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17
416화. 그때는 놓친 것
손가락이 가볍게 닿았을 뿐인데,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또 너로구나.”
혈마는 보석처럼 붉은 눈동자로 이십칠호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공력을 끌어올리지도, 혈마안을 발동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이십칠호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모든 계획을 털어놓을 뻔했다.
혈마를 만난 게 그날이 처음이었다면, 단전이 망가지고 혈룡대에서 버려지지 않았다면, 마뇌가 훗날 자신을 토사구팽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면.
‘저 눈빛에 홀려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때의 이십칠호는 이미 뼛속 깊이 혈교를 증오하고 있었다.
으득…….
입안의 혀를 깨물자, 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멍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붓으로 그린 듯한 혈마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분명 흥미로워하는 기색이었다.
“……교주님?”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당사자들보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뇌와 혈룡대주가 더욱 당황했다.
특히 마뇌는 불쾌감과 의심이 깃든 눈으로 이십칠호를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교주님께서 이리 하찮은 자를 어찌하여 살피시는지…….”
대답은 혈마가 아닌 이십칠호의 입에서 나왔다. 일순간 격앙된 감정 탓에 목소리가 떨렸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입을 연 순간 핏물이 흘러내렸으나, 아무도 그 사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들 혈마의 입가에 걸린 나른한 미소를 보고 있었다.
“전에 혈룡대에 있지 않았나?”
그 말에 혈룡대주가 즉시 부복했다. 교주의 말을 듣고 이십칠호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다.
“반역자인 전대 혈룡대주 휘하에 있던 자입니다. 무리한 연공으로 단전이 망가져, 혈룡대에서 축출된 것으로 압니다.”
“…….”
몇 년 전, 이십칠호가 상관으로 모시던 혈룡대주는 교주를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정파에서 태어났으면 협객이 되었을 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우직하고 충성심 깊은 사내였지만, 하루아침에 반역자로 몰려 죽었다.
말도 안 되는 누명이었다.
‘혈마는 그걸 알면서도 방관했지. 이십 년 가까이 자신의 곁을 지켜온 무인을…….’
혈룡대에 있을 적, 유일하게 이십칠호를 사람답게 대해 준 인물이 혈룡대주였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이십칠호가 혈교를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계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교주님. 이자는 더 이상 혈룡대원이 아닙니다. 신경 쓰실 필요가 없는 자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혈룡대주는 이십칠호가 혈룡대에 있던 시절의 부대주였다.
“네놈이 왜 이곳에 있느냐!”
혈룡대주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다시 만난 옛 부하를 노려봤다. 마치 깨끗해야 할 옷에 묻은 얼룩을 보는 듯했다. 마땅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당장 쳐죽일 기세였다.
“저는…….”
그 순간, 마뇌가 중재를 하고 나섰다.
“혈룡대주는 진정하시오. 이자는 내가 불렀소이다.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단 것은 알고는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마주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오.”
마뇌의 눈에서 이십칠호를 향하던 의심과 불쾌감이 사라졌다. 교주가 이십칠호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 단순히 예전에 혈룡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너는 훗날 본교가 대업을 이루게 할 반석이 되거나……. 본교를 불태울 운명이구나.
이 당시 이십칠호는 그 말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백수룡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교주님께서 어찌 누추한 곳에 직접 발걸음하셨는지요? 부르셨으면 제가 한달음에 달려갔을 터인데…….”
혈마는 이십칠호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떼, 마뇌를 바라봤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운명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르지.”
혈마의 기행(奇行)은 유명했다.
도무지 의미를 해석하기 어려운 말과 행동들.
그뿐이었다면 단순한 광인으로 취급받았겠으나, 그는 혈교의 역사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절대고수이자 괴력난신을 부리는 술법가였다.
한마디 한마디가 교도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장로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뇌는 크게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주님께서 오늘 제게로 발걸음하신 것을 보니, 제가 준비한 대계(大計)가 반드시 성공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나이다!”
마뇌는 교주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십칠호가 이곳에 있는 이유도 설명했다.
“이자는 현재 무공교관으로 본교의 동량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단전이 망가져 무인으로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지만, 가르치는 재주가 제법 뛰어납니다. 하여 중요한 임무를 맡겼습니다.”
“어떤 임무지?”
마뇌는 혈교의 장로들 중에서도 교활하고 악랄하기로 유명한 자였지만, 혈마 앞에서는 그도 충성스럽고 열렬한 광신도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본교의 무림일통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계획을 세웠나이다!”
쿵!
계획을 모두 설명한 마뇌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오체투지했다. 혈룡대주와 교주를 호위하는 혈룡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앞다투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박았다. 바닥이 여러 차례 울렸다.
“…….”
유일하게 이십칠호만이 굳은 표정으로 교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조차 혈마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증유의 힘이 전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묶고 있었다.
백수룡은 전생의 시야를 빌려 함께 그 광경을 바라봤다.
‘미친 광신도 놈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혈마의 존재감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격이 이 공간 자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이장로. 네 계획이 성공하길 기대하겠다.”
길고 열정적인 설명에 비해 무성의하게 느껴질 만큼 짧은 대답이었으나, 마뇌는 그것으로 족한 듯 엎드린 몸을 부르르 떨면서 혈마를 찬양했다.
“믿고 맡겨 주셔서 영광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백수룡은 소름 돋는 진실을 깨달았다.
‘혈마는 무림 정복에 관심이 없어.’
마뇌가 알았다면 경악할 진실.
아니, 혈교의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이야기.
하지만 백수룡은 확신했다. 내기라도 걸 수 있었다.
‘이때는 감히 상상도 못 했지만…….’
지금의 백수룡은 혈마를 신격화하지도 않았고, 경외감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눈을 흐렸던 감정들을 걷어 내고 다시 보니, 저곳에는 권태로운 얼굴의 절대자가 있을 뿐이었다. 정파에서 말하는 무림 정복을 꿈꾸는 마두들의 수괴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림 정복뿐만 아니야. 저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혈마는 마뇌의 이야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의 눈은 자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교도들과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백수룡은 알 수 있었다.
‘그럼 뭘 원하는 거지?’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혈교는 역사상 최대의 성세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사파의 세력들이 혈교를 종주로 추대하였으며, 정파무림은 언제 그들이 쳐들어올까 노심초사했다.
충분히 무림 전체를 도모해 볼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혈마는 자신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교도들에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방관했다.
마뇌를 비롯한 장로들이 온갖 계략을 꾸미고, 언제든지 명령을 받들 준비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인내하고 기다려라. 곧 때가 올 것이다.”
““존명!””
거짓된 희망으로 모두를 속였던 것이다.
‘대체 네 목적은 뭐지?’
일반적인 상식과 이해, 통념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
혈마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백수룡도 ‘아직은’ 불가능했다.
“흥미롭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혈마가 다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백수룡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바라보는 것이 전생의 이십칠호인지,
아니면 시공간을 뛰어넘어, 백수룡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교를 위해 애쓰고 있다 하니, 너에게도 한 가지 상을 주마.”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
“옛 서고의 출입을 허락하겠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이십칠호의 입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교주님. 옛 서고라 하시면……?”
마뇌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히 불경스럽게 따지지는 못했지만, 어째서 하찮은 교관 따위에게 그만한 상을 내리느냐는 의문이 담긴 표정이었다.
“옛 서고의 서적들을 참고한다면, 뇌옥에 있는 고수들의 무공을 연구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마뇌여. 네게 말하지 않았다.”
마뇌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즉시 엎드려 죄를 청했다.
“주, 죽여 주십시오!”
혈마는 마뇌를 벌하지 않았다. 애초에 화가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관심도 없는 상대였기에.
그의 적안은 이 자리에서 가장 하찮고 약한 존재에게 고정돼 있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입술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운이 좋다면, 그곳에서 네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도 있겠지.”
“……반드시 대계를 성공시켜, 교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십칠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음이 기대되는군.”
혈마는 묘한 웃음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 * *
옛 서고.
그곳은 혈교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 중 하나였다.
오래전에 폐기된 무공들. 쓸모가 없다 여겨지거나, 만들다가 도중에 포기했거나, 효율이 떨어진다고 판단되어 버려진 무공들의 무덤.
하지만 혈교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옛 서고에 흥미를 가졌다.
-혹시 모르지. 옛 서고에서 전대 교주님들이 숨겨 놓으신 무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이곳에 버려진 무공의 주인들이 대부분 역대 교주들, 또는 혈교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절세고수들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옛 서고는 혈교에서도 금지(禁地)로 지정되어, 교주의 허락을 얻은 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옛 서고? 거기 들어갔다 나온 무인들 중에 열에 아홉은 뒈져 버렸다는 얘기 못 들었어?
-그럼 열에 한 명은 신공을 얻었다는 겁니까?
-아니지. 병신이 됐다는 거지.
혈룡대에 있던 시절에도 옛 서고에 대해 여러 차례 들었었다.
대부분은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곳엔 별의별 실험적인 무공이 다 있다더라. 짐승에게 익히게 하는 무공부터, 술법과 무공이 뒤섞인 것, 단전이 망가져도 펼칠 수 있는 무공까지…….
-절세고수들이 할 일이 없어서 그딴 걸 만들었답니까?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
-한 번쯤은 들어가 보고 싶긴 한데…….
-아서라. 평생 거기 들어갈 일은 없을 거다. 마지막으로 누가 들어갔던 것도 십 년은 되었을걸.
혈룡대의 선배가 해 준 말을 떠올리며, 이십칠호는 옛 서고 안으로 들어섰다.
서고 안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여 가고 있었다.
수많은 서책과 두루마리, 찢어진 종이에 휘갈긴 낙서 같은 것들까지.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은 내부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곳에 망가진 단전을 회복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이십칠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리며 서고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곳에 마지막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실제로 이곳에서 그는 원하던 것, 그 이상을 얻었다.
‘역천신공을 찾은 곳이 여기였지.’
백수룡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옛 서고 안을 둘러봤다.
그때 놓친 것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