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00
500화. 공과 사는 정확히
산동악가.
무림에 창을 다루는 문파나 세가는 많지만, 그중 제일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이름이 바로 악가창법이었다.
현 십존 중 한 명인 창왕 악비가 가주가 된 이후, 나날이 세를 확장한 악가는 당대에 이르러서는 오대세가에 능히 견줄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궁세가가 가문 내에서 벌어진 혈사로 크게 쇠락하고, 모용세가마저 최근 멸문했기에, 산동악가가 자연스럽게 새로운 오대세가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쯤 남궁수와 악연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친 덕분에 점심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쯤 도착할 수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으로 수만 평에 달하는 분지에 세워진 건물들은, 대가문의 분가라기보다는 군부의 병영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멈추시오!”
정문 앞에서 경계 중이던 무인들이 창을 겨누며 두 사람을 제지했다.
절도 있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그들이 겪은 수련의 강도를 짐작하게 했다.
“초대장이나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을 제시…….”
“동걸아. 오랜만이다.”
악연호가 앞으로 나서자, 그를 알아본 수위 무사 중 한 명이 표정을 굳히며 급히 포권을 취했다.
“악연호 도련님을 뵙습니다.”
“잘 지냈어? 여긴 예전 그대로네.”
악연호가 친근하게 웃으며 안부를 물었으나, 동걸이라 불린 무사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즉시 기별을 넣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그런데…….”
악연호는 상대의 사무적인 대답에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가주님도 오셨나?”
“예. 사흘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역시 오셨구나. 그럼 누님도?”
“함께 오셨습니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던 듯 악연호는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어두워진 그의 옆얼굴을, 남궁수가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들어가시면 시비가 안내할 것입니다. 문을 열어라-!”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악가의 분가로 들어섰다. 그들의 뒤에서는 동걸이라 불린 무인과 수위 무사들이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남궁수가 지나가듯 무심하게 물었다.
“저 무인과 면식이 있는 것 같던데.”
“……예전에는 친구였습니다.”
악연호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묘한 과거형의 대답이었지만, 남궁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듣던 것보다 시설이 더 좋아 보이는군.”
주변을 둘러본 남궁수가 말했다.
본래 무림세가가 아닌 군부 출신으로 시작된 가문답게, 악가는 전체적으로 실용적이고 단순한 구조를 선호하는 듯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천혜의 요새.
단순히 가문의 분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둘러볼수록 마치 전쟁에 대비한 시설처럼 보인다는 점이 다소 의외였지만,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구조 덕분에, 적어도 수학여행 기간만은 안심할 수 있어 장소로 선정되었다.
잠시 후, 시비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설홍이라 합니다. 두 분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남궁수는 악가의 시비가 정문의 무인들과 비슷한 계열의 보법을 익혔음을 눈치챘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겠네.”
그 순간, 시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인상이 몹시 차가운 명문가의 공자가 이토록 부드러운 어조로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쪽입니다.”
두 사람은 시비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학생들이 머물 숙소와 수련장을 눈으로 훑는 남궁수에게, 악연호가 웃으며 말했다.
“남궁수 선생님.”
“……?”
“생각보다 다정하시네요.”
“…….”
“무서운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새로운 면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다음에 괜찮으시면, 수룡 형님하고 셋이…….”
악연호 나름대로는 용기를 낸 말이었으나, 남궁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있으면, 일정이나 한 번 더 확인하도록.”
“죄, 죄송합니다.”
악가의 분가는 넓고 쾌적했다. 수학여행 일정을 진행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평소에도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두 사람이 시비를 따라 일각쯤 걸어갔을까.
맞은편에서 등에 창을 사선으로 멘 키가 큰 여인이 성큼성큼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걸어왔다.
“……누님. 오랜만입니다.”
악연호가 먼저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연호구나.”
여인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악연호 옆에 있는 남궁수에게 포권을 취하며 짧게 말했다.
“악연화입니다.”
악연화.
머지않아 십존인 부친을 뛰어넘을 거라는 평가를 받는 산동악가의 소가주.
고강한 무공에 더불어 출중한 미모까지 갖추었으나, 호사가들이 분 냄새보다 쇠 냄새가 어울릴 거라고 말할 정도로 치장에는 관심이 없기로 유명했다.
물론, 당사자 앞에서 그 비슷한 말을 지껄였던 자들은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되었다.
“남궁수입니다. 저희가 오찬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닙니까?”
“딱 맞춰서 오셨습니다.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남궁수는 명문가의 자제답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서자라는 신분 탓에 형들처럼 자주 이런 자리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예법이라면 어려서부터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악연화를 따라 두 사람이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드넓은 정자에 산해진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악가의 혈족들로 보이는 무인들이 탁자의 좌우에 길게 앉아 있었고, 상석에는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산동악가의 가주, 창왕 악비였다.
“가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모셔 오너라.”
내공을 싣지 않았음에도 주변을 웅웅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십존의 일원을 만나는 자리였다.
뿐만 아니라 형형한 눈으로 남궁수를 훑어보는 고수들의 숫자가 두 자릿수가 넘었다.
누구든 기가 죽을 법도 하지만, 앞으로 나선 남궁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몸가짐으로 예를 취했다.
“산동악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청룡학관 강사 남궁수입니다.”
“호오…….”
악비는 한동안 물끄러미 남궁수를 바라보았다. 굳이 감탄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남궁가주의 셋째가 이토록 훌륭하게 장성했을 줄은 몰랐군.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직접 얼굴을 뵌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째서? 본가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예를 들면 연화의 생일 때마다 오대세가의 또래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을 텐데?”
설마 남궁세가가 본가를 무시한 것은 아닐 테고?
가주의 뼈 있는 농담에 악가의 무인들이 껄껄 웃었으나, 이어진 남궁수의 대답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저는 가문의 서자인지라 초대장을 받지 못한 듯합니다.”
“…….”
예상치 못한 대답에 정자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서자여서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즉, 후계자와 거리가 멀어서 악가에서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었다.
“저자가 지금……!”
“가주님께 말대답을 한 것인가?”
충성심이 지나친 악가의 무인 일부가 고리눈을 뜨고 남궁수를 노려봤으나, 남궁수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하하하하!”
정작 악비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껄껄 웃어넘겼다.
“재치와 기개가 넘치는 대답이었다. 진작 만나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혹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풀도록 하지.”
“그저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악연호는 가주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가문의 일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한 대접이었다.
“어서 손님에게 자리를 내어드려라.”
손님의 자리도 하나뿐이었다. 악연호는 앉지 못하고 남궁수의 뒤편에 섰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남궁수는 처음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악비는 여전히 남궁수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남궁가주께선 무탈하신가?”
“예. 건강하십니다.”
“가문이 그 꼴이 되었으니, 상심이 크시겠지.”
스르륵.
술병이 저절로 움직여 남궁수의 잔을 채웠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허공섭물이었다.
“설마 집안에 혈교의 종자들이 섞여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나 또한 남궁세가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가문을 단속하고 있으니. 실제로 혈교가 심어 놓은 세작을 몇 잡기도 하였지.”
피식.
가주의 입가에 맺힌 얇은 미소에, 자리에 모인 악가의 무인들 중 대다수가 어깨를 떨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쌓여 온 두려움이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악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궁수만을 제외하고.
“혹 남궁세가에서 겪었던 일이 반복될까 걱정된다면 마음을 놓아도 될 것이다. 혈교의 무리도 감히 본가의 영역을 침범하지는 못할 테니.”
“…….”
천하제일세가라 불렸던 남궁세가는 영락했고, 산동악가는 그 자리를 차지할 기세로 나날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악비는 남궁수를 신경 써 주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남궁세가를 비웃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웬만큼 수양이 깊은 무인이라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거나, 최소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남궁수의 표정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무림의 어른이 따라 준 술을 법도에 따라 깨끗이 비운 후.
“악가주님.”
탁.
술잔을 내려놓은 남궁수는 샛노란 금안으로 산동악가의 가주를 조용히 응시했다.
“이번에는 제가 한잔 올려드려도 되겠습니까?”
“좋다.”
스르륵.
악비의 앞에 있는 술병이 스스로 움직여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조금 전 그가 보여 준 것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의 허공섭물.
그 순간, 악비를 비롯한 산동악가 무인들의 눈동자에 경악이 스쳤다.
“이토록 본가를 걱정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만 공과 사는 정확히 구분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어라?”
악비의 두꺼운 눈썹이 크게 꿈틀댔다.
터질 듯한 긴장감에 악가의 혈족들이 숨마저 멈추는 가운데, 남궁수가 차분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남궁세가의 아들이 아니라, 청룡학관 강사로서 공식적으로 방문했습니다. 가문의 이야기를 길게 할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지금 하신 말씀의 어디에 수학여행 일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지요?”
“…….”
조목조목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 반박.
하지만 상대가 무림십존이자 산동악가의 가주라면, 감히 이렇게 받아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백수룡이라면 상을 엎었겠지만.’
남궁수는 자신이 선발대로 온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 백수룡이라면 당장 악가주의 얼굴에 주먹부터 날렸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교양과 상식을 갖춘 그는 상대를 말로 설득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 설득조차 통하지 않는 짐승을 상대할 때였다.
남궁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학여행 일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실 것이 아니라면, 저는 이만 학생들이 사용할 숙소와 건물을 둘러보러 가겠습니다.”
“하…….”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당황한 악비는 헛웃음을 흘렸다. 짧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벼락을 담은 듯한 남궁수의 금안과 마주한 순간, 그는 그 많은 생각들을 잠시 밀어두었다.
“길을 안내할 시비를 붙여 주겠다.”
“악연호 선생으로 충분합니다.”
남궁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악연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 하는 건가? 학생들이 도착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많다.”
“……아, 예!”
악연호와 함께 연회장을 나서던 남궁수는 입구에서 잠시 멈춰서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남궁수는 연회장에 가득한 산해진미를 둘러보았다.
저 중에서 무인들이 입에 댄 음식은 겨우 몇 점에 불과했다.
“남궁세가는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남궁수는 깍듯이 예의를 차려 포권을 취한 후,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감히!”
“저자가 청룡신협의 위세를 믿고 건방을 떠는 것이 아닙니까!”
“이빨 빠진 남궁세가의 아들이 뭐가 그리 잘났다고……!”
가주의 눈치를 보는 악가의 무인들은 남궁수가 사라지자마자 그와 남궁세가를 깎아내렸다.
악연화만이 유일하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침묵할 때였다.
쾅!
창왕이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치자 떠들던 자들이 침묵했다.
“청룡신협을 믿고 까분 것이 아니다.”
악비는 남궁수가 술을 채워준 잔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굵은 손가락이 잔을 감아쥔 순간.
파지지직!
잔에 남아 있던 뇌기가 술잔 안에서 벼락처럼 명멸하고 흩어졌다.
“……청룡학관에 용이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니었군.”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악비는 따뜻하게 데워진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