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69
469화. 물러서라
소지광은 어릴 때부터 칼을 좋아했다.
-그럼 나는 천하제일도 할래!
천하제일이라는 말에 도(刀)를 붙이면 그토록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천하제일검, 천하제일권. 천하제일창. 그 어떤 것도 도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다 하늘을 날고 바위를 부수는 줄 알았던 코흘리개 시절에도, 친우들과 무림인 놀이를 할 때면 늘 나무칼을 골랐다.
마을에 잠시 흘러들어 온 흑사련의 늙은 무인을 따라나선 것도, 그가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어서였다. 아이의 근골이 좋아 보인다며, 늙은 무인은 소지광의 부모에게 은자 한 냥을 주고 제자를 샀다.
재수가 없었다면 늙은이의 병 수발이나 하다가 객사할 운명이었겠지만, 다행히 소지광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의 스승은 기껏해야 일류였지만 기초가 튼튼한 도법을 익히고 있었고,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소지광은 삼 년도 안 돼 그것을 대성했다. 흑사련의 고수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일이었다.
궁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보다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였다.
-소지광? 무슨 이름이 그렇게 촌스러워?
-그러는 추비연은? 이름부터 못돼 처먹게 생겼다.
-지광아. 날도 좋은데 누나한테 처맞고 싶니?
-비무 신청인가? 좋다! 당장 칼을 들고나와라!
-뭐래? 내가 왜 칼을 들어? 쟤 바보야?
오늘처럼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간 여자아이의 이름은 추비연이라고 했다.
비슷한 또래인 데다 무공도 뛰어나서, 비록 도객은 아니지만 흑사련의 후기지수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종종 마주쳤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와 칼 솜씨를 겨루자고? 하하. 새파란 애송이가 겁도 없구나.
-제발 살려 주십시오 대협! 제가 고수를 몰라뵙고…….
-멍청아. 왜 그렇게 무모해? 좀 세 보이는 도객만 보이면 눈이 뒤집혀서는…….
-저, 저자는 광마 헌원후 이후로 가장 위험한 도객이오! 무림공적으로 지정해야 마땅하오!
-나 도마(刀魔) 소지광이 흑사련주가 되는 것에 반대하는 자가 있는가?
-흑사련주가 팽가를 꺾었소! 이 자리에서 천하제일도가 누군지 명명백백히 가려졌소이다!
천하를 주유하며 수많은 도객을 만나 겨루었고, 여의치 않으면 밤을 새워 논도했다.
대부분은 싸워 이겼으나, 때로는 패하기도 했으며, 승부를 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소지광은 평생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이야말로 천하제일도라는 칭호에 가장 어울리는 사내라는 것을.
“큭큭…….”
흑사련주는 피를 토하며 웃었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자 전신의 상처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등을 기댄 바위는 피로 점철된 지 오래였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주마등인가 보군.”
과거의 수많은 날들을 떠올리는 흑사련주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의 앞에는 혈교의 세 번째가 사도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
삼사도의 모습 또한 멀쩡하지는 못했다.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무복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상처가 드러난 혈흔만 수십 곳이었다.
특히 가슴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로 깊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그건 술법인가?”
“…….”
삼사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칼날이 심장을 스쳤다. 그럼에도 사도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무상도법의 마지막 절초를 막아 냈으며, 곧바로 이어진 반격으로 끝내 흑사련주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만약 그의 심장이 버티지 못했다면…… 이 싸움의 결과는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조금 허탈하군. 천하제일도를 가르는 싸움에 술법이 끼어들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흑사련주는 그리 억울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흑사련이라는 거대 사파 세력의 주인이었다.
암기와 독, 기습과 모략 등 온갖 술수를 수없이 겪어 보았다.
그러니 사도가 술법을 쓴다 한들, 비겁하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조금 아쉬울 뿐.
“나보다 강한 도객에게 졌으니 여한은 없다. 다만, 도를 좋아하지 않는 자에게 패한 것은 분하구나.”
흑사련주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애병인 적월을 쓰다듬었다.
우우웅-!
무릎 위에 놓인 적월이 슬프게 울었다. 신병이기는 주인을 알아본다. 지난 수십 년간 그들은 단 하루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삼사도가 흑사련주에게 걸어왔다. 그 기척을 느낀 흑사련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덤덤히 최후를 맞을 생각으로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으음…….”
찢겨진 단전에서 아릿한 통증이 피어올랐다. 평생을 쌓아 온 내공이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천하제일도.”
“……음?”
“너를 그렇게 기억하겠다.”
그 말이 전부였다. 삼사도는 이가 듬성듬성 나간 칼을 들어 올렸다. 혈교에서 손에 꼽히는 보도였으나, 적월과 부딪치며 명이 거의 다한 녀석이었다.
“하하, 하하하하……!”
돌연 흑사련주가 광소를 터트렸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샘솟는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사람이 죽기 전에 잠시 원기를 되찾는 현상.
“내가 천하제일도라고? 사도여. 네가 나를 인정한 것이냐? 천하에서 가장 끔찍하고 강한 도법을 펼치는 네가?”
사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흑사련주를 바라보았다. 흑사련주에게는 충분한 반응이었다.
“하하! 너도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래. 솔직히 그건 반칙이었다. 심장이 반으로 갈라지고도 멀쩡하다니……. 목숨이 두 개인 셈이 아니냐?”
“살짝 스쳤을 뿐이다.”
삼사도는 흑사련주의 말을 정정했다.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도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호승심이라는 감정이 있었던가?
어쩌면 흑사련주의 칼날이 심장을 스쳐서 생긴 동요일지도 몰랐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으니까.
껄껄 웃던 흑사련주의 웃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사도를 바라봤다.
“내 친우에게 유언을 전해 주겠나?”
“거절한다.”
“……아쉽군.”
사도의 단호한 거절에 흑사련주는 입맛을 다셨다.
가능하다면 몇 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는데.
유언처럼 들릴까 전하고 오지 못한 것이 이제 와 후회가 되었다.
“이만 죽어라.”
흑사련주는 자신의 목을 베기 위해 내려오는 칼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전히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매끄러운 궤적이었으나, 지금의 흑사련주는 칼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지 못하고 온 것이…… 조금은 아쉽군.”
“말해. 안 늦었으니까.”
그 순간 사도의 칼이 궤적을 급격히 바꾸더니, 날아오는 화살을 쳐 냈다.
쩌엉-!
사도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 틈에 추혼궁귀가 둘 사이에 내려섰다.
“궁귀…….”
추혼궁귀는 자신을 부르는 흑사련주의 목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그의 상처를 살피고 싶었지만, 눈앞에 사도를 두고 등을 돌리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드드득…….
시위에 화살을 잔뜩 건 추혼궁귀가 사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꺼져. 아니면 나랑도 한번 드잡이질을 해 보든가.”
“…….”
삼사도는 잠시 고민했다.
흑사련주는 강했다.
십존이라 불리는 현 무림의 절세고수들을 한 수 아래로 여겼던 그를 경악하게 할 만큼.
추혼궁귀에게서 그만한 강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의 몸 상태로 십존과 연달아 싸우는 것은 분명 부담이었다.
‘어차피 내버려 둬도 곧 죽을 터.’
삼사도의 시선은 추혼궁귀의 뒤편, 안색이 몹시 창백한 흑사련주에게 향했다.
흑사련주는 이미 단전을 잃었다. 무인의 생명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수라혈천도의 살기가 몸 안에 침투해서 내부를 헤집고 있을 것이다. 그 기운을 전부 몰아내지 못하는 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만 길어질 뿐일 텐데.”
“닥쳐.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결국 삼사도는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곧 죽을 흑사련주보다는 다른 쪽이 더 중요했다. 그의 시선이 사사도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향했다.
스윽.
삼사도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몸을 돌려 경공을 펼쳤다.
추혼궁귀는 사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다가, 급히 몸을 돌려 흑사련주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소지광. 이 멍청한 자식!”
저도 모르게 흑사련주의 본명을 부르며, 추혼궁귀는 금창약을 꺼내 그의 몸에 덕지덕지 발랐다.
“……궁귀. 마침 잘 왔다.”
“입 다물고 있어. 일단 상처부터 지혈해야 하니까.”
“네게 할 말이 있는데.”
“닥치라는 말 못 들었어? 대체 어떻게 싸웠길래 몸이 걸레짝이 된 거야!”
“궁귀…….”
“한 번만 더 부르면 입을 막아 버리겠어. 눈 감고 집중해. 지금부터 내공을 불어넣어서 진기도인을 할 테니…….”
“비연.”
갑자기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걸까.
흑사련주가 손을 뻗어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추혼궁귀의 손목을 잡았다.
“뭐, 뭐야?”
깜짝 놀란 추혼궁귀가 고개를 들고 흑사련주를 바라봤다.
“이제야 날 보는군. 얼굴 한번 마주 보는 게 이리 힘들어서야.”
“…….”
추비연은 멍하니 소지광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에 본 미소 그대로, 그가 웃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잠시 이야기나 좀 나눌까?”
오랜 친우의 마지막 부탁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그아아아아악!
망가진 성대에서 거칠게 갈라진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윽…….”
백수룡은 등을 관통한 창룡신검을 내공으로 천천히 밀어냈다. 백수룡의 머릿속에서도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너! 내게 말도 안 하고 어떻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수선 떨지 마. 내장만 잘 피해서 찌르면 꽤 쓸 만한 수법이야. 상처는 치료하면 되고.”
곧바로 상처를 지혈한 백수룡은 창백한 표정으로 억지로 웃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투였다.
“나보다는 저 녀석이 문제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낸 백수룡은 사사도를 바라봤다.
그는 가슴에 난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워낙에 예리하게 베인 덕분에, 오히려 상처에서는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통스러워하는 옛 제자의 모습에, 백수룡의 표정도 좋을 수가 없었다.
“술법은 없어진 건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만…….]다시 백수룡의 손에 쥐어진 창룡신검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검극이 사도의 심장에 닿은 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짧은 접촉으론 혈마의 술법을 완전히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술법을 파훼하는 술식을 심장에 새롭게 새겨 넣었으니, 지금 사도의 몸 안에서는 두 개의 술법이 싸우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드물게 자신이 없는 말투.
천하제일의 술법사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현천신녀에게도, 혈마가 남긴 역천의 술법은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괜찮아.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걸어 보겠다고 한 건 나였으니까.”
백수룡은 쓰게 웃으며, 괴로워하는 옛 제자를 향해 걸어갔다.
사도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주변을 부수고 있었다. 그의 주먹질이 닿는 것마다 모조리 박살 나는 중이었다.
스스슷…….
백수룡의 머리카락이 적발에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역천신공을 거둔 것이다. 지쳐서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 혈마와 닮은 모습으로 제자 앞에 서고 싶지 않은 이유가 더 컸다.
“……이제 괜찮다.”
백수룡은 고통스러워하는 제자를 조심스럽게 달랬다. 그가 손을 뻗어서 사사도의 손을 잡아 주려고 할 때였다.
오싹.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든 백수룡이 본능적으로 손을 빼며 뒤로 물러났다.
촤아아악!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곳을 날카로운 도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물러서라.”
삼사도가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맹렬한 살기를 뿜어내며 백수룡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