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40
439화. 허락해 주십시오
녹의수사는 호흡을 정리하며 수련을 마무리했다. 육신을 감싸던 희끄무레한 기운이 몸 안으로 서서히 갈무리됐다.
“후우우우…….”
무아지경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얼굴은 방금 꿈에서 깬 듯 몽롱했다. 정신이 현실로 돌아오면서 서서히 시야가 트였다.
“……무공을 익히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일이었던가?”
녹의수사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만든 광경을 바라봤다.
그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반경 십여 장에 뚜렷한 흔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져 저도 모르게 발산한 기파가 만들어 낸 상흔(傷痕).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대호의 발톱이 대지를 찢어발긴다면 이럴까.
“대성을 이룬 것을 축하드립니다.”
백수룡이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채, 채주님……!”
“축하드립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장걸과 구길은 울먹이기까지 했다.
단순히 녹의수사가 무공에 큰 진전을 이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녹림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써온 녹의수사의 모습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보았다.
못 배우고 무식한 도적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라고 조언하고, 양민들을 갈취하는 도적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살게 해 준 은인.
염라채의 모두에게 녹의수사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녹의수사가 무공에 큰 깨달음을 얻는 모습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터져 버리고 만 것이다.
“흐어엉! 채주니이이임!”
“평생 채주님을 따르겠습니다아!”
산만 한 덩치의 사내들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달려들자, 녹의수사가 뒤로 물러나며 질색했다.
“이 녀석들. 징그러우니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녹의수사는 완전히 지친 상태였고, 장걸과 구길의 충성심은 손 몇 번 휘두른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녹의수사는 두 덩치 사이에 꽉 끌어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이놈들아. 땀내 난다…….”
녹의수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
“채, 채주님?”
“채주니이임!”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장걸과 구길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 채, 기절한 녹의수사를 마구 흔들었다.
백수룡이 제때 나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한참은 더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아예 목을 조르지?”
따악! 따악!
백수룡은 정수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두 산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강렬한 기시감이 든 탓이었다.
“어째 하는 짓들이, 며칠 전에 본 것처럼 익숙하단 말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수룡은 의식을 잃은 녹의수사의 맥을 짚었다. 예상대로 단순 탈진이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장걸과 구길에게 말했다.
“그냥 지쳐서 쓰러진 것뿐이니 걱정할 것 없어. 잠자리를 준비하고 불을 피워라. 오늘은 이 근처에서 노숙을 해야겠으니까.”
““예!””
장걸과 구길이 땔감과 낙엽을 주우러 흩어지고, 은호는 낑낑거리며 녹의수사의 뺨에 얼굴을 치댔다.
백수룡은 의식을 잃은 녹의수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대견함과 아쉬움이 공존했다.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 * *
타닥, 타닥.
“…….”
녹의수사는 모닥불 소리에 다시 의식을 차렸다. 힘겹게 눈을 뜨자,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이 보였다.
“깨어나셨습니까?”
백수룡은 모닥불 앞에 앉아 부지깽이로 검불을 들쑤시고 있었다.
드르렁~ 피유우우-
드르렁~ 피유우우-
장걸과 구길은 한쪽에서 우렁차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둘 다 강행군에 완전히 나가떨어진 모습.
바로 옆에서 천둥이 쳐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을 일별한 녹의수사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제가 얼마나 의식을 잃었습니까?”
“두 시진쯤 됐습니다. 탈진한 것치곤 일찍 깨어나셨는데, 몸은 어떠십니까?”
“꿈을…… 꾸었습니다.”
“꿈이요?”
고개를 끄덕인 녹의수사는 잠시 팔다리를 움직여 보더니, 여전히 현실감이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직은 제 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겉보기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갑자기 근육이 불어난 것도 아니고, 환골탈태처럼 육체가 새롭게 구성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녹의수사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미증유의 힘이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잠재돼 있었던 힘이라는 것을.
“지금이라면…….”
이미 극한까지 갈고닦았다고 생각했던 육체가 녹림십팔식을 만나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꿈꾸듯 몽롱했던 녹의수사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부끄럽지 않게, 녹림투왕의 후계자임을 선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녹의수사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모닥불에 비친 그림자가 순간 거인처럼 부풀었다.
“물론 그 전에 허락을 받아야겠지만요.”
“허락이라니요? 누구에게?”
녹의수사는 평평한 공터로 나가 백수룡을 바라보고 섰다.
적당히 두 발을 벌려 비스듬히 서고, 두 팔을 들어 올려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녹림투왕이 남긴 바위에서 찾아낸 후, 삼십 년이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한 무공.
이제는 거기에 녹림십팔식이 녹아든 기수식이었다.
“한바탕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
지그시 백수룡을 바라보는 녹의수사의 눈빛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백수룡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방금 전까지 탈진해 있던 몸인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힘이 끓어서 주체하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백수룡도 자리에서 일어나 기수식을 취했다. 녹의수사와 거의 비슷한 자세였다.
“…….”
“…….”
두 사내는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거렸고,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길은 이리저리 일렁였다.
화아악!
느닷없이 불어온 바람에 불길이 확 부풀어 오르는 순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파바바바박!
주먹과 손바닥이 부딪치고, 발과 발이 얽혔다.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었다. 발 구름에 피어오른 먼지가 구름처럼 번졌다가, 손짓 한 번에 용오름이 되어 솟구쳤다.
촤아아악!
두 사내의 움직임에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사납게 펄럭이는 소맷자락이 채찍처럼 서로의 얼굴을 노렸다. 그조차도 의도한 공격이었다.
그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온몸을 사용해 서로를 제압하려고 애썼다. 정파에서 비겁하다고 말하는 동작들도 박투 중에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다만, 내공은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순수한 육체만으로 겨루었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외공의 고수를 뽑는다면, 녹의수사는 십 년 전에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무인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지금은 그 손가락이 다섯, 아니 세 개로 줄어도 충분했다.
‘천음절맥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제대로 버티지도 못했겠군.’
백수룡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진심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밀렸다.
애초에 외공을 수련한 시간 자체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삼십 년을 단련한 육체는 오랫동안 깎아내 다듬은 금강석이었다.
그에 비하면, 백수룡의 육체는 아직 가공되지 않은 보석이었다. 그 잠재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말이다.
터어엉-!
백수룡은 두 팔을 교차해 녹의수사의 일장을 막아 냈다. 주르륵 밀려나는 그의 앞에 두 줄기 고랑이 파였다.
“후우우…….”
“후우우…….”
두 사내는 잠시 서서 호흡을 정리했다. 그들의 몸에서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녹의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꿈을 꾸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꿈에서 녹림투왕을 뵈었습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백수룡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녹의수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게 가르침을 주시더군요. 녹림십팔식의 시범을 직접 보여 주시며, 몸을 쓰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백수룡은 어느새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녹의수사는 잔잔한 목소리로 녹림투왕과 만났던 꿈속 이야기를 전했다.
“그 외에도 평소에 궁금했던 걸 많이 여쭙고,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말씀이 참 많으시더군요.”
“……수다쟁이긴 하죠.”
그저 잠깐 꾼 꿈에 불과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것을 단순한 꿈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의 무공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정립한 무공에는 그의 의념과 혼이 담기기 마련.
때문에 녹의수사는 꿈에서 만난 녹림투왕의 이야기를 흘려들을 수 없었다.
“녹림투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후계자라고 자처하고 싶다면 사형에게 우선 허락을 받으라 하시더군요.”
“……사형?”
살면서 처음 들어 보는 호칭에 백수룡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순간, 녹의수사가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포권을 올렸다. 그 태도가 손윗사람을 대하듯 겸손했다.
“주표가 사형(師兄)께 정식으로 인사 올립니다. 부디 제가 스승님의 숙원을 잇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 하하.”
맹호악에게 직접 녹림십팔식을 전수받은 사람은 백수룡, 전생의 이십칠호뿐이었다.
즉, 맹사부의 진정한 제자는 백수룡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맹사부가 꿈에 나와서, 내게 허락을 받으라고 했다고?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
녹의수사는 백수룡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설령 그 꿈이 사실이라고 해도, 웬만한 무인이라면 결코 입밖으로 내지 않았을 것이다.
백수룡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도 진짜 답답한 사내로군.”
“그 말씀은…….”
“얼마든지 허락해 줄 테니, 맹사부가 꿈꿨던 녹림을 만들어 봐.”
“……!!”
머지않아 새로운 녹림왕이 될 사내가 자신의 사제라.
백수룡이 웃으며 물었다.
“그 양반이 꿈에 나와서 내 얘기도 하던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백수룡의 말투가 자연스럽게 하대로 바뀌었다. 녹의수사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산적보다 더한 놈이지만, 산적이 될 놈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뭐? 그 양반은 죽어서도 제자 뒷담을 하고 다니는구만.”
킥킥 웃은 백수룡은 기수식을 바꾸었다.
갑자기 생각도 못 해 본 사제가 생겼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사제가 녹림십팔식을 순식간에 깨쳤으니, 본격적으로 맹호투를 가르쳐 주지.”
맹호투는 총 다섯 초식으로 이루어진 녹림투왕의 성명절기였다.
“지금의 사제라면 배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야.”
녹림십팔식을 높은 수준까지 단련해야 신체에 무리가 없이 펼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지만, 맹호투 자체는 배우기에 그리 어려운 초식들은 아니었다.
“역시 금방 배우네.”
“사형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음? 그거야 당연한 건데.”
“…….”
예상대로, 녹의수사는 맹호투의 다섯 초식을 단숨에 익혀 냈다. 남은 것은 반복 훈련으로 숙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대련만큼 실전에서 초식을 숙달하는 데 좋은 것은 없었다.
백수룡이 씩 웃으며 제안했다.
“한 번 더 붙어 볼까?”
“좋습니다. 사형.”
두 사람을 날이 샐 때까지 외공을 겨루며 몸을 부딪쳤다.
녹의수사뿐만 아니라, 백수룡에게도 가르치면서 깨닫고 배우는 것이 굉장히 많은 시간이었다. 녹의수사와의 대련으로 백수룡의 실력도 빠르게 늘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들은 사파 회합이 열리는 형산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