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15
515화. 마주 보는 시선들
염왕은 고민이 되는지 풍성한 수염을 쓸어내렸다.
“내 보은패를 지닌 자네에게 줄 만한 것은 없는데……. 내 손녀와 다리라도 놔 줄까?”
“할아버지!”
조부의 짓궂은 농담에 사마영이 질색을 했다.
백수룡도 영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는데, 그 이유가 분명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내년에 청룡학관에 입사하기로 해서요.”
“네? 제가 언제…….”
“기억 안 나? 청룡학관이 천무제에서 우승하면 이직하기로 했잖아.”
“하…….”
남궁세가에서 헤어질 때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사마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천무제에서, 성적이 더 낮은 쪽이 이직하는 건 어때요?
정확히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백수룡은 당연하다는 듯이 ‘청룡학관이 우승하면’으로 바꿔서 말하고 있었다. 사마영은 정정해 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클클. 사내가 그 정도 포부는 있어야지.”
염왕은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백수룡에게 내기에서 이겼을 때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물었다.
전대 십존인 염왕은 부와 명예, 뛰어난 무공과 대단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청룡신협이라 불리는 백수룡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궁금하군.’
젊은 나이에 십존이라 불릴 만큼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으며, 무림맹 총사범, 남궁세가의 은인이며, 개방의 형제라 불리는 젊은 영웅이 과연 자신에게 무엇을 원할지.
그래서 농담 삼아 말해 본 것이었다. 사마영의 미모라면 어느 사내든 흔들리고도 남을 테니까. 괘씸하게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거절할 줄은 몰랐지만.
“저희가 요청을 드리면, 청룡학관에 오셔서 오늘처럼 특강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 번은 좀 아쉽고, 세 번 정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요구에 염왕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자네도 같은 것을 건다면, 흔쾌히 승낙하지.”
“저도 좋습니다.”
이 사내는 정녕 선생이로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염왕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침 학생들이 참여할 내기이기도 하니, 그 보상으로도 적절하겠어.”
“학생들이요?”
그 말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쉬고 있던 학생들도 귀를 쫑긋 세웠다.
염왕이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내기는, 주작학관과 청룡학관이 몇 가지 종목을 선정해 대결해서 승패를 가리는 것이다.”
대결이라는 말에 학생들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상대 진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몇몇 승부욕이 강한 학생들은 벌써부터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염왕이 클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막간을 이용해서 즐기는 작은 유희이니, 딱 세 가지 종목만 선별해서 겨뤄 보는 것이 어떠한가? 먼저 두 번을 이기는 쪽이 내기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하고.”
백수룡과 염왕이 날뛴 탓에, 오전 교육 일정이 예정보다 빨리 끝나 버렸다.
때문에 점심 시간까지 시간이 비게 되었는데, 염왕은 막간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겨루어 보자고 제안했다.
정말로 간단하게 끝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말이다.
“재미있겠는데요?”
백수룡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학관과 제대로 실력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라니, 오히려 이쪽에서 제안하고 싶은 일이었다.
“종목은 어떻게 정합니까?”
“우리가 한 종목, 너희가 한 종목씩 고르고……. 남은 하나는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는 게 어떤가?”
“저는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백수룡은 청룡학관 학생들을 돌아봤다.
대부분 갑작스러운 내기에 흥미로워하고 있었으나, 백수룡이 원하는 수준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각오를 해야지.’
학생들의 의욕을 더 고취시킬 필요가 있었다.
마침 적당한 방법이 떠오른 백수룡은 씨익 웃더니, 염왕에게 물었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더 걸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오늘 하루 동안, 이 내기에서 진 학관의 학생들이 이긴 쪽에게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학년에 상관없이요. 어떻습니까?”
“뭐……?”
그 말에 염왕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듣고 있던 강사들도 눈을 크게 떴다.
물론 학생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가장 격렬했다.
“지면 저 녀석들을 선배라고 부르라고?”
“그것도 학년에 상관없이?”
“완전 싫어…….”
졌을 경우를 상상하며 질색을 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겼을 경우를 떠올리며 눈을 빛내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놀랍게도 양쪽 다 같은 분위기였다.
“저 자식들이 우리를 선배라고 부른다 이거지?”
“뭐가 문제야? 이기면 되잖아.”
“이참에 본때를 보여 주자고!”
좌우에 나누어 앉은 학생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백수룡이 의도한 대로 분위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허. 청룡학관이 우리를 해 볼 만한 상대로 여기다니……. 이것 참 격세지감이 느껴지는군.”
염왕이 허탈하게 웃더니 노군상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청룡신협이 받아들여도 네가 싫다고 하면 그만인데.”
흥미롭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군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헌데, 그 내기에 형님과 저도 포함되는 겁니까?”
“뭐? 이놈이나 저놈이나……. 오냐. 청룡학관이 이기면 내 기꺼이 네놈에게 형님이라고 불러 주마!”
노군상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첫 번째 대결 종목은 주작학관에서 먼저 선정했다.
“단 하나의 초식을 겨루어, 위력이 더 강한 쪽이 이기는 것으로 하겠네. 대표로 딱 한 명씩만 나서도록 하고.”
염왕은 정말로 이 내기를 유희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악가의 무인을 불러 두꺼운 철판을 구할 수 있냐고 물었고, 잠시 후 악가의 무인들이 두께가 한 치가 넘는 커다란 철판 두 개를 가져왔다.
예상하지 못한 대결 내용이었으나, 백수룡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혹시 학년이나 나이, 무공에 제한이 있습니까?”
“없네. 우리는 삼 학년 사마현을 내보내도록 하지.”
주작학관 측에서 사마현이 앞으로 나서자, 주작학관 진영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사마혀어어언!
그대로 자라기만 해도 훗날 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훔칠 헌앙한 청년으로 성장할 것이 분명한 소년이 홀로 등장하자, 청룡학관에서도 파파락지가 크게 동요했다.
‘무공이야 염왕의 진전을 이었으니 위력이 대단하겠지.’
극양지기를 다루는 무공은 하나같이 파괴력이 뛰어났다. 그중에서 천하제일을 다투는 염왕의 신공이라면, 필시 굉장한 한 수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백수룡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단순히 무공을 겨루는 대결이 아니기에, 생각보다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단순히 위력이 강한 쪽이라면 위지천이나 헌원강보다는 거상웅, 야수혁 중의 하나를 내보내는 게 나아.’
최근 맹호투를 익히기 시작한 흑백쌍웅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강력한 일격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백수룡이 거상웅과 야수혁 중에 누구를 내보낼지 고민할 때였다.
“선생님. 이번 대결에는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진중한 눈빛으로 다가온 독고준이 백수룡에게 출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검룡 독고준.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패는 아니지만, 청룡학관을 대표하는 후기지수임은 틀림이 없었다.
청룡오망이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을 때도 늘 학관을 지켜 온 그에게는, 선봉에 나설 자격이 있었다.
잠시 소년의 눈을 바라본 백수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회장. 가서 이기고 와라.”
“예.”
낮게 대답한 독고준이 몸을 돌려 중앙에 설치된 철판을 향해 걸어갔다.
우와아아아아!
독고주우우운!
학생회장을 향한 응원은 함성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당소소가 직접 무용동아리 문답무용을 이끌고 응원에 나섰다.
“청룡학관의 자랑이자 보물! 검룡 독고준! 힘내라! 이겨라!”
당소소의 뒤에서 문답무용의 회원들이 독고구검을 흉내 내며 단체 검무를 추었는데, 그 모습을 본 독고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부, 부회장! 날 부끄럽게 해서 지게 할 셈이야?”
“전혀 아닌데요? 회장이 이길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요?”
평소에는 잡지도 않는 검을 들고서 독고구검을 흉내 내는 당소소를 보며, 독고준은 최대한 빨리 이 대결을 끝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부끄러워서 이제 긴장도 안 되는군.”
“하하. 재미있는 학생회네요.”
사마현이 빙긋 웃으며 말을 걸자, 그 모습을 본 파파락지 회원들 중 일부가 홀린 것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청룡학관 학생회장 독고준입니다.”
“주작학관 학생회장 사마현입니다.”
독고준과 사마현.
두 학생회장은 마주 서서 포권을 취한 후, 몸을 돌려 각각 두꺼운 철판 앞에 섰다.
“후우웁……. 시작하겠습니다.”
주작학관이 제안한 대결답게, 사마현이 먼저 초식을 펼쳤다. 쥘부채를 꺼내 든 그가 춤을 추는 듯한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초식을 풀어 내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허공을 유영하는 쥘부채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불꽃이 뭉치더니, 점점 커져서 사람 머리통만 한 구가 되었다. 그 순간 허공으로 휙 떠오른 사마현이 화염구를 철판을 향해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아앙!
불꽃에 두꺼운 철판이 우그러지더니 뒤로 쿠웅!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반쯤 녹아내리다가 만 흔적이 철판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대단하네.”
백수룡이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사마영이 그 옆에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제 동생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올해 천무제에서 충분히 용봉에도 들 수 있는 실력이에요.”
비록 초식을 펼칠 시간을 제한 없이 주긴 했지만, 후기지수 수준에서 나오기 힘든 일격필살의 위력임은 백수룡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염왕이 왜 이 대결을 하자고 했는지 알겠군.’
첫 대결인 만큼 기선제압을 확실히 하겠다는 의미이리라.
우와아아아아!
승리를 확신한 주작학관 학생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반면, 상상 이상의 위력을 본 청룡학관 학생들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와 전혀 상관없이, 독고준은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독고구검이군요. 과거에는 천하제일세가라고까지 불렸던 가문이지만, 지금은 그 명성이 많이 바랜…….”
“지금은 그렇지만.”
백수룡은 기수식을 취하는 독고준의 모습을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저 녀석으로 인해 독고구검이 재평가받게 될 날이 올 거야.”
“…….”
그 순간, 독고준의 검이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 안에 깃든 막대한 힘이 주체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독고준은 그것을 붙들며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가라.”
백수룡의 목소리가 마치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독고준이 걸음을 내디디며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찰나지간 그의 검이 실제보다 수십 배는 커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쩌어어어엉!
철판을 완전히 반으로 가르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독고준이 쌓아 온 세월이 충분히 무르익지 못했으며, 또한 검기가 충분히 날카롭지 못했다.
하지만 철판을 세로로 찢어내려 중간쯤에서 멈춘 검은, 독고구검의 위력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
이번에는 청룡학관 학생들이 터질 듯한 함성을 내지를 차례였다. 반대로 주작학관이 침묵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래서 누가 이긴 건데?”
학생들 대부분은 두 사람의 승부에서 우열을 가리지 못했으나, 강사들의 표정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백수룡이 차분한 표정으로 염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첫 대결은 사마현의 승리입니다.”
“……근소한 차이였다. 독고세가의 아이, 용감하구나.”
염왕은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손바닥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독고준을 향했다.
하마터면 손목이 부러질 뻔했음에도,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나이를 떠나 무인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패배는 패배였다.
백수룡에게 다가온 독고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믿어 주셨는데 실망시켜 드려서…….”
당소소가 호들갑을 떨며 붕대를 둘둘 감아 주는 와중에도, 독고준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백수룡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다음에 이기면 된다. 진짜 무대는 천무제니까.”
“……네!”
비로소 고개를 든 독고준이 힘있게 대답했다.
패배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이어질 대결에서 주작학관의 실력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옆에 와서 깐족거리는 헌원강만 아니었다면, 계속 그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잘난 척 내보내 달라고 하더니 지고 오냐?”
“…….”
“앞으로 누가 물어보면 백호학관 학생회장이라고 해. 알았어?”
“……그만해라.”
“어? 지금 동연 회장한테 명령하는 거야? 쥐어 터지고 온 학생회장 주제에?”
“그만하라고 이 자식아!”
결국 폭발한 독고준이 헌원강에게 달려들었고, 덕분에 지나치게 진지해질 뻔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역시 쉽지는 않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백수룡은 두 번째 대결 종목을 선정했다.
“두 번째 종목은 경공 대결로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한 명씩만 내보내서 겨루도록 하죠.”
“허어.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나.”
염왕이 바라보자, 사마현이 난감한 듯 헛기침을 하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형님…….”
미간을 좁힌 노군상의 시선에, 염왕은 어깨를 으쓱하며 변명을 했다.
“같은 학생이 또 나서면 안 된다는 말은 없지 않았나? 실제로 현이가 주작학관에서 경공이 제일 빠른 학생인 걸 어쩌나?”
청룡학관 학생들과 일부 강사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백수룡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습니다. 나중에 지쳐서 졌다고 핑계만 대지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을걸세. 청룡학관에선 누굴 내보낼 건가?”
백수룡이 돌아보자, 머리를 질끈 묶은 여민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희는 이 학년 여민을 내보내겠습니다.”
경공 대결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자기 차례임을 짐작한 여민이었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풀며 백수룡에게 물었다.
“진심으로 해요?”
백수룡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줘. 네가 얼마나 빠른지.”
규칙은 대연무장을 먼저 세 바퀴 돌고 들어오는 것.
상대를 공격하거나 방해해선 안 되고, 순수하게 경공만으로 승부를 내는 방법이었다.
잠시 후, 두 학생이 정면으로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사마현의 표정이 독고준을 상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민 소저.”
“잘 부탁해.”
수줍게 말을 거는 소년에게, 여민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객잔 안에는 찬 기운이 감돌았다.
가을이라고 해도 지나칠 정도였다. 지금 막 객잔에 들어선 사내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사람들이 오가며 묵는 객잔이라면 당연히 느껴져야 할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늦었구려. 두 시진은 족히 기다린 듯한데.”
호롱불 하나 켜지지 않은 객잔 내부. 어둠 속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피처럼 붉은 장포를 두르고 있었는데, 연배에 어울리지 않게 체격이 당당하고 어둠 속에 빛나는 눈빛이 형형했다.
“앉으시오. 다 식어 버린 차도 나름 마실 만하니.”
“……이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악비는 객잔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혈향에 미간을 찌푸렸다.
객잔의 주인과 점소이가 어디로 치워졌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객잔 안에는 살아 있는 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과 귀가 많으면 소문이 새어 나가는 법이지. 이것이 본교가 오랫동안 비밀을 지켜 온 방식이라오.”
“…….”
악비는 눈앞의 노인이 결코 자신보다 하수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의 목울대가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당신이 혈마인가?”
그 순간 노인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망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에서는 살기가 뚝뚝 묻어났다.
“지존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나 따위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분께 모욕이니. 처음 한 번은 실수라 여기고 넘어가겠으나……. 두 번은 없다는 걸 명심하도록.”
“…….”
“노부는 불사마존이오. 교의 대장로 직을 맡고 있지.”
그는 과거 혈교와 무림맹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괴물이었다. 그의 불사마공은 수십 년 전에도 십존에 필적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헌데, 왜 인피면구로 얼굴을 가리셨나?”
불사마존의 질문에 악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남궁수에게 입은 상처를 가리기 위해 인피면구 일부를 얼굴에 씌운 상태였다.
“지금 내 정체를 의심하나?”
그 순간을 다시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밀었다.
그의 살기를 느낀 불사마존이 히죽 웃었다.
“뭔가 일이 있었나 보군. 청룡신협인가?”
“……해야 할 이야기나 하지.”
“클클. 그러지.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제안은…….”
어둠에 잠긴 서늘한 객잔 안에서, 불마사존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