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61
461화. 구분이 되지 않았다
“사도(使徒)여.”
“…….”
물끄러미 혈마의 옥좌를 바라보던 일사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피처럼 붉은 장포를 전신에 두른 노인은 연배에 어울리지 않는 당당한 체격과 형형한 눈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로들 중에서도 감히 사도에게 불손한 언행을 일삼는 자는 흑야마제뿐이지만, 눈앞의 노인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사도의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기세를 드러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대장로. 무슨 일이지?”
“삼사도가 흑사련주의 행적을 좇아 떠났다고 들었소. 그게 사실이오?”
“그렇다.”
그 간단한 대답에, 대장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바람도 불어오지 않는데 그의 장포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함정일지도 모르는 일이거늘, 어찌 이리 쉽게 허락했단 말이오!”
대장로 불사마존.
혈교의 장로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뛰어난 무공을 지녔으며, 사도들과 함께 지난 전쟁을 겪은 인물이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다른 장로들과는 살아온 세월이 달랐다.
대성에 이른 그의 불사마공은 무림십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혈교가 전대 거령채주와 호문채주에게 건넨 불사야차마공은 불사마공이 가진 공능을 쉽게 흉내 내기 위해 만든 조잡한 열화판에 불과했다.
하여, 사도들도 대장로를 혈교의 역사로서 존중했다.
“……사도들은 내게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각자의 방식으로 교를 위해 헌신할 뿐. 그것을 의심하는가?”
일사도의 서슬 퍼런 눈빛에도, 대장로는 움츠러들지 않고 할 말을 했다.
“살막이 전멸했고 천살이 죽었소. 교도들이 동요하고 있는 걸 모르시오? 만약 이 상황에서 사도 중 한 명에게 변고라도 생긴다면…….”
“누가 삼사도를 죽일 수 있지? 흑사련주?”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일사도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묻자, 대장로가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사도들이 무적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오? 그랬다면 오십 년 전에 본교가 무너질 리 없었겠지. 또한 지금까지 음지에 숨어 힘을 키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오.”
“…….”
“당신들이 광세의 무공을 연마한 것은 알고 있소. 허나 드넓은 무림을 독보천하할 무적의 고수는 없소이다. 혈마지존께서 돌아오신다면 모를까……. 십존 격의 고수 여럿이 함정을 파고 기다린다면, 사도라고 한들 당해낼 수 없단 말이오!”
대장로의 몸에서 점점 강한 기세가 피어오르자, 교주전을 지키는 무인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일사도와 대장로가 충돌한다면, 흑야마제의 반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피를 흘릴 터였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다행히 일사도는 노기를 드러내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예 감정 자체가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미 충분한 대비를 해 두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지켜보겠소.”
대장로 또한 이 이상 일사도를 자극하지 않았다. 언행에 거침이 없는 듯 보여도, 백 년을 넘게 살아온 노괴에게는 나름대로 선을 지키는 기준이 있었다.
“찾아온 용무는 그게 다인가?”
“모용세가에서 무극검의 흔적은 찾지 못했소이다. 분가까지 모조리 뒤졌으나 허탕이었지.”
“…….”
잠시 침묵한 일사도가 물었다.
“모용준은?”
“무림맹 안에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이 확인되었소. 주화입마 증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이다.”
“……무극검을 온전하게 익혔군.”
“그것 외엔 설명이 되지 않소.”
얼마 전, 일사도는 직접 모용세가를 찾아가 멸문시켰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혈교를 배신한 모용준에 대한 응징.
두 번째는 혹시나 남아 있을지 모를 무극검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모용세가 그 어디에도 검존이 남긴 무극검의 흔적은 없었다.
일사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녕 청룡신협인가.”
일사도는 검존이 모용세가에 무극검의 비급을 숨겨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용세가에는 무극검은커녕 검존에 대한 기록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가능성은 하나.
청룡신협이 모용준에게 온전한 무극검을 전수했다면 앞뒤가 맞는다.
그가 스스로 무극검을 계승했다고 무림맹에서 당당히 밝혔으니 말이다.
‘허나 어떻게?’
청룡신협이 무극검의 계승자임을 밝히기 전까지, 일사도는 자신이 무극검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처음 청룡신협이 무극검을 계승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반신반의했다. 정말로 검존의 무공이 어딘가에 남겨져 있었다고 한들, 자신이 익힌 것보다는 한참 수준이 떨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모용준의 주화입마가 사라졌다는 대장로의 말에 일사도는 확신했다.
청룡신협이 온전한 무극검을 알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모용준은 진즉 혈맥이 터져 죽었거나 미쳐 버렸어야 했다.
“……청룡신협은 여전히 같은 곳에 있나?”
대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는 종적이 묘연하오. 온갖 소문이 무성한데…… 대부분 허황된 것들이라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소. 확실한 건 남창에는 없다는 것이지.”
“…….”
살막을 전멸시키고 천살마저 죽였다.
청룡신협에 의해 혈교의 계획이 몇 번이나 어그러지고, 막심한 피해를 입었는지 추정조차 불가능했다.
특히나 혈마의 술법을 이은 천살의 죽음은 혈교로서도 뼈아픈 손실이었다.
“악연이군.”
일사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악연(惡緣).
무심히 내뱉은 단어가 묘한 울림을 자아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교내에 배신자가 있는 듯하오.”
대장로는 흑립 아래에 가려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사도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사전에 정보를 준 게 틀림없소. 그게 아니라면, 살막의 살수들이 그토록 쉽게 발각된 것은 설명되지 않는 일이지.”
대장로가 눈에 노기를 띠었다. 지독한 살기가 교주전을 가득 채웠으나, 일사도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저 무심하게 명령을 내릴 뿐.
“찾아내라.”
“그리하리다.”
할 말을 모두 마친 대장로는 몸을 돌리려다가 순간 멈춰 섰다.
“간혹,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를 때가 있소.”
“…….”
“정말 본교의 부활과 무림일통을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
굉장한 모욕으로 들릴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일사도는 여전히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심했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았으련만.”
혀를 찬 대장로가 몸을 돌려 교주전을 나섰다.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일사도는 교주전을 나서서 지하 뇌옥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아래로 내려갈수록 벽에 박힌 야명주가 빛을 잃었다. 마치 어둠에 의해 서서히 생명을 잃어 가는 듯했다.
잠시 후, 목적지 앞에 도착한 일사도가 거대한 철문과 마주했다. 피 흘리는 마귀가 하늘을 올려보는 기괴한 형상이 문에 새겨져 있었다.
두 팔로 문을 밀어젖히자, 무거운 소리를 내며 문이 좌우로 열렸다.
끼이익…… 쿠웅!
지하 뇌옥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
일사도는 익숙한 듯 걸음을 옮겼다.
곧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
묵빛의 쇠사슬에 칭칭 감겨 있는 나신의 사내가 보였다. 흡사 수십 마리의 뱀과 뒤엉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장로.”
일사도의 부름에 흑야마제가 고개를 홱 돌려 노려보았다.
“일사도? 키키킥!”
흰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흑야마제의 한쪽 눈은 칠흑처럼 검고, 한쪽 눈은 피처럼 붉었다. 인세에 보기 드문 미남자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변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흑야마제의 주변으로 시뻘건 기운과 새카만 기운이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아직도 역천신공과 흑야마경을 섞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나.”
흑야마제의 몸에 칭칭 휘감긴 쇠사슬은 일사도가 묶은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묶어 놓은 것이었다.
“네가 고금제일의 자질을 지녔다고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설령 두 무공을 합치는 일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이 기존의 역천신공보다 뛰어나다곤 장담할 수 없다.”
일사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흑야마제는 광기를 드러내며 웃을 뿐이었다.
“내 무공은 내가 알아서 해. 두고 봐. 이걸 전부 내 것으로 만드는 날…….”
푸화아악!
거대하게 펼쳐진 어둠에 시뻘건 혈기가 뒤섞였다.
흑야마제의 머리카락이 적발로 물들며 하늘로 치솟고, 새카만 어둠을 머금은 쇠사슬이 끊어질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쳤다.
너무나 파괴적이고도 불안정한 힘이었다. 언제 터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완전해진다면 사도조차 능가할 것이나, 지금으로서는 스스로를 갉아먹을 뿐이었다.
흑야마제가 바싹 마른 입술을 뱀 같은 혀로 할짝이며 말했다. 고통에 전신을 바르르 떨면서도 입술은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너희 모두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거야.”
“진정으로 역천신공을 완성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지.”
일사도는 가져온 먹이를 짐승에게 던져 주었다.
흑야마제는 일사도가 던진 음식을 맨손으로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
일사도는 무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혈교의 힘이 더 이상 숨기기 힘들 정도로 비대해졌는데도, 교주전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주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사도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머지않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혈교의 주인께서 돌아오시리라는 것을.
어떤 형상일지는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분명히 돌아오리라는 것을.
어쩌면 흑야마제가 그분의 새로운 그릇일 수도 있으며, 혹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존재일 수도 있었다.
-나는 돌아올 것이다.
그 순간, 과거에 들었던 혈마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는 듯했다.
정파무림의 결사대가 혈교로 쳐들어오기 전, 혈마는 사도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남겼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너희는 다음을 준비하여라.
새빨갛게 빛나던 보석안과 인세를 초월한 듯한 존재감.
그의 말은 옛 스승, 그리고 마뇌에게 당한 어떤 금제보다 더욱 강력한 금제였다.
혈마는 사도들에게 존재의 이유였으며, 삶의 목적이었다.
-나를 기다려라.
그 한마디를 영혼에 새기고, 수십 년을 기꺼이 기다렸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번에는 옛 스승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한 가지는 꼭 약속하마.
최근에 꾼 이상한 꿈이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 그리고 사도들이 옛 스승에게 무공을 배우던 시절.
옛 스승이 술에 취해, 묘하게도 흐트러져 있었던 날의 기억, 그날의 꿈.
-언젠가, 너희들을 만나러 가겠다. 그리고…….
옛 스승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떠올랐다.
-너희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싶구나.
흑립으로 가려진 상처투성이인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돌아올 것이다.
-언젠가 너희들을 만나러 가겠다.
-기다려라.
-이름을 지어 주고 싶구나.
일사도의 머릿속에서, 혈마와 옛 스승의 목소리가 점점 하나로 섞여들었다.
어느새 그 둘은 구분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