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07
507화.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여자 무인과 싸울 때…… 특별히 성별에 따른 심리전을 고려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런 거 말고!”
앞섶에 묻은 물기를 털어낸 헌원강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독고준을 흘겨봤다. 조금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설마 이 자식, 다 알면서 괜히 놀리려고 이러는 거 아냐?’
하지만 독고준의 표정은 진지했다. 학생회장으로서, 그는 상담을 요청하는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그럼 무슨 의미지?”
“아니, 그, 뭐냐. 너는 여자들한테 인기 많잖아.”
독고준은 헌원강이 어울리지 않게 수줍게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심히 불편했다. 어떤 식으로든 고민을 빨리 해결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인기? 설마 남녀 간의 연심에 대한 고민이었나?”
“흠흠.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내 친구 이야기인데.”
그러자 갸우뚱하던 독고준의 고개가 조금 더 옆으로 기울어졌다.
“네 주변에 그런 고민을 하는 친구가 있다고? 아니, 같은 학년에 친구가 있어?”
“……닥치고 일단 들어 봐.”
주먹을 불끈 쥔 헌원강은 이내 한숨을 내쉬곤 ‘아는 사람 이야기’를 시작했다.
“걔가 최근에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데,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는 거야. 평생 여자랑 말이나 제대로 섞어 봤어야지. 상대도 자길 싫어하진 않는 것 같다는데, 그냥 친구로만 보는 거 같기도 하고…….”
“흐음.”
“주변에 친한 사내자식들은 다 우락부락하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라서 상담해 봤자 놀리기나 할 게 뻔하고……. 그래서 친구인 나를 통해서 너한테 물어보는 거지.”
“흐으음.”
헌원강이 보기에, 독고준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모범생에다가 가문도 좋았으니까.
절강에 위치한 독고세가는 오대세가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과거에는 남궁세가를 능가할 정도로 성세를 누렸으며 지금도 절강에서는 한 손에 꼽히는 명문가였다.
그래서 헌원강은 독고준이 당연히 연애 경험이 풍부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독고준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여학생들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몇 차례 있기는 하지.”
“재수 없는 자식…….”
한 번도 그런 역사가 없었던 헌원강은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그래서 좀 물어보려고. 여자들은 어떤 남자를 좋아하냐? 역시 무공이 더 세져야 하나? 돈도 많은 편이 좋겠지? 가문도 클수록 좋을 테고…….”
근데 아무리 커져도 궁(宮)보다 커지기는 힘든데……. 돈도 그쪽이 더 많을 거 같고……. 무공은 내가 조금 더 낫긴 한데…….
“신뢰.”
“……어?”
독고준은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친구에게 말해 주었다.
“여자들은 신뢰가 가는 사내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한결같이 자신만 바라보고, 언행이 변하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는 사내일 때 평생을 함께할 반려가 되어도 좋겠다, 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하시더군.”
“……누구 얘기야?”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다.”
독고준다운 반듯하고 고지식한 대답이었다. 거기에는 확고한 신념마저 느껴졌다.
게다가 독고준의 어머니 이야기라는 말에, 헌원강은 차마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니, 나는 너의 경험에서 비롯한 대답을 듣고 싶은 거거든?”
“내 경험? 고백은 여러 번 받아 봤지만…… 누군가와 교제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넌 진짜 상상 이상으로 재수 없는 자식이야.”
인기남 독고준의 실체를 알게 된 헌원강이 허탈함에 한숨을 쉬었다.
상담할 상대를 골라도 한참이나 잘못 고른 것이다.
차라리 목형우 선배나 조별 수업을 같이 듣는 영호식 같은 애들한테 물어볼걸.
“좋겠다. 이 인기 많고 잘난 새끼야…….”
그래도 이왕 이야기를 꺼낸 김에, 물어보려고 했던 것들은 다 물어보기로 했다.
“수학여행 때 기회를 봐서 주려고 선물을 하나 샀거든? 이거 언제 주는 게 좋을까? 마지막 날? 아니면 최대한 빨리? 그리고 뭐라고 말하면서 주냐. 좀 무심하게? 아니면 열심히 골랐다고 생색을 살짝 내면서…… 너무 없어 보이나?”
혼자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민하는 헌원강의 모습에, 독고준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친구 얘기 맞지?”
“그, 그렇지. 내 친구 이야기니까 이건. 내가 고민을 같이 해 주는 거라고.”
급히 수습한 헌원강은 고리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근데 너 이거 비밀이니까 어디 가서도 절대 말하지 마라. 소문내면 아주 뒈지는 거야. 알았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협박하는 헌원강을 보며, 독고준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헌원강. 너 빼고 모두가 다 아는 비밀인 거 같은데.’
담력시험을 출발하기 전, 독고준은 헌원강의 시선이 자꾸만 향하던 곳에 누가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백발은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법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를 보는 시선은 헌원강 한 명만이 아니었다.
‘청룡학관뿐만이 아니지. 오늘 주작학관에서도 여러 명이 힐긋거리던데.’
독고준은 친구를 슬쩍 놀려먹을 생각으로 말했다.
“그 친구. 고생 좀 하겠군. 그렇게 매력적인 여인이라면 연심을 품은 사내가 적지 않을 텐데.”
“…….”
그러나 발작할 줄 알았던 헌원강은 의외로 그런 부분에서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씨익 웃기까지 했다.
“당연하지. 누가 봐도 엄청나게 예쁘거든.”
“……저녁 먹은 게 올라오려고 한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독고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닭살이 올라온 팔뚝을 벅벅 긁으며 앞서 걸어 나갔다.
“야! 혼자 가지 말고 내 얘기 좀 마저 들어 봐 봐!”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잠시 후,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걸어가던 두 소년의 걸음이 거의 동시에 멈췄다.
그들은 똑같이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피 냄새.”
“위쪽이야.”
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이번 담력시험의 목적지, 노군상이 기다리고 있던 산봉우리 정상이었다. 피비린내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휘이이익!
둘의 신형이 수풀을 스치며 쏜살처럼 쏘아졌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좌우를 경계하며, 동시에 검과 도를 뽑아 들었다.
봉우리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피비린내는 점점 짙어졌다. 그럴수록 둘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갔다.
“설마, 설마, 설마…….”
“정신 차려 독고준!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건 없다고!”
잠시 후, 정상에 도착한 그들은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고 멈춰 섰다.
피가 잔뜩 뿌려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과 신음하는 부상자들.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부관주님! 풍진호 선생님까지…….”
그들의 곁에는 복면을 뒤집어쓴 흑의인들이 함께 쓰러져 있었는데, 격렬하게 싸움을 치른 흔적이 사방에 남겨져 있었다.
독고준이 쓰러져 있는 부관주 곽철우를 살펴보려고 가까이 다가갈 때였다.
“쿨럭!”
피를 토하는 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홱 돌아갔다. 순식간에 경공을 펼쳐 내달리자, 노군상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주변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두 소년이 노군상을 양쪽에서 부축했다.
“관주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너희로구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한 노군상이 둘을 알아보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적의 습격이다. 혈교인지, 아니면 다른 자들인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나타나서 공격을…… 쿨럭!”
“관주님!”
노군상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무복이 피로 젖어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숨은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다.
“날 좀 일으켜다오.”
노군상은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증이 심한지 그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너희들은 당장 내려가서 백수룡 선생에게 이 사실을 알리거라. 지금이라면 아직…….”
노군상의 표정이 굳음과 동시에, 수풀이 흔들리고 흑의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늦었다.”
선두에 나선 흑의인이 말했다. 성대를 긁어 변조한 목소리였다.
“오늘 이곳에서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자는 없다.”
흑의인들은 하나같이 살기가 등등한 모습이었다. 시퍼런 칼날들이 달빛을 머금고 있었고, 좁혀오는 포위망은 촘촘했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너희는 그 틈에 도망치거라.”
노군상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피로 흠뻑 젖은 장포가 무겁게 흔들렸다.
그때, 헌원강과 독고준이 노군상에게 등을 보이며 그를 지키고 섰다.
헌원강이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관주님. 저희보다 먼저 온 애들은요?”
“…….”
두 사람은 육조였다.
그들보다 앞서 출발한 조가 다섯이 있었으며, 그중에는 여민이 포함된 조도 있었다.
헌원강이 정확히 누구를 묻는지 알아챈 노군상이 힘겹게 숨을 쉬며 말했다.
“그 아이들은 간신히 도망쳤다. 하지만 놈들 중 일부가 쫓아갔으니…… 구하려면 서둘러서 가야 할 게다.”
그리고 노군상은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도록 전음을 보냈다.
[너희도 도망치거라. 아무래도 백 선생에게 가는 방향은 포위망이 두꺼우니, 반대 방향으로 가거라. 곧장 산을 내려가 가까운 무림맹 지부에 이 사실을 알리거라.]“…….”
“…….”
전음을 받는 헌원강과 독고준은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지금 그들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 노군상과 함께 흑의인들과 싸우는 것.
둘째, 저 포위망을 뚫고 백수룡에게 이곳의 상황을 알리는 것.
셋째, 포위망이 얇은 방향을 뚫고 산을 내려가, 무림맹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작게는 자신들의 운명이, 크게는 청룡학관의 운명이 바뀔 결정이었다.
“……꼭 같이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먼저 입을 연 것은 독고준이었다.
“헌원강. 너는 후배를 구하러 가라. 나는 이곳에서 관주님을 지키겠다.”
청룡학관의 학생회장은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친구를 위해 시선을 끌어주겠다고 했다.
이곳에 도착하기 바로 전까지 헌원강이 좋아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별처럼 빛내며 이야기하던 친구에게, 같이 남아서 싸우자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여민의 생사를 모르는 헌원강의 마음은 누구보다 지옥일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헌원강은 독고준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심호흡을 몇 번 크게 하더니, 떨리던 목소리와 눈동자가 평정심을 되찾았다.
“걔라면 충분히 빠져나갔을 거야. 우리 중에서 경공도 가장 뛰어나고 누구보다 똑똑하니까.”
헌원강은 흑도를 들어서 적들을 겨눴다. 그러곤 사납게 웃어 보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지원군을 왕창 데리고 돌아올 거라고.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그들을 포위한 흑의인 중 하나가 어깨를 움찔했다.
“독고준. 너야말로 도망칠래? 이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헌원강의 허세에 독고준은 피식 웃었다. 덕분에 긴장감이 많이 가셨다.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수백 년 전, 수많은 실전을 통해서 완성되었다는 독고구검의 기수식이었다. 청룡학관의 그 누구보다 난전에 어울리는 무공을 익힌 사람이 바로 그였다.
독고준이 검을 들어 적들을 겨누며 말했다.
“와라. 나는 청룡학관의 학생회장이다.”
“이 새끼들아! 나는 동연 회장이다!”
“…….”
거리를 좁혀 오는 적들을 향해, 두 소년은 전력으로 맞서기로 결정했다.
“허허…….”
피투성이가 된 노군상은 소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웃었다.
“대견하구나.”
만약 헌원강과 독고준이 그 미소를 보았다면 의아해했을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기엔, 관주님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지나치게 즐거워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