹사부는 여길 나가서도 누굴 가르칠 생각은 하지 마시오. 가르치는 데는 재주가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네 녀석은 곧잘 배우지 않느냐?”
“그건 내가 잘해서 그런거고.”
“허! 재수 없는 놈 같으니.”
이십칠호는 네 사부들 중에서도 맹사부와 가장 빠르게 친해졌다.
이제는 가끔씩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말이다.
“헌데 여기서 탈출할 때 말이다. 우리야 무공을 회복하면 무서울 게 없다지만, 너는 내공도 없는 몸으로 우리를 따라올 수 있겠냐?”
“…….”
사부들과 함께한 지 반년.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역천신공을 익히지 않은 때였다.
망가진 단전에 한 톨의 내공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
아무리 절세신공을 배운다 한들, 내공을 쓸 수 없다면 그건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백수룡은 오랜 기억을 더듬으며, 앞으로 일어날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렸다.
‘곧 그 일이 벌어지겠군.’
제자의 처지를 알게 된 맹사부가 낮게 혀를 차며 말했다.
“내 뒤에 잘 붙어서 따라오면 죽지는 않을 거다. 가로막는 놈들은 전부 쓸어버리면서 갈 테니까.”
혈교에서 탈출하려 하면 필히 큰 싸움이 벌어질 테니, 자신의 뒤에서 따라오라는 말이었다.
맹사부는 나름대로 신경 써서 해 준 말이었지만, 그 당시 이십칠호에겐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내 한 몸은 스스로 지킬 수 있으니, 그런 것까지 맹사부가 신경 쓸 것 없소.”
“허어! 기껏 걱정해 줬더니 싸가지 좀 보게. 나중에 여기서 나가면 네 대갈통이 얼마나 단단한지 꼭 확인해 봐야겠다.”
껄껄 웃으며 협박 같은 말을 해 댔지만, 맹사부 나름의 친근한 농담이었다.
실제로 그는 말년에 얻은 제자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애송아. 넌 여기서 탈출하면 어디로 갈 셈이냐?”
“모르겠소. 어디로 가든 혈교보다야 낫겠지.”
“날 따라서 녹림으로 가는 건 어떠냐?”
“글쎄…….”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지만, 당시에는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어차피 천애고아인 데다가 혈교 바깥에는 아무런 연줄도 없으니, 맹사부의 제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맹사부를 따라가서 녹림도가 되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지도.’
백수룡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만약 혈교를 탈출해 맹사부를 따라갔다면, 훗날 적당한 산채에 자리를 잡고 길목을 지나는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걷으며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번만 더 보여 줄 테니 잘 봐라. 아까 틀린 부분부터 다시…….”
“내 차례다.”
맹사부의 말을 자르며, 광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맹사부가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며 뇌옥 안쪽으로 물러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아직 몸도 안 풀렸구만.”
내내 수다스러웠던 맹호악과 달리, 헌원후는 묵묵히 무공만 가르쳤다. 그는 필요한 때가 아니면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사실 맹사부가 특이한 경우였다.
반년이 넘게 지나도록, 이십칠호는 맹사부 이외에 다른 사부들과는 친해지지 못했다.
‘친해질 필요도 느끼지 못했지.’
서로 무공을 가르치고 배우기는 했으나, 아직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스승과 제자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필요에 의해 거래하는 관계일 뿐.
천성이 단순하고 유쾌한 맹사부마저 없었다면, 뇌옥의 분위기는 더욱 삭막했을 것이다.
“쯧쯧. 분위기 잡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입 꾹 다물고 사연 있어 보이는 얼굴로 앉아 있으면 누가 먼저 물어봐 준다더냐?”
그런 맹사부도 다른 사부들이 영 못마땅한지, 대놓고 빈정거렸다.
특히 셋 중 가장 만만해 보이는 광마에게 자주 시비를 걸곤 했다.
“저놈은 별호랑 안 어울리게 근엄한 척은 제일이다. 한때는 무슨 세가의 도련님이었다던데…….”
“닥쳐라. 죽고 싶지 않으면.”
헌원후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아봤지만, 맹사부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검존과 빙월신녀는 아예 대화에 끼지도 않았다.
은예린은 하루의 대부분을 슬픈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봤고, 검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두서없이 아들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이십칠호는 그들의 사연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되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할 뿐이었다.
“빙월신녀. 빙백신공을 가르쳐 주시오.”
“검존. 무극검을 가르쳐 주시오.”
두 사람은 거절하지 않았다.
이십칠호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뇌옥에서 함께 보내면서도, 사부들의 사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내일 또 오겠소.”
“내일은 고기반찬 좀 많이 가져와라!”
콰앙!
문을 닫고 돌아가는 길에도,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을 무렵.
마뇌가 그를 호출했다.
* * *
“그자들은 요즘 어떤가?”
열흘에 한 번씩, 이십칠호는 마뇌에게 보고서를 써서 올렸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부른 것은 일 년여 만에 처음이었다.
마뇌 앞에 부복한 이십칠호는 긴장감을 숨기며 대답했다.
“여전히 다루기 쉽지 않습니다만, 조금씩 설득하여 무공을 알아내고 있습니다.”
마뇌는 자리에서 이십칠호를 내려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올린 보고서는 매번 읽고 있다. 호언장담한 대로 수완이 제법이구나. 지금까지 모두가 실패한 일인데, 조금씩이지만 성과를 내고 있다니. 그래서 너에게 상을 내리려고 불렀다.”
“과분한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그저 본교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충성스러운 혈교의 무인이었다.
마뇌 역시 기꺼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의 충성심을 기억할 것이다. 허나 상은 별개의 문제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
이십칠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장로님. 그자들의 상태를 지금보다 호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쇠사슬의 금제를 약하게 해 주시고, 약간의 영약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마뇌가 미간이 좁혀졌다. 영 못마땅한 듯한 표정이었다.
“흐음……. 비록 이빨이 빠졌다 한들, 놈들은 여전히 사나운 맹수다. 섣불리 회복시켰다간 네가 물어뜯길 수도 있다.”
“그자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절세신공입니다. 온전한 초식을 펼쳐 보이게 하려면, 지금의 몸 상태로는 어렵습니다.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으니, 저를 믿고 맡겨 주십시오.”
이십칠호는 간청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마뇌는 한동안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구속을 조금 느슨하게 하라 지시하지. 영약은 약당에 일러둘 것이니, 네가 알아서 적당히 가져가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이십칠호는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주어진 포상이라면, 탈출 계획을 조금 더 앞당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마뇌는 아직 그를 이곳으로 부른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일러줄 것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곧 그자들의 무공을 익힐 어린것들이 선별될 것이다.”
“……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십칠호는 무례인 것도 잊고 고개를 들어 마뇌를 바라봤다.
다행히 마뇌는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하게 웃을 뿐.
“놀랐느냐?”
“……예상을 못 했던 일인지라.”
“교관으로서의 네 능력이 본교에서 최고라고 들었다. 현재 교에서 이름을 날리는 신진고수들 대다수가 네게 배웠다지. 그리고 그들 모두가 기회만 있으면 널 죽이고 싶어 한다던데?”
“…….”
클클 웃은 마뇌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십칠호를 향해 걸어왔다.
“네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마. 뇌옥에서 알아낸 무공을 어린것들에게 가르쳐라.”
“……제가 그자들에게 알아낸 무공은 아직 초반부뿐입니다.”
“실험이라고 생각해라. 그자들이 잘못된 구결을 알려 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너야 단전이 망가져 익힐 수 없다지만, 누군가는 익혀 봐야 확인할 수 있겠지.”
“…….”
이십칠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뇌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만약 그자들이 너를 속이고 가짜 무공을 알려 준 것이라면…….”
마뇌는 손을 뻗어 이십칠호의 어깨에 올렸다. 흑살조법을 극성으로 익힌 손가락이 섬뜩한 감각을 전달했다.
“차라리 폐기하는 게 낫다고 보는데. 넌 어찌 생각하느냐?”
“……만약 절 속인 거라면, 제가 직접 그자들을 죽이겠습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뇌가 껄껄 웃으며 이십칠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공에 입문하지 않은 어린것들 중 최고의 물건들로 준비해 네게 보낼 것이다. 너는 앞으로 그것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라.”
“예!”
이십칠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혈교가 네 사부의 무공을 비급으로 먼저 남길 줄 알았다.
직접 익히는 것은 적어도 몇 년 후에나 시작할 줄 예상했는데…….
더 이상은 적당히 속여넘길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해질 때였다.
“교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이리 갑자기 말이냐?”
이장로의 시비가 들어와 급히 보고하더니, 잠시 후 교주가 호위무사들과 함께 마뇌의 거처를 직접 찾아왔다.
“혈마재림 만마앙복! 미천한 종이 주인을 뵙습니다!”
마뇌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교주를 찬양했다.
이십칠호는 마뇌의 뒤쪽에 엎드려 똑같이 복창했다. 감히 고개를 들 생각조차 못 하고 이마를 바닥에 갖다 댔다.
“고개를 들라.”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매혹적이고도 나른한 목소리.
이십칠호는 가만히 있었다.
설마 저 말을 자신에게 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교주님의 말씀을 못 들은 것이냐! 고개를 들라!”
혈룡대주의 호통이 있은 후에야, 그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단전을 잃고 혈룡대에서 좌천된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혈마의 얼굴이었다.
“가까이 오라.”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와 독보적인 존재감.
홀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듯, 그의 주변으로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이십칠호는 홀린 듯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교주님…….”
혈마가 손가락을 뻗어 이십칠호의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또 너로구나.”
그들의 눈이 마주친 순간, 혈마의 새빨간 보석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