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05
505화. 나 알아!
“명을 받았다?”
반문하는 악비의 목소리에 의심이 깃들었다.
그는 비스듬히 누이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형형한 안광을 쏟아내며 악연호를 지그시 바라봤다.
“마치 하기 싫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아닙니다.”
악연호는 즉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새겨진 본능과도 같은 반응이었다.
가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증명해야 하는 가치였다.
덜덜 떨리는 몸이 주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악연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저, 청룡신협의 성격이 워낙에 괴팍하고, 행동은 예측불허한 면이 있습니다. 고강한 무공뿐만 아니라 눈치도 빠르고 의심도 많아 곁을 잘 내어주지 않습니다. 때문에 약점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
“고개를 들어라.”
악연호가 고개를 든 순간, 무형의 권풍이 날아와 그의 뺨을 때렸다.
짜악!
악연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입술이 터져 피가 뚝뚝 흘렀으나,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불가능이라고 했느냐?”
“…….”
“청룡학관에서 너의 평가가 좋다고 들었다. 붙임성이 좋아 강사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 청룡신협과도 자주 어울린다지.”
“……예. 맞습니다.”
악연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역시, 가주는 그를 믿지 않았다.
청룡학관의 일을 완전히 맡겨 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따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헌데도 불가능하다?”
“…….”
악연호는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산동악가의 가주를 올려봤다. 가주는 실망스럽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고아를 거두어 먹이고, 입히고, 무공을 가르쳤다. 네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가문에서 나온 것이다.”
어려서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이야기.
소년이 청년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반복된 교육과 통제된 환경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악연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데, 사람이라면 응당 받은 은혜를 갚을 생각을 하는 것이 마땅할 터.”
헌데 너는 가문이 베푼 은혜를 모른 척하려는 것인가?
악비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그 좌우에 앉은 악가의 고수들은 삼엄한 기세를 풍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악연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가문이 제게 준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가문이 제게 준 고통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눈빛이 불온하군.”
절세고수의 직감은 무섭도록 예리했다.
악연호의 눈에서 가문의 양자가 결코 지어선 안 될 감정을 읽은 악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저벅.
악연호는 천천히 걸어오는 가주를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평소처럼 납작하게 엎드려서 알겠다고만 대답했으면 됐을 텐데, 이번에는 어째서 그러지 못했을까.
-너희 가주 말이다. 내가 흠씬 패 줄까?
-남궁세가는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그 두 사람 때문이리라.
거대하게만 보였던 가주의 그릇이 오늘따라 작아 보이는 것도, 되지도 않는 반항으로 스스로 매를 자초한 것도.
곧 시작될 처벌을 각오한 악연호가 조용히 눈을 감을 때였다.
“형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악비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제대로 무공을 익히지 못해 본래는 이 자리에 참석할 자격조차 없으며, 겨우 참석한 자리에서도 숨 쉬는 것조차 벅차 보이는 사내.
악진헌은 자신을 벌레 보듯 내려보는 가문의 주인을 향해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제 아들 녀석이 실언을 했습니다.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가 아닙니까. 제 얼굴을 보아서라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비켜라.”
악비가 옷을 툭 털자, 악진헌의 몸이 태풍에라도 휘말린 것처럼 뒤로 날아갔다.
“아버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악연호가 달려가 악진헌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부상당하거나 하진 않은 듯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면서, 똑같이 하극상을 저지르는군.”
악비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가고,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리에 있는 악가의 가신들이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었다.
“너희를 일벌백계로 다스려 가문의 기강을 바로잡겠다.”
자리에 놓여 있던 창이 스스로 날아와 주인의 손에 들렸다. 악연호는 서둘러 양부를 자신의 등 뒤로 오게 했다.
“가문에서 준 것을 다시 거두어가는 것이니, 원망할 것도 없겠지.”
“어떻게……!”
창왕이라 불리는 절세무인의 창끝에 와류가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짓 한 번이면 거처가 통째로 날아갈 터였다.
“아버님.”
절묘한 순간이었다. 나지막한 한마디에 악비가 출수를 멈췄고, 악연호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가주를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소가주 악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룡신협은 절세고수입니다. 이 자리에서 악연호를 처벌한다면, 그가 본가를 적대시할까 우려됩니다.”
“가문의 일이다. 청룡신협이 끼어들 자격은 어디에도 없다.”
악비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으나, 이어진 소가주의 반박에는 그 역시 표정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도 보셨겠지만, 가문의 일이라고 그냥 넘어갈 성정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본가와 충돌하게 될 겁니다.”
“……그자가 두려우니 하극상을 두고 보란 말이더냐?”
“처벌은 나중으로 미루어도 됩니다. 하지만 이처럼 사소한 일로 본가가 준비한 행사에 차질을 빚게 된다면, 그것이 더 큰 손해가 아닐지요.”
악연화는 한 번만 더 숙고해 달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시 후계자의 표정을 살피던 악비는 결국 창끝을 아래로 내렸다.
“소가주의 말이 옳다. 본가가 준비한 행사에 비하면 이는 사소한 일이지.”
다시 고개를 돌린 악비는 섬뜩한 눈빛으로 악연호를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답할 기회를 주겠다. 대답 여하에 따라 너와 네 애비의 처벌이 바뀔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악연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자신만 있는 게 아니었다.
등 뒤에서 악진헌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것이 느껴졌다.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그가 십존의 기백을 견디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둘러 이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반드시 청룡신협의 약점을 알아 오겠습니다.”
“더 이상 나를 실망시켜선 안 될 것이다.”
“예!”
“물러가라.”
가주에게 포권을 취한 악연호는 몸을 돌려 소가주인 악연화에게도 포권을 취했다.
“……소가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물러가도록.”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찰나에 많은 감정이 오갔으나, 그건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것이었다. 악비조차 그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가주전에서 물러난 악연호는 다리를 절뚝이는 악진헌을 등에 업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몸이었다.
“……연호야.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악연호는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록 산동악가는 그를 받아 주지 않았지만, 악진헌은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 준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견디는 게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후우…….”
비로소 숨이 조금 트이는지, 악진헌은 아들의 등에 업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악연호는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나온 김에 잠시 걸을까요?”
“그래. 그러자꾸나.”
* * *
“연호 녀석. 늦네.”
백수룡은 밤이 늦도록 숙소로 돌아오지 않는 악연호가 신경 쓰인다는 듯 문밖을 힐긋거렸다.
한 손에는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술병을 들고 홀짝이고 있었는데, 침상에 반쯤 누워서 담력 시험 계획서를 슥슥 넘기는 모습은 한량이 따로 없었다.
때마침 남궁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 술 냄새가 진동하는군.”
남궁수는 눈에 띄지 않는 흑의무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는데, 백수룡은 저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어둠 속에서도 저 금안만큼은 번쩍거릴 테니 말이다.
마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남궁수가 말했다.
“담력 시험 중에는 계속 가면을 쓰고 있을 예정이다.”
“맞다. 그러기로 했었지.”
“연호는?”
“……거 적응 안 되네. 아직 안 돌아왔어.”
악연호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에, 남궁수의 미간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군. 중요한 한 자리가 비게 되는데…….”
백수룡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연호 역할은 내가 대신할게. 혹시나 싶어서 위치도 전부 확인해 놨거든.”
잠시 고민하던 남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연호가 아닌 백수룡이 참가한다면 구상했던 것과는 그림이 조금 달라지겠지만, 마땅히 다른 대안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너무 날뛰지는 말도록.”
“딱 평소의 연호만큼만 해 주지.”
두 사람이 함께 밖으로 나오자, 도열한 학생들이 보였다. 숙소에서 짧은 자유시간을 보낸 후에 시간에 맞춰 나온 것이었다.
인솔 강사인 남궁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금부터 담력 시험 및 야간 산행 수련을 실시할 것이다. 다들 저쪽을 보도록.”
남궁수가 손을 들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저기 빛이 반짝이는 봉우리에 관주님께서 대기하고 계신다. 이인 일조 혹은 삼인 일조를 이뤄 관주님을 뵙고 돌아오면, 담력 시험은 종료된다.”
여기서 끝이면 ‘담력 시험’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늦은 밤의 산행이라고 해도, 무공을 익힌 소년·소녀들에게는 그리 큰 위험이 아니었으니까.
“단, 너희가 봉우리까지 가는 동안 강사들이 여러 가지 위기상황에 처하게 만들 것이다. 순발력, 위기 대처 능력, 협동력 등, 교우활동평가 점수에도 포함될 테니 진지하게 임하도록.”
남궁수의 건조한 설명에도 학생들은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야밤에 산속에서 귀신 분장을 한 선생님들과 술래잡기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 와중에 교우활동평가 점수 같은 것에 관심을 갖는 학생은 독고준 정도였다.
“그럼 미리 소개하지. 너희들을 위기에 빠지게 할…….”
남궁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사천왕을.”
이번 담력 시험에서는, 일 학기에 가장 반응이 좋았던 실기시험 중 하나를 차용하기로 했다.
“으하하하! 본좌는 파멸명왕이다!”
오랜만에 활약할 생각에 신이 난 명일오가 호랑이 가면을 쓰고 등장했고.
“호, 혼세마녀입니다…….”
부끄러움에 어깨를 움츠린 제갈소영이 둥글둥글한 곰 가면 뒤에 얼굴을 숨기고 나타났으며.
“본좌는, 냉혈수라마왕이다.”
수치심이란 단어는 모르는 듯한 청룡학관의 일타강사가 용가면을 뒤집어쓰고 돌아섰을 땐, 청룡학관의 모든 학생이 자지러지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지존마창 역할을 맡을 악연호가 화룡점정을 장식할 예정이었으나.
오늘은 전직 혈교 교관이 그 역할을 대신하기로 했다.
“크크크크…….”
흑의장포를 펄럭이며 지붕 위에 나타난 백수룡이 목소리를 으스스하게 깔며 말했다.
“정파의 핏덩이들아. 반갑다. 본좌는 너희들을 지옥으로 끌고 갈…….”
그 누구보다 대마두 역할에 몰입한 백수룡이 자신의 무시무시한 별호를 소개하려는 순간이었다.
“나 알아!”
하필이면 늑대(狼)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바람에, 누군가의 기억을 건드리고야 만 것이다.
“저자의 별호는!”
헌원강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는 모습을 본 순간, 예지와도 같은 불길한 예감이 백수룡의 뇌리를 스쳤다.
불현듯 떠오르는 악인곡에서의 기억.
백수룡은 사천왕 역할에 몰입한 것도 잊고 본래 목소리로 외쳤다.
“너 이 자식, 그거 말하면……!”
스승과 같은 기억을 떠올린 것이 분명한 헌원강의 입에서, 주워 담을 수 없는 단어가 터져 나왔다.
“방중술과 색공의 대가! 옥면음랑이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했던지, 바로 옆에 붙은 주작학관 건물에서도 창문을 열고 힐긋거리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