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01
501화. 보나마나죠
“……괜찮을까요?”
악연호가 남궁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연회장 쪽을 계속 힐끗거렸는데, 안에서 고성이 터져 나오고 사나운 기파가 출렁이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무슨 말이지?”
그러나 정작 악가의 고수들 한복판에서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 나온 당사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에 든 일정표를 확인할 뿐이었다.
“언행이 너무 심하셨어요. 저희 가주님, 세간에는 호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악연호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남궁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딱히 호걸처럼 보이진 않더군.”
“…….”
“그리고 법도에 맞게 행동했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업무에 집중하도록.”
먼저 남궁세가를 깎아내리며 도발한 쪽은 창왕이었다.
그것이 단순히 악가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일부러 남궁수를 도발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봤다는 것.
모략 따위는 모를 것처럼 기골이 장대한 사내의 눈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신중하고 교활하게 남궁수를 살피고 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주인들은 대체로 교활하고 영악하지. 기억해 두거라.
남궁수는 가문에 들렀을 때 부친이 해 준 조언을 떠올렸다.
여름방학을 맞아 가문으로 돌아온 아들들에게, 남궁천은 대대로 소가주만 익힐 수 있는 제왕검형을 똑같이 전수했다.
-앞으로 본가는 수많은 도전과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더는 가문의 후광에 기대지 마라. 너희가 스스로 실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남궁이라는 성은 오히려 너희들의 목을 죌 것이다.
가문 내에서 벌어진 혈사로 그 힘이 크게 약해진 남궁세가. 그들은 더 이상 천하제일세가가 아니었다.
-아버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본가를 다시 천하제일로 만들겠습니다!
남궁수의 두 형은 후계자 경쟁에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잠도 줄이고 무공에만 매진했으나, 남궁수는 조금 달랐다.
그는 제왕검형의 구결만큼이나, 부친이 차를 마시다가 지나가듯 툭툭 던지는 무림의 정세에도 귀를 기울였다.
-머지않아 무림의 세력 구도가 변할 것이다.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구름 위 신선들처럼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던 구파일방도 움직이겠지. 또한 혈교에 협력하려는 가문과 방파도 생길 것이다. 이 전쟁은 그들이 올라설 기회가 될 테니.
남궁천은 세력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할 것이고, 그중 일부는 사멸하고 일부는 살아남아 승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누가 우리의 친우가 되고 누가 적이 될 것인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본가가 잠시 휘청인다고 무시하는 자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적과 친우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고견을 더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셋을 불러서 말했는데, 한 놈만 질문을 하는군.
뒤늦게 허겁지겁 질문을 쏟아 내던 두 형이 떠올랐으나, 남궁수는 고개를 저어 잡스러운 생각을 바로 털어 냈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산동악가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기에는 일렀다. 찬찬히 더 살펴볼 생각이었다.
“학생들이 머물 숙소부터 확인하도록 하지.”
“네! 이쪽입니다.”
두 사람은 학생들이 머물 숙소와 수련할 연무장, 실내 교육이나 일정을 진행할 때 사용될 장소, 비품 등을 함께 확인했다.
중간중간 두 사람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악가의 하급 무사거나 일하는 시종들이었다.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지나가는 자들 중 일부는 악연호를 보고 표정을 굳히곤 했다.
“아, 여기가…….”
남궁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악연호가 혼자서 눈치를 보며 말했다.
“본가에서 종종 와서 수련을 하는 곳이라서요. 어릴 때는 아예 몇 년 정도 머물기도 했고……. 그래서 이곳에 아는 친구들이 좀 많은 편입니다.”
“친구라기엔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던데.”
“하하, 그게 참 나이가 들다 보니…….”
애써 웃고 있었지만, 악연호는 흐린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남궁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시 입구로 가지.”
“……예.”
수위 무사들에게 양해를 구한 남궁수는 경공을 펼쳐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가 악가의 분가를 전체적으로 크게 둘러보았다.
‘확실히, 군부의 병영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군.’
위치 자체가 천혜의 요새인 것은 사실이지만, 달리 말하면 외부로부터 고립돼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분지로 들어오는 입구는 하나였고, 내부에는 넉넉한 식량과 물자가 비축돼 있었다.
입구만 단단히 틀어막아도 외부의 적으로부터 농성하기에 훌륭한 장소가 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도 쉽지 않을 터였다.
만약 외부에서 공격을 받는 일이 생긴다면…….
남궁수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 아버지?”
당혹스러워하는 악연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걸어오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인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연호야. 여기 있었구나.”
사내는 걸어온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지 가쁘게 숨을 쉬었다.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악연호가 사내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멍한 얼굴이었다.
“왜, 왜 여기 계세요? 본가에 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주님께서 함께 가자고 하셔서 따라왔다. 겸사겸사 네 얼굴도 볼 겸. 헌데 살이 좀 빠진 것 같구나?”
사내는 옅게 웃으며 악연호의 뺨을 쓰다듬어 주더니, 몸을 돌려 남궁수에게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연호의 애비인 악진헌이라 합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남궁수입니다. 아닙니다. 그저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귀공자라고 할 수 있는 악연호와는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이었다. 주름진 얼굴은 투박했고, 무공 또한 거의 익히지 않은 듯했다.
‘아니, 익히다가 다친 것인가.’
절뚝거리는 왼쪽 다리는 꽤 오래전에 다친 것으로 보였다.
악진헌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들고 온 보따리를 악연호에게 건넸다.
“떡을 좀 챙겨왔다. 청룡학관 선배님들과 함께 나누어 먹거라.”
“아버지도 참……. 왜 이런 걸…….”
악연호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준 악진헌이 남궁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실례인 줄 알고도 아들 녀석 얼굴이나 잠깐 보려고 찾아뵈었습니다. 바쁘실 테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연호, 부족한 녀석이지만 잘 좀 부탁드립니다.”
“……지금보다 미래가 훨씬 더 기대되는 후배입니다. 이미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남궁수의 칭찬에 악연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악진헌의 입가에는 숨기지 못한 기쁜 미소가 맺혔다.
“잘 적응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동걸아! 아버지 좀 숙소까지 모셔다드려 줘. 부탁할게.”
멀뚱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수위 무사들 중, 악연호와 안면이 있는 동걸이란 무사가 다가왔다.
“어르신.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미안하네. 부탁 좀 하지.”
악연호는 동걸의 부축을 받아서 멀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남궁수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도 안 닮았죠? 수룡 형님에게 들으셨을지도 모르지만…… 실은 제가 양자거든요.”
악연호는 조금 허망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초탈한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보셨다시피 제 양부께선 무공을 거의 못 익히셨어요. 젊었을 때 무공을 익히다가 크게 다치셨다고 하더라고요. 오랫동안 슬하에 자식도 없으셨고요. 뭐, 덕분에 웬만한 친아들보다 나은 저를 입양했으니 복 받으신 거지만.”
농담하듯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악연호가 지금까지 굳이 밝히지 않았던 개인사였다.
‘그래서였나.’
남궁수는 연회장에서 악연호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던 악가의 무인들을 떠올렸다.
악진헌은 무인으로서 가치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무림세가에서 평소에 어떤 취급을 받을지, 남궁수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 아까 전의 연회장에서는 그를 볼 수 없었던 이유도, 그곳에 있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일부러 직계와는 거리가 먼, 그리고 가문에 영향력이 없는 무인들에게 양자들을 입양하도록 시켰겠지.’
성씨는 내어주되 위협은 되지 않도록 얇은 울타리 안에 이방인들을 넣어 준 것이다. 자신들은 그 안에 더욱 튼튼하고 견고한 울타리를 친 채로.
가문의 세력은 넓히면서, 권력은 나누지 않는 방식이었다.
‘산동악가의 양자들 대부분이 악연호와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겠지.’
남궁수는 악가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관행을 간파했다. 그 역시 혈통을 중요시하는 명문세가의 일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악연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남궁수 선생님. 괜히 이런 얘기로 심기를 어지럽게 해 드려서…….”
대체 무엇이 죄송한 것이며, 왜 네가 죄인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인가.
“상관없다.”
“……예?”
“네가 양자건 서자건, 내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뜻이다.”
“…….”
“악연호. 너는 내게 청룡학관의 강사일 뿐이다.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도록. 쓸데없는 일로 내게 사과를 할 필요도, 고개를 숙일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남궁수의 단호한 눈빛에서 벼락이 튈 듯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
하지만 그 분노가 향하는 사람은 악연호가 아니었다.
“아…….”
고개를 든 악연호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남궁수를 바라보다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축 처진 어깨가 다시 올라온 것을 보니,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일하러 가지.”
고개를 끄덕인 남궁수가 성큼성큼 앞서 걸음을 옮기자, 악연호가 그 옆에 쪼르르 달라붙으며 말했다.
“저…… 앞으로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니,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당연히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던 남궁수는 놀랍게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순간 눈동자가 커진 악연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형님? 남궁수 형님? 남궁 형님?”
“…….”
“궁수 형님…….”
“죽고 싶나?”
“죄, 죄송합니다. 그럼 형님이라고는 불러도 되는 거죠?”
“…….”
어느새 평소의 붙임성을 되찾은 악연호가 헤실헤실 웃었다.
“그나저나 남궁 형님하고 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수룡 형님이었으면 사고를 쳤어도 벌써 쳤을걸요.”
남궁수도 공감하는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상식과 교양이 많이 부족한 후배지. 나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다.”
“사실 방법은 달라도, 사람 열 받게 하는 정도는 비슷할 것 같은데…….”
“…….”
“죄, 죄송합니다!”
남궁수는 악연호를 한번 흘겨본 후 다시 걸음을 옮겼고, 악연호는 그 뒤를 따라가며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어색하기만 했던 두 사람의 뒷모습이 조금은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였다.
“경계태세!”
분지 바깥을 살피던 악가의 무인들이 경종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자, 분가 곳곳에 흩어져 있던 무인들이 순식간에 집결했다.
“습격이라고?”
표정을 굳힌 남궁수와 악연호가 경공을 펼쳐 단숨에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일단의 두 무리가 보였다.
“저건…….”
먼지구름 사이로 얼핏얼핏 비치는 푸른 무복을 본 순간, 남궁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백수룡. 또 네놈인가.”
“보나마나죠…….”
그 옆에서는 악연호가 놀랍지도 않다는 투로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