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79
479화. 언젠가 그런 날이
“선생님. 무슨 책 읽으세요?”
마루 기둥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백수룡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위지천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검을 휘두르고 온 소년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백수룡을 닮고 싶어 하는 위지천이었다. 뛰어난 무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백수룡이 평소에 뭘 하는지부터 수업 준비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 무공을 가르치는 방법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청룡학관을 졸업하면 스승처럼 무공 강사가 되는 것이 위지천의 꿈이기 때문이었다. 백수룡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천하제일검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강호에 안 나가고 무공 강사가 되겠다니, 하여간 별난 녀석이라니까.’
백수룡은 피식 웃곤 읽고 있던 책을 위지천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 말이냐?”
“수어(手語) 교본?”
백수룡이 보여 준 책에는 손동작 그림과 그 동작의 뜻이 적혀 있었다.
“갑자기 수어는 왜 배우세요?”
“뭐든 배워 두면 다 쓸모가 있기 마련이거든. 나중에 농인 학생을 가르칠 수도 있고.”
“와……! 전 그런 생각은 한 번도 못 해 봤어요!”
위지천은 감탄한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에서 스승을 향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백수룡은 그런 제자가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맨날 스승을 조질 생각만 하는 어떤 녀석과 달리 모범적인 자세를 갖춘 제자가 아닌가.
“다른 애들은?”
“상웅 선배랑 여민 선배는 연무장 청소하고 있고, 원강 선배랑 수혁이는 대사부님 도와서 식사 준비하고 있어요.”
오늘 아침 난투 훈련의 최종 승자는 위지천인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은지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대사부님이 곧 식사 준비 끝난다고, 선생님도 준비하고 나오시래요.”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백수룡은 수어 교본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크기가 적당해서, 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읽을 생각이었다.
위지천이 그런 백수룡을 보더니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요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그래 보이냐?”
백수룡은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라, 정말 그래 보인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당신을 원망합니다.
오십 년 전에는 듣지 못했던 솔직한 대답을 들었다.
스승 앞에서 감정이 말살된 척 숨겨야만 했던 제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혈마의 술법이 풀린 거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쉽사리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호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수십 년간 족쇄처럼 정신을 옭아맸던 술법이 풀렸다. 그게 앞으로 그의 심경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것은 창룡신검도 예상할 수 없다고 했다.
한동안 당신을 지켜보겠습니다. 죽일지 말지 결정은 그 후에 하겠습니다.
단정한 필체로 적어 보여 준 문장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그 거리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문답 중에 거짓은 없었다.
“……선생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백수룡은 위지천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가 피식 웃었다.
“누가 날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한다고 했거든.”
“그게 기분이 좋은 이유라고요?”
위지천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면서, 존경하는 스승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존경하는 스승이라지만 저런 부분은 닮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하는 위지천이었다.
“그, 그럼 저는 씻으러 가 볼게요! 조금 이따가 봬요!”
“음? 그래. 알았다.”
백수룡은 갑자기 도망치듯 돌아서서 가 버리는 위지천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창룡신검과 적월을 챙겼다.
둘 다 칼집이 화려하지 않은 편이라 함께 들고 다녀도 눈에 크게 띄지는 않았다.
“수룡아! 밥 먹게 얼른 오너라!”
“예. 갑니다.”
이후에는 가족, 제자들과 평상에 둘러앉아 평범하게 아침을 먹었다.
아침 수련으로 배가 고파진 제자들은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놀렸고, 어른들은 점잖게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벌써 오늘이더냐?”
매극렴이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청의무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손자를 바라봤다.
백수룡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몸이 근질거려서 안 되겠습니다. 열흘이나 쉬는 건 다른 선생님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요.”
그 말에 백무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할 것도 많다. 그 꼴을 하고 돌아와서는 며칠이나 쉬었다고. 정작 네 몸에는 안 미안하더냐?”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것도 과하면 탈인 법이지. 수룡이 네가 이럴 때는 방탕하고 게을렀던 애비를 조금은 닮았어도 될 것을…….”
“장인어른. 그렇다고 수룡이가 약빙을 닮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
“솔직히 인정하십시오. 제가 얼마 전에 생활기록부를 봐서 다 압니다. 소싯적에 땡땡이는 약빙이 더 많이 쳤습니다.”
“이놈이 감히 내 딸을 모함해……!”
점잖은 것은 처음이었을 뿐, 이내 밥상머리 위에서 현란하게 젓가락질 비무를 벌이는 장인과 사위였다.
“왜 또 싸우고 그래요?”
며칠 동안 이런 모습에 익숙해진 백수룡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딱히 말리지 않았다. 젓가락이 현란하게 부딪치는 사이사이로 반찬을 쏙쏙 집어 먹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백룡장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익숙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백수룡은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길 감히 상상해 보며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백룡장을 나섰다.
“가자.”
오늘, 드디어 다시 청룡학관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 * *
““이따가 봬요!””
“다들 수업 중에 농땡이 피우지 말고. 특히 헌원강.”
“왜 또 전데요?”
“수업 중에 졸았다는 말이 한 번만 더 내 귀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개인 새벽 수련 금지할 줄 알아. 너 혼자 반 시진 일찍 일어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아니…….”
구시렁거리는 헌원강을 뒤로하고, 백수룡은 제자들과 헤어졌다.
“형니이임!”
불과 반 각도 지나기 전에 반가운 얼굴과 만났다. 악연호가 멀리서부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 다 나으신 거예요?”
백수룡이 백룡장에서 요양하며 두문불출하는 동안, 신입 강사 동기들이 돌아가면서 한 명씩 찾아왔었다.
함께 움직이면 주변의 시선을 끌까 봐 조심한 것이었는데, 악연호는 며칠 전이나 지금이나 눈에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백수룡을 신경 써 주었다.
백수룡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다 나았다. 며칠 동안 별일 없었지?”
“일이야, 요즘에는 늘 많죠. 이제 정말 천무제가 두 달도 안 남았으니까요.”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붙임성이 좋고 발이 넓은 악연호는 학관의 소식통이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백수룡은 자신이 청룡학관을 비운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관주님이 후임을 누구로 정할지 고민하고 계신가 봐요.”
“얘기 나온 사람이 있어?”
“청룡학관 내부에서 후보는 셋 정도인데요. 부관주님, 풍진호 선생님, 매극렴 선생님 이렇게.”
“할아버지도?”
부관주 곽철우와 풍진호는 예전부터 학관의 권력 구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매극렴은 조금 의외였다.
“……거절하실 텐데.”
매극렴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관주직을 거절할 확률이 높았다. 권력에 욕심이 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학생주임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을 테니까.
“관주님은 매극렴 선생님 쪽을 미시는 것 같더라고요. 인망이든 실력이든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으시니까.”
“솔직히 그만한 후보가 없긴 하지.”
은근히 자부심이 느껴지는 백수룡의 말투에, 악연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요즘은 학생들이 수학여행 때문에 잔뜩 들떠 있어요. 곧 장소가 발표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수학여행 이야기를 하는 악연호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수학여행은 천무제 전에 남아 있는 가장 큰 학사 일정이었다. 수학여행이 끝나면 금방 기말고사 기간이고, 오대학관의 모든 학사 일정이 끝나면 천무학관에 모여 천무제를 치른다.
수학여행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던 백수룡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도 수학여행 장소가 안 정해졌다고?”
“정해지긴 했는데, 올해는 보안 문제 때문에 늦게 발표하려나 봐요. 정확한 위치는 관주님이랑 담당하시는 선생님밖에 모르는 것 같던데.”
“담당이 누군데? 슬쩍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
“남궁수 선생님이요.”
“음…….”
백수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을 녀석이니, 보안만큼은 철저하게 유지될 것 같았다.
“원래 올해는 남궁세가로 갈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어렵게 됐으니까요.”
“하긴…….”
남궁세가는 혈교의 공격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어찌어찌 잘 수습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외부 행사까지 치를 여력은 없을 터였다.
“그래서 지금 애들끼리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니까요?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중에 한 곳으로 갈 거라는 말도 있고.”
“구대문파는 힘들걸. 기껏해야 구파의 속가 중 큰 곳으로 가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백수룡은 이참에 구파를 한 번쯤 견식하고 올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수학여행이 처음이긴 악연호나 백수룡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어린 시절에 학관에 다닌 경험이 없었다.
백수룡은 잔뜩 들떠 있는 악연호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왜 네가 그렇게 신났냐? 그래 봤자 며칠 놀러가는 것 가지고.”
그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에, 악연호는 가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축제 때도 그래 놓고 자기가 제일 날뛰었으면서…….”
“……흠흠. 그건 경우가 다르지.”
“기마전에서 형님한테 뽑힌 머리카락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았거든요?!”
투닥거리며 걷다 보니 금세 대연무장을 가로질렀다.
사무실 방향이 나뉘는 길목에 멈춰선 악연호가 씩 웃으며 백수룡을 돌아봤다.
“아무튼 형님이 돌아와서 좋네요. 청룡신협은 청룡학관에 있어야지.”
“나도 돌아오니 좋다. 시간 될 때 일오랑 소영이도 불러서 다 같이 한번 볼까?”
“언제든지 좋죠!”
늘 그렇듯 악연호는 밝고 유쾌한 모습이었다.
서로 알게 된 이후로, 백수룡은 악연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난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다.
함께 있는 사람의 기분까지 늘 신경 써 주는, 은근히 세심하기도 한 녀석.
그래서 어두운 부분은 보아도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었는데, 오늘따라 미소 뒤에 숨겨진 그늘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앞으로는 형님 혼자서 싸우러 나가지 말고 저도 부르세요. 동기 좋다는 게 뭡니까?”
장난스레 웃으며 자신을 걱정해 주는 악연호에게, 백수룡은 불쑥 예전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말을 했다.
“인마. 너나 혼자 끙끙 앓지 마.”
“……예?”
“숨기는 게 많은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순간 악연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찰나라고 해도 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하하.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 수업 준비도 해야 해서 이만 가 볼게요!”
시치미를 뚝 뗀 악연호가 돌아서서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눈썰미가 좋은 백수룡은 그가 평소보다 경직돼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언제든 너 편할 때 이야기해라.”
순간 움찔하는 동기의 어깨를 바라보던 백수룡이 몸을 돌렸다.
“충분히 기다려 줄 테니까.”
사람마다 쉽사리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백수룡 자신도 과거와 솔직하게 마주하는 데 한참이나 걸리지 않았던가.
마냥 해맑아 보이기만 하는 그의 동기도, 언젠가는 그럴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