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18
518화. 많이 변했구나
열두 살의 악연호는 눈매가 날카로운 소년이었다.
오 년에 거친 가문의 시험을 모두 통과해 악씨 성을 하사받은 소수의 아이들. 그중에서도 군계일학이라 불렸다.
-연호? 나랑 이름이 비슷하구나. 진헌 숙부님이 지어 줬니?
-아닙니다. 원래 이름입니다.
-정말? 장삼이나 춘삼이처럼 촌스러운 이름일 줄 알았는데.
-…….
-농담이야. 혹시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이름이 비슷해서 기분이 상하셨다면 제가 바꾸겠습니다.
딱딱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연호에게, 연화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얼굴은 곱상하게 생겨서 말본새가 왜 그리 퉁명스럽니?
-죄송합니다.
-이름으로 농담한 건 미안해. 네 표정이 굳어 있어서 장난친 거였는데……. 그렇다고 정색할 건 없잖아.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죄송하다고 말하면, 정말 이름을 악춘삼으로 만들어 버릴 테다.
-…….
-흥. 그건 싫은 모양이지?
열네 살의 악연화는 장난기가 많은 소녀였다.
악연호는 그런 가문의 소가주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뛰어난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했기에 소가주의 수신호위가 될 기회를 먼저 얻었다.
가문에서는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했지만, 악연호는 명령이니 따를 뿐이었다.
-하여튼 앞으로 잘 부탁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가씨.
-누님이라고 불러. 너도 이제 악가의 일원이잖아?
-……예. 누님.
그로부터 삼 년.
악연호가 악연화의 그림자이자 수신호위로 지낸 기간이었다. 성년이 되기 전이어서 정식 수신호위로 임명받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곁에는 항상 악연호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소가주의 곁을 지키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악연화가 어디를 가든 따라가고, 그녀가 무공을 수련하는 동안에 곁을 지키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늘상 주변을 경계했다.
호칭은 누님이었으나, 악연호에게 소가주는 자신이 모셔야 하는 주인이었다. 응당 그래야 한다고 배웠다.
-……누님. 제가 누님과 비무를 하면 호위에 빈틈이 생깁니다.
-하지만 또래에서 나랑 그럭저럭 합을 맞춰 볼 수 있는 사람이 너뿐인데?
-그래도…….
-잔말 말고 저번에 자세 봐 준 초식이나 펼쳐 봐. 얼마나 늘었나 보게.
곤혹스러운 상황도 여러 번 있었으나, 악연호는 본연의 업무에 늘 충실했다.
여인들이나 하는 줄 알았던 화장법과 꾸미는 법을 배운 것도 그 시기였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너희는 소가주님으로 변장해 대신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날을 위해 배워 두거라.
늦은 밤 가주의 수신호위에게 불려가 받은 교육이라 악연화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잘 꾸미고 나타난 연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을 뿐.
-연호야. 너 요즘 여자라도 만나니?
-제가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매일 누님 호위하느라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요.
-그렇지? 역시 그렇지?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
악연화는 웃음이 많은 소녀였다.
매일 그녀를 지켜보고 있으니, 악연호도 점점 웃음이 많은 소년이 되었다. 사납던 눈매가 어느새 휘어지고,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내일 저잣거리에 크게 장이 열린다던데, 주전부리 좀 쓸어 담으러 갈까?
-누님. 제가 확실하게 모시겠습니다!
숨 막히는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둘 다 정확히 알지 못할 나이였다.
그렇게 연호가 열다섯, 연화가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별다른 일이 없어도 하루하루가 충실하다고 느끼던 어느 날.
-연호야.
연화가 그를 조용히 불렀다. 창백하게 굳은 표정은 딱딱했고, 흔들리는 눈동자에서는 극심한 두려움이 엿보였다.
-……가주님을 조심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가문 내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도는 모양이야. 우리 둘과 관련된.
-소문이라니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한 것도 잠시였다.
그날.
악연호는 함께 소가주를 호위하던 수신호위들에 의해 가주 앞에 끌려갔다.
-주제도 모르는 것이 소가주와 허물없이 지낸다더군. 마치 오누이처럼, 혹은 그 이상의 관계로 보일 정도여서 아랫것들이 수군댄다고 들었다.
불쾌한 표정으로 위에서 내려보는 가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악연호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가, 가주님. 저는 그저 제 임무에 충실했을 뿐…….
공간을 격하고 날아온 장력이 악연호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산동악가의 가주는 어떤 변명도 듣지 않고 판결을 내렸다.
-우선 더러운 추문을 퍼트린 것들을 일벌백계로 다스릴 것이다.
그날 밤, 악가의 장원에서는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뒤에서 소가주와 수신호위에 대한 소문을 퍼트린 하급 무사들, 시비들이 끌려와 모두 단전이 폐해지고 근맥이 잘리는 중형에 처해졌다.
악연호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가문의 죄인들을 처벌하는 집법당에 끌려가 모진 문초를 당했으며, 소문의 진상에 관해 전부 토설하도록 협박당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악진헌이 밤낮으로 가주에게 간곡히 청을 올렸다.
‘가주님. 아니, 형님! 부디 제 아들에게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양자라고 해도 악씨 성을 받은 아이가 아닙니까? 죄가 있다면 저도 함께 받겠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후, 악연호는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집법당에서 풀려났다.
-지독한 놈…….
끝내 소문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소년에게, 집법당의 당주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주께서 너를 수신호위 후보에서 제외하였다. 다신 소가주님 근처에 얼씬할 생각도 말고 돌아가서 근신하도록!
-……명에 따르겠습니다.
악연호가 연화를 다시 본 것은 그로부터 삼 년 후, 그녀의 성대한 스무 살 생일잔치에서였다.
가주의 분노가 가라앉고,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소년을 뇌리에서 완전히 잊었을 무렵. 겨우 허락받을 수 있었다.
‘무탈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멀리서나마 한때 사모했던 여인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도록.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 * *
“……조심하라고 하셨습니까?”
악연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심하라니, 우스운 이야기였다.
악가에 들어와 단 한 순간도 조심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그래.”
악연화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더 이상 다도에 재주가 없던 말괄량이는 없었다. 찻잔을 드는 손짓 하나에도 명문가의 후계자에게 어울리는 법도가 느껴졌다.
그러나 악연호의 시선은 놓치지 않았다. 명경지수처럼 고요해야 할 찻잔에 파문이 번지고 있는 것을. 마치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듯이.
“아버님께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을 벌일 계획이신 것 같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니요?”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내게도 감추는 게 많으신 분이니…….”
악연화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소가주임에도 제대로 된 실권을 가지지 못한 스스로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분명한 것은 곧 일이 벌어질 거란 것이다. 경험상 그래. 가주의 측근들 중 일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곧 무슨 일이든 벌어질 거다. 아마도 아버님이 돌아오셨을 때일 확률이 높겠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도망쳐라.”
“……뭐라고요?”
황당함을 넘어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악연호에게, 악연화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라도 도망치라는 말이다. 지금 당장.”
“지금 무슨 말을…….”
휘익!
악연화가 벼락처럼 손을 뻗었다.
급습으로 악연호의 마혈을 점해 움직이지 못하게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악연호도 마주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치열하게 부딪쳤다.
파바바박!
두 사람의 금나수 대결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대의 손목을 붙든 악연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한 탓이었다.
“더 하시겠다면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강해졌구나.”
“놀고 있지만은 않았으니까요.”
결국 악연화가 다시 뒤로 물러섰다. 상황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서인지, 그녀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이게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다. 아버님께서 무얼 생각하시는지는 몰라도, 너 혼자라면 몰래 빠져나갈 수 있어.”
“그래서 강제로 점혈해서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었습니까?”
“……넌 고집이 세니까.”
악연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기습하기 직전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고 반응한 자신이나, 고집이 센 걸 알고 강제로 점혈해 내보낼 생각을 한 악연화나, 옛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부탁이다. 조용히 도망쳐서 먼 곳으로 떠나. 여기 여비와 지도를 챙겼으니…….”
전낭마저 건네며 자신을 위험한 곳에서 내보내려는 악연화의 간절한 표정에, 악연호는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누님. 기억하세요?”
“무엇을?”
“저희에 관한 소문으로 가문이 완전히 뒤집혔을 때, 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요.”
“…….”
가문을 이을 소가주와 양자의 추문.
집법당에 끌려가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악연호는 끝까지 침묵했다. 어떤 모진 문초도 소년의 입을 열지 못했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자신뿐만 아니라 양부인 악진헌은 물론이고, 누구보다 악연화가 큰 해를 입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요.”
“……어째서?”
그들은 더 이상 십대 소년과 소녀가 아니며, 둘의 처지만을 생각할 수 없는 어른이니까.
과거에 사모했던 여인이라 해도 지금은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지금 악연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건 그녀가 아니었다.
악연호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학생들을 두고 혼자 도망칠 순 없어요. 저는 지금 악가의 수신호위가 아닌 청룡학관 강사니까요.”
“너, 지금 그 말은…….”
“가문에 대한 배신이죠. 하지만.”
악연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경계를 늦추지 않고 천천히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설령 악씨 성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상관없어요. 산동악가의 가주가 청룡학관을 해치려 든다면, 제가 막을 겁니다.”
“…….”
드르륵.
악연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악연화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사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넌…….”
악연화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악연호가 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아직도 결의를 다진 그의 표정이 선명했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오늘따라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방 안에 혼잣말이 울려 퍼졌다. 묘하게 홀가분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 *
“어디 갔다 왔냐?”
백수룡이 돌아온 악연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맞은 곳은 없었다.
“옛 정인이 잠깐 불러서 만나고 왔어요.”
“……옛 정인?”
백수룡이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악연호가 큭큭 웃었다.
“농담이에요. 그나저나 깃발 뺏기는 어떻게 됐어요?”
백수룡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난장판이 된 숙소를 가리켰다.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남겨져 있었지만,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속했다간 숙소가 다 부서지게 생겨서 도중에 중단시켰다. 다들 꼬리에 불붙은 멧돼지처럼 얼마나 날뛰던지…….”
질린다는 듯 백수룡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악연호가 안 봐도 훤하다며 맞장구를 쳤다.
“하여간 말썽꾸러기들이라니까요. 설마 주작학관이랑 저렇게까지 치고받을 줄은…….”
“뭐,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것보다야 낫지.”
백수룡은 딱히 너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라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이어진 악연호의 말에, 백수룡의 표정이 굳었다.
“형님. 백룡장에 빈방 많다고 했죠?”
“……그랬지. 무슨 일인데?”
주위를 둘러본 악연호는 듣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악비가 뭔가 위험한 짓을 꾸미는 모양이에요.”
“……확실한 정보야?”
“소가주에게 들은 내용이니까 확실해요. 하지만 소가주도 정확한 내용까지는 모르고 있었어요.”
악연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십 년 넘게 그를 지배한 산동악가의 가주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악연화에게 들은 이야기를 백수룡에게 그대로 전하며, 악연호는 처음으로 자신의 가문에 반기를 들었다.
“형님. 그 작자가 허튼수작을 부리려고 들면, 아예 반쯤 죽여 버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