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23
523화. 기꺼이 동참해 줄
불사마존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적진을 응시하다가 혀를 찼다.
“쯧.”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분을 일으킬 것 같았던 악가의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좁은 입구에 세워진 정문의 담벼락 위로 올라가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모습들. 그들의 서슬 퍼런 창날이 기세등등했다.
“절름발이 하나가 일을 어렵게 만드는군.”
불사마존은 악가의 무인들에게 호통치던 악진헌의 모습을 떠올렸다. 범인을 아득히 초월한 고수의 감각은 먼 곳에서도 적진을 살필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무공으로는 교의 하급 무사만도 못한 하찮은 자가 분위기를 바꿔 놓을 줄이야.
“저대로 둘 거요? 놈들이 더 대비하기 전에 치는 게 낫지 않나?”
“가장 먼저 죽겠다고 지껄이던 중늙은이는 내가 직접 목을 잘라 주지.”
“쳐들어가서 싸그리 죽여 버리자고!”
강제로 끌려온 명부삼괴가 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며 적진을 노려봤다. 그들의 전신에서 흉흉한 살기가 흘렀다.
명부삼괴는 이번 일만 끝나면 고독을 빼내 주겠다던 불사마존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의욕이 가득해 보이는 것은, 지금껏 쌓인 울분을 살육으로 해소하고 싶기 때문인 듯했다.
불사마존은 그들을 키우는 사냥개처럼 살살 달랬다.
“클클. 기다리거라. 청룡신협은 결국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으니.”
적들이 경계태세를 강화함에도 불사마존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명부삼괴 중 칼을 쓰는 일괴가 이죽거렸다.
“육시랄. 그러다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면 잡을 방법이나 있나?”
일괴의 시선이 악가의 분가를 천혜의 요새로 만드는 삼면의 절벽으로 향했다.
깎아지른 절벽이긴 하지만, 절세고수라면 충분히 절벽을 타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닭 쫓던 개가 될 것이다.
“누구든 상황이 불리해지면 자기 안위부터 도모하기 마련이야. 십존은 뭐 다를 줄 알아? 창왕이 했던 짓만 봐도 알 텐데.”
일괴의 말에 이괴와 삼괴도 킬킬 웃으며 이죽거렸다.
“청룡신협이라는 놈. 아주 영악하다며? 그런 놈이 순순히 잡히겠어?”
“나중에 놓치고서 우리한테 쫓으라고 똥개훈련이나 시키지 마시오.”
명부삼괴는 지금껏 정파의 협객이라 불리던 자들이 동료를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꼴을 여러 차례 보았다. 그들은 청룡신협이라고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 청룡신협은 영악한 인물이지.”
불사마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청룡신협에게 당한 만큼, 그간 혈교에서도 청룡신협을 잡기 위해 많은 것을 조사했다.
혈교도들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는 악귀 같은 존재이지만, 자신의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은 끔찍하게 아끼는 성정임을 알고 있었다.
무인으로서는 거의 완성된 절세고수이지만, 그만큼 약점도 많은 인간.
혈교의 대장로인 불사마존은 과거에도 그런 자들을 여럿 포획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놈의 제자와 지인 중 태반이 저곳에 있다. 결코 혼자서는 도망치지 못할 것이야.”
“쯧쯧. 혈교의 대장로나 되는 양반께서 순진하시네. 그래 봤자 위험해지면 토낄 거라니까?”
“클클. 노부에게 다 계획이 있으니 너희는 거기까지 신경 쓸 것 없다.”
“하, 답답하네 진짜. 그러지 말고 우리 말대로…….”
“오늘따라 말이 많구나. 주제 파악이 그리 어려운가?”
불사마존이 이를 드러내며 웃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번들거리는 이빨을 본 명부삼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까지 오면서 불사마존이 식사하던 모습을 여러 차례 본 탓이었다.
“……뭐, 그냥 의견 좀 내본 거요.”
입을 다문 명부삼괴를 일별한 불사마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적진을 바라봤다.
“내분이 일어나서 스스로 전력을 줄여 주었다면 일이 한결 쉬워졌겠으나…….”
그러지 않아도 대세에 큰 영향은 없었다.
청룡신협이라면 분명 자신이 보낸 선물에 동봉된 서찰을 읽었을 것이고, 지금쯤 많은 고민과 번뇌를 하고 있을 터.
“허나 결국은 움직일 테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띤 불사마존은 청룡신협에게 말을 걸듯 중얼거렸다.
“해가 질 때까지다. 먼 길을 가려면 서두르는 게 좋을 게야.”
* * *
청룡학관과 주작학관, 악가의 수뇌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적들의 모습을 시야에 둔 채, 정문의 담벼락 위에서 대책 회의가 열렸다. 악가의 무인들이 빠르게 입구 부분을 보강해 그곳은 이제 성벽이나 다름이 없었다.
“군부 태생인 본가는 평소에도 집단전을 대비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지형 또한 아군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니, 걱정하고 있을 학생들에게 안심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은 악연화의 말에, 수뇌부는 든든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가주께서 악가의 무인들을 잘 수습해서 다행이오.”
“아닙니다. 도리어 못난 모습을 보여 위기를 자초할 뻔했습니다. 본가의 어른이신 진헌 숙부님께서 나서 주시지 않았다면, 소가주로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했을 것입니다.”
염왕의 말에 악연화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공을 악진헌에게 돌렸다.
“흠흠! 괜한 금칠은 그만하거라.”
악가의 어른으로서 자리에 참석한 악진헌이 이런 분위기가 사뭇 어색하고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자, 분위기가 심각한 와중에도 다들 흐뭇하게 웃었다.
만약 악가가 결국 백수룡을 내쫓기로 결정했다면,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 제대로 된 싸움은 해 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졌을 터.
때문에 악진헌은 이곳의 모두에게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악 대협.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내 평생 몇 번 보지 못한 무인의 기백이었소이다!”
“악가의 영웅을 만나 뵙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사방에서 칭찬과 찬사가 쏟아지자, 악진헌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커흠! 이 악모가 무림의 영웅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저 객기를 부려 본 것이지…….”
“객기라니? 혈교의 군세 앞에서 그만한 기백을 보여 준 무인은 과거에도 몇 없었네. 악 무인이야말로 스스로를 낮춰 다른 이들을 부끄럽게 하지 마시게.”
염왕의 말에 악진헌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감격이 드러났다. 자신을 ‘악 무인’이라고 불러 준 사람이 전대 십존인 염왕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가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 옆에 있는 악연호는 아버지보다 더 기쁜 얼굴로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공치사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조금 전부터 혈교의 군세를 유심히 살피던 백수룡이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내부가 잘 수습되어서 다행입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심하고 움직일 수 있겠습니다.”
“그래. 참으로 다행이지. 자네도 걱정하지 말고 적과 싸울 대비를…….”
노군상은 말을 하다 말고 백수룡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자네, 설마?”
“예. 저는 아무래도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뭐라는 게야!”
멍하니 백수룡을 바라보는 노군상과 냅다 성을 내는 염왕.
동료 강사들과 사마영 등의 표정도 심상치 않게 변했다.
청룡신협을 쫓아 내자는 악가의 무인들로부터 열심히 그를 변호했거늘, 정작 당사자가 투항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형님. 제정신이에요?!”
“안 됩니다! 놈들이 약속을 지킬 리가 없잖습니까!”
“오라버니!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백수룡은 자신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동기들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곤 다시 악연화를 바라봤다.
“사실 아까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소가주님. 그 서찰 말입니다.”
“……이것 말입니까?”
악연화가 악비의 입에 물려있던 서찰을 꺼내자 백수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찰을 받아서 그 아래 번진 낙서 같은 것을 가리켰다.
처음 악연화가 그것을 물어보았을 때는 피가 번진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체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건 핏자국이 번진 게 아니라, 누군가가 저에게 보내는 암어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악연화뿐만 아니라 수뇌부의 표정이 굳었다. 염왕은 곧바로 기막을 펼쳐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백수룡은 그 암어를 바라보며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지인 중에, 세작이 되기 위해 혈교에 투신한 분이 계십니다.”
““……!””
모두의 눈이 충격으로 부릅떠지고 입을 쩍 벌렸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 본거지를 알아내지 못한 혈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세작을 심었다고?
대부분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봤고, 일부는 이제야 알겠다며 무릎을 쳤다.
“자네가 혈교의 음모를 모조리 분쇄하고 다닌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군.”
“……예.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직 혈교의 본거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요.”
이동할 때는 항상 눈을 가리고, 내부에서도 감시의 눈이 많다고 했다. 그 와중에 목숨을 걸고 서찰을 보내 천살의 공격을 경고해 준 사람이었다.
위지열.
백수룡은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그가 보내 준 서찰이 아니었다면, 청룡학관은 살막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여기까지 간략하게 정리해 이야기하자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염왕이 침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해서, 그 암어로 뭐라고 적혀 있던가?”
백수룡은 서찰에 적힌 암어를 바닥에 다시 적으며 풀어서 해석했다.
도움 요청. 보급품과 함께 혈교의 후발대에 있음. 그곳에서 북서쪽에 위치.
과거, 위지열이 백수룡에게 서찰을 보냈을 때 사용하던 것과 같은 암어로 적힌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입니다.”
백수룡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뇌부가 온갖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후발대라니! 지금 저 병력도 감당하기 힘든데…….”
“도움을 요청한 것은 혹 적발되었다는 뜻일까요?”
“혹은 적발될 위험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그럼 그 서찰을 세작이 썼다는 말인데, 어때서 지금은 후발대에 있단 말입니까?”
“중간에 병력이 나뉘었을 수도 있지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대신 부탁했을 수도 있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싸우지들 마세요. 중요한 건 서찰의 내용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냐는 겁니다!”
혼란에 빠진 수뇌부에서 온갖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노군상이 침중한 표정으로 백수룡에게 물었다.
“함정일 가능성은?”
그는 백수룡이 반드시 위지열을 구하러 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백수룡을 아는 사람은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백수룡은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높습니다. 아니, 저는 이 서찰 자체가 함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르신은…… 자신이 위험하다고 이런 서찰을 보낼 사람이 아닙니다.”
서찰의 필체는 똑같았지만, 필체 정도야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었다.
어쩌면 위지열은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천하제일의 야장을 그리 쉽게 죽일 것 같지는 않지만, 혈교의 미친놈들이라면 자신을 끌어내기 위해 어떤 짓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서찰. 세작이 직접 쓴 건 아니겠지만, 그의 정체가 들킨 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절 끌어내려면…….”
위지열을 이곳에 데려온 것 또한 확실하리라.
얼굴이나 체형은 흉내 낼 수 있어도, 절세고수의 감각까지 속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가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즉, 혈교는 처음부터 위지열을 인질로 삼아 백수룡을 끌어낼 계획을 세우고 온 것이다.
그리고 백수룡은 기꺼이 그 계획에 동참해 줄 의향이 있었다.
“가선 안 되네.”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은 노군상이었다. 그의 소맷자락이 펄럭이고 있었다. 백수룡이 섣불리 움직이려 하면 당장이라도 손을 쓸 생각인 듯, 굳은 표정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네의 지인인 그 세작의 생명이 하찮기 때문이 아니야. 설령 나였어도 자네가 오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네.”
그 말에 백수룡의 동기들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분도 형님이 사지(死地)로 들어오는 걸 원치 않으실 거예요.”
“결과적으로 둘 다 위험해지기만 할 겁니다.”
“중요한 인질을 그렇게 쉽게 죽일 리 없어요. 차라리 싸움이 벌어지면 그때 특임대를 조직해서…….”
동기들뿐만 아니라 다른 강사들, 악연화마저도 다시 생각해 보라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 백수룡이 스스로 사지로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만류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수룡은 웃었다.
“다들 오해가 있으신데…… 제가 아까 나갔다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그 웃음은 평소에 비해 훨씬 서늘하고 어딘가 불길하기까지 했지만, 입가에 띤 미소만큼은 진심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놈들이 뭘 준비했을지, 충분히 예상하고 있으니까요.”
백수룡은 혈교가 자신을 위해 함정을 파 준 것이 오히려 기꺼웠다.
단순한 만용이나 객기가 아니었다.
그는 혈교의 전력을 알고, 네 사부의 무공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며, 역천신공을 익혔다.
혈교에서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사호뿐이며, 종적을 감춘 사호는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즉, 혈교에서는 백수룡에 대해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살아 있다면 반드시 구해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백수룡은 고개를 돌려 북서쪽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의 눈이 사납게 빛났고, 이빨을 살짝 드러낸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당장이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미소였다.
“놈들에게 진짜 함정에 빠진 게 누군지, 처절하게 깨닫도록 해 주고 오겠습니다.”
“…….”
더 이상 누구도 반대의 의견을 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