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04
504화. 지금은?
“술. 연초. 골패. 춘화. 그 외에도 본인의 양심에 걸리는 물건은 전부 밖으로 꺼내 놓는다. 지금 자수하면 뭐가 나오더라도 용서해 준다.”
학생들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지나다니며 흑룡편으로 손바닥을 탁탁 치는 백수룡의 모습은, 떼인 돈 수금하러 나온 사파의 왈패가 따로 없었다.
“지금부터 딱 열까지 센다. 하나.”
꿀꺽…….
하지만 일 년 가까이 그 모습에 단련된 청룡학관의 학생들도 만만치 않았다. 아직은 눈치만 볼 뿐, 쉽사리 보따리를 열지 않았다.
그러나 백수룡은 그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었다.
“……셋. 다섯. 일곱.”
“왜, 왜 하나씩 건너뛰고 세는데요!”
“잠깐만요! 잠깐만!”
간이 작은 학생들이 허겁지겁 술과 연초 따위를 꺼내 놓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요주의 학생들이라 할 수 있는 청룡오망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앉아 있었기에, 많은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수군수군.
“오망나니는 왜 가만히 있대?”
“저 녀석들이 그냥 왔을 리가 없는데…….”
“헌원강 보따리 좀 봐.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로 크지 않아?”
헌원강은 흡사 달팽이라도 된 듯 커다란 보따리에 등을 기대어 앉아선 팔짱까지 끼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초탈한 도인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아홉. 열.”
기어이 숫자를 다 센 백수룡은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 녀석들아. 눈빛만 봐도 안다.’
혈교 교관 시절, 훈련생들이 온갖 극독이며 암기 따위를 숨겨 두던 장소도 귀신같이 찾아내던 백수룡이었다.
“명일오, 제갈소영, 곽두용 선생. 나 좀 도와줘.”
백수룡의 부름에, 신입 강사 동기들도 함께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다.
불심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학생들은 온갖 기발한 방법을 동원했으나, 그 대부분의 노력은 강사들의 예리한 눈을 피하지 못했다.
“붓을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아침마다 서예를 하는 것이 습관이라서…….”
“좋은 습관이네. 붓 안에 숨겨 둔 연초도 아침마다 같이 피우고?”
“……죄송합니다!”
붓대 속에 숨겨 둔 연초가 속속들이 발견되었고.
“이중으로 설계된 찬합이네요. 밑바닥에 공간이 있는데, 술을 숨겨온 건가요?”
“하필 제갈소영 선생님한테 걸리다니…….”
찬합까지 특별 제작해서 숨겨온 술은 기관진식의 대가인 제갈세가의 딸 앞에서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너희들 신발 벗어 봐. 아까 경공 펼칠 때 평소랑 달랐어.”
“아 진짜 한 번만 봐주세요!”
신발 밑창이나 요대에 골패를 숨겨온 노름꾼들은 세상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간혹 압수하기에는 애매한 물건이 발견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소소. 이 그림들…… 춘화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건전한 취미활동을 그런 저급한 서적으로 매도하시다니요!”
“아니, 하지만 너무 헐벗고 있는데? 그리고 이거 누가 봐도 백수룡…….”
“곽두용 선생님. 지금까지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올 정도로 깨끗하게 살아오셨나 봐요?”
“그, 그건…….”
당가의 암기처럼 섬뜩하게 빛나는 당소소의 눈빛에 곽두용이 쩔쩔매자, 멀리서 보고 있던 백수룡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소소. 곽두용 괴롭히지 말고 그거 이리 가져와. 돌아가는 날까지 압수다.”
“너무해요…….”
당소소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만 봐달라는 학생들의 애원과 원성이 사방에 가득했다.
물론 백수룡은 코웃음을 치며 부적격 소지품을 가져온 학생들의 이마에 혹을 하나씩 만들어 줄 뿐이었다.
“시끄럽다. 금지 물품은 전부 몰수야. 자신 있으면 다시 훔쳐 가 보든가.”
우우우우-!
절세고수의 횡포다!
백수룡에게 비난과 원망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청룡오망만큼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수상쩍게 느껴질 정도로 얌전한 제자들의 모습에, 백수룡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들. 뭐 숨기는 거 있지?”
“뭘요?”
헌원강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수룡을 올려보며 눈을 꿈뻑였다.
“저 술은 입에도 안 대는 거 아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진지하게 다시 무공을 배우기로 마음먹은 이후, 헌원강은 단 한 번도 술에 입을 댄 적이 없었다.
객잔에서 조별 모임을 할 때도 과실 음료만 시켜서 마실 정도였다.
“그럼 뭘 이렇게 바리바리 싸 왔어?”
백수룡은 흑룡편으로 헌원강의 짐보따리를 뒤적거렸다. 온갖 잡동사니가 보였다. 이불, 목침, 벽곡단, 비상약, 수련 도구들, 그리고 사내 녀석이 여학생이나 갖고 다닐 물건은 왜 가져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강아. 너는 여기서 조난당해도 끄떡없겠다.”
“헤헤. 쑥스럽게 뭘 그런 거 가지고…….”
“칭찬 아니야. 이 자식아.”
다른 제자들도 헌원강과 반응이 비슷했다.
거상웅은 아까부터 온화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고, 여민은 괜히 딴청을 피웠으며, 위지천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야수혁은 은호와 함께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흐음…….”
끝내 청룡오망의 짐에서 부적격 소지품을 발견하지 못한 백수룡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제자들을 바라봤지만,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은 스승만큼이나 제자들도 능구렁이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뭐, 알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백수룡은 다른 학생들의 소지품을 조사하기 위해 청룡오망을 지나쳤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소지품 검사가 모두 끝났다.
“소지품 검사는 이 정도로 하도록 하지. 다들 고생했으니 이제 숙소로 들어가서 쉬어라.”
“네!”
소지품 검사가 모두 끝난 후, 백수룡은 숙소로 향하는 제자들의 들뜬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저 녀석들…….”
어딘가에 잘 숨긴 건 분명한데, 저렇게 티를 내서야 오늘 밤에라도 급습하면 전부 들키지 않겠는가.
하지만 백수룡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곳에 가선 조금 느슨하게 풀어줘도 괜찮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에 들었던 매극렴의 조언을 떠올렸다.
사실은 청룡오망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소지품 역시, 보고도 모른 척 넘어가 준 게 적지 않았다.
제 딴에는 잘 숨겼다고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짓던 학생들의 표정에 슬쩍 웃음도 났고.
가끔은 이렇게 속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들 적당히 놀아라. 저녁에 있을 담력 시험에 영향 줄 정도면 전부 압수할 테니까.”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백수룡은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첫날 저녁 일정인 담력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는 동료 강사들과 회의를 할 예정이었다.
* * *
배정된 숙소에 도착한 학생들은 일단 짐을 던져 놓고 방부터 구경하기에 바빴다.
“방이 생각보다 넓은데?”
“안쪽 자리 내 거!”
첫날 저녁 일정인 ‘담력 시험’이 시작되는 것은 완전히 해가 지는 한 시진 후.
그전까지는 건물에서 나가지만 않으면 뭘 해도 상관없는 자유시간이었다. 강사들도 학생들이 그동안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
숙소 건물을 구경하거나, 다른 방에 놀러 가거나, 혹은 미리 약속한 친구들끼리 같은 장소에 모이는 시간.
씨익.
거상웅의 방에 모인 청룡오망이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소지품 검사를 무사히 넘겼다는 사실에 다들 고무된 표정이었다.
“후후후…….”
“흐흐흐…….”
사실 청룡오망의 능력만으로 백수룡을 속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상대는 절세고수의 기감을 지녔고, 눈치로는 천하제일인이 아닐까 싶은 인간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에게는 숨겨 둔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사형은?”
헌원강의 질문에 거상웅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천재적인 계획을 생각해 낸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면서. 그 입가에 맺힌 비열한 미소는 도저히 정파의 그것이라 할 수 없었다.
“곧 오실 거다.”
말이 씨가 된 듯, 무언가가 창문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다!”
야수혁이 달려가서 창문을 열자, 등에 봇짐을 멘 사호가 조용히 창을 넘어서 들어왔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날다람쥐처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캬앗!
유일하게 은호만이 사호를 경계하는 가운데, 청룡오망이 사호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만두 사형!”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건은……?”
쓸데없이 진지한 분위기에 사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가지고 온 봇짐을 청룡오망 앞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청룡오망의 표정이 환해졌다. 천무제에서 우승한다 해도 이보다 기뻐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역시……!”
“들키지 않고 찾아오실 줄 알았어요!”
“그하하! 거봐라! 내가 유일한 방법이랬지?”
“만두 사형은 우리의 구세주예요!”
악가의 분가에 도착하기 전에 잠시 들렀던 도시에서, 청룡오망은 사호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거상웅은 좌판에서 쓸어 담은 만두를 후배들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만두 냄새를 풍기고 돌아다니면서 사형을 찾아라. 반드시!
거상웅은 그 이유를 묻는 후배들에게 비장한 얼굴로 이렇게 설명했다.
-내 경험상, 목적지에 도착하면 소지품 검사가 있을 거다. 그때 숨기려고 하면 너무 늦어. 숨기려면 그전에 숨겨야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선생님도 빼앗지 못할 장소에…….
흩어져서 돌아다니며 덩치 큰 사람만 보이면 붙잡는 광경에,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던 사호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청룡오망은 그에게 엄청난 양의 만두를 뇌물로 건넸다.
-사형.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
-수학여행에 계속 따라오실 거면, 저희들 짐을 잠깐만 맡아 주시면 안 될까요?
거상웅이 사호에게 건넨 보따리 안에는 술과 음식, 골패 따위가 야무지게 꽉꽉 들어차 있었다.
승낙도 거절도 않고 착잡한 표정으로 청룡오망이 내민 만두와 보따리를 바라보던 사호에게, 여민의 한마디가 결정적인 한 방이 되었다.
-이거 방까지 숨겨서 가져갈 수 있으면, 선생님한테 한 방 먹이는 셈인데.
-……!
그렇게 청룡오망이 기획하고 사호가 완성한 은밀한 계획이 지금, 모두의 눈앞에서 현실이 되었다.
“흐흐. 이게 얼마 만에 마셔 보는 술이냐.”
거상웅과 야수혁은 벌써부터 향긋한 술 냄새에 콧구멍을 벌름거렸고, 여민도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가장 어린 위지천마저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여다보는 가운데, 헌원강만 고개를 저었다.
“난 안 마셔. 골패나 돌리자고.”
“자식. 은근히 이런 데서 고집이 있다니까.”
피식 웃은 거상웅은 능숙한 손길로 후배들에게 골패를 돌렸다.
도박장에는 진작 발길을 끊은 그였지만, 마지막 수학여행에서 가벼운 여흥 정도는 즐길 생각이었다.
“사형도 함께하시겠습니까?”
“…….”
골패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사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는 청룡오망이 둘러앉은 틈에 끼어 앉아 골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 이거 어디서 났어?”
“우리도 끼워 줘!”
“몇 개 더 있으니까 가져가. 대신 돌아가면서 망 좀 봐라. 이거 걸리면 바로 압수인 거 알지?”
소문이 났는지 청룡오망이 있는 방으로 찾아오는 학생들이 하나둘 늘어났지만, 다들 노느라 정신이 팔려 처음 보는 덩치 큰 친구 한 명이 늘어난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 *
가주의 거처 앞에 도착한 악연호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후우…….”
한때는 이곳에 오는 것이 소원인 적도 있었다.
악가의 일원이 되기 위해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창을 휘둘렀던 어린 시절, 가주에게 친히 성을 받을 날을 꿈꾸던 소년이었을 적에는.
‘다 옛날 일이지.’
스스로의 처지가 악씨 성을 받은 머슴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악연호는 이곳에 오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악연호입니다.”
“들어와라.”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악연호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가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산동악가의 가주가 상석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누워 있었고, 그 좌우로는 악가의 고수들이 삼엄한 기세를 내뿜으며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악연호가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도 있었다.
산동악가의 소가주 악연화.
그리고 양부 악진헌.
양부에게만 가볍게 눈인사를 한 악연호는 곧바로 가주 앞에 부복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생기가 없는 표정. 높낮이가 같은 목소리. 감정이 배제된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투.
그곳에는 평소의 악연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놀랄 정도로 가라앉은 모습의 청년이 있었다.
물론 악가주는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아는 악가의 자식들 중 연호라는 이름은 없었다.
악비는 지극히 오만한 눈으로 악연호의 정수리를 내려봤다. 인사조차 받아 주지 않고 즉각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문이 너에게 내린 임무가 무엇이냐?”
“청룡학관에 입사해 본가의 영향력을 넓히고, 뛰어난 학생들을 선별해서 미리 본가의 식객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달달 외운 듯이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에도, 악비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처음에는 그랬지. 지금은?”
악연호는 조용히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청룡신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의 약점을 알아내 보고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