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32
532화. 재수도 없지
콰콰콰콰쾅-!
절세고수들의 싸움으로 협곡 일부가 무너졌다. 집채만 한 바위부터 돌 부스러기까지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며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쿠구구궁……!
협곡 전역이 지진으로 들썩였다. 산 전체가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막대한 진동이었다. 해일처럼 번진 흙먼지가 시야를 온통 뿌옇게 가렸다.
“콜록! 콜록!”
“당황하지 말고 주변을 경계해라!”
“끄아악! 내 팔! 내 파아알!”
갑자기 전장을 덮친 자연재해는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흙먼지 속에서 떨어지는 파편 따위에 맞아 피를 흘리는 무인들이 속출했다.
“자리를 지키고 주변을 경계해라!”
“형제들이여! 교의 영광을 위해 투신하라!”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던 전장이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지휘관들의 목소리 대부분은 굉음에 파묻혔다.
고작해야 바로 근처의 몇 명만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방에서 고함과 비명이 들려와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아군인 줄 알고 가까이 다가가면 칼날이 불쑥 찌르고 들어왔다.
“클클……. 인세에 지옥이 도래했구나.”
불사마존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곳에는 각각 냉기와 화염을 몸에 휘감은 사도와 염왕이 하늘에서 부딪치고 있었다.
콰콰콰콰쾅!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마치 얼음과 불로 이루어진 하늘의 신장(神將)들 같았다.
제 불길 탓에 전장이 혼란스러워진 걸 본 염왕은 인기척이 없는 옆 산으로 사도를 유인해 전장에서 멀어졌다.
불사마존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작게 혀를 찼다.
“쯧. 염왕 늙은이의 실력이 내 예상을 웃도는군. 지금쯤이면 사도에게 끝장이 날 줄 알았거늘.”
“……어딜 보느냐.”
“음? 아직도 안 죽었나?”
불사마존은 그 목소리에 조금 놀란 듯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피투성이가 된 노군상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복은 갈가리 찢긴 모습이었고, 평소 단정하게 묶고 다니던 백발은 봉두난발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노군상은 두 다리로 굳건히 땅을 디뎠다. 자연스럽게 아래로 늘어뜨린 두 팔의 장심에서 은은한 백광이 어렸다.
우우우웅-!
동심원을 이루며 번져 나오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대기에 공명했다. 소림에 뿌리를 둔 노군상의 독문무공이었다.
“허, 퇴물의 명줄이 쇠심줄처럼 질기구나.”
불사마존은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조소가 맺혀 있었다.
노군상의 무공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사마공을 깨뜨리지는 못한다는 것은 벌써 몇 번이나 거듭된 싸움이 증명했다.
불사마존은 싸움의 여파로 넝마가 된 장포를 옆으로 벗어던지고 노군상에게 걸어갔다. 완전히 하수를 대하듯 뒷짐을 진 채였다.
“천수관음(千手觀音). 퇴물이 다 되었다고 들었거늘, 생각보다 제법 잘 싸우더구나.”
“……늙었어도 혈교의 마귀 하나쯤 때려죽일 정도의 힘은 남아 있지.”
“클클. 본교가 마귀라고 부르던 자가 그리 말해 주니 감회가 새롭군.”
그들은 오래된 악연이었다.
과거에도 몇 차례 부딪친 적이 있었으나, 매번 서로의 명줄을 끊지 못하고 한쪽이 퇴각했었다.
그리고 수십 년 만에 다시 조우했다.
이번에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전장에서.
불사마존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늘로써 질긴 악연 하나를 청산하겠구나.”
“……청산은 더러움을 씻어 낸다는 말이니, 오늘 네놈의 제삿날이란 뜻이렷다.”
“클클. 아직도 입은 살아 있구나. 그래서, 그 꼴로 나를 이길 수 있단 뜻이냐?”
노군상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선 채로 열반에 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호흡이 희미해졌는데, 오히려 표정은 더욱 편안해 보였다.
스스스슷.
아래로 늘어뜨린 그의 손이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노군상에게 다가가던 불사마존이 찜찜한 기분을 느끼고 잠시 멈춰 섰다.
“……숨겨 둔 한 수가 있었던가?”
노군상의 손에 맺힌 백광이 점점 짙어졌다. 천천히 호를 그리는 손의 궤적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수십 개, 수백 개, 나중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무슨……!”
불사마존은 경악한 표정으로 노군상의 손이 점점 늘어나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것은 평생에 걸쳐 쌓아 온 무공과 명성, 집착을 내려놓은 노강호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얻은 깨달음을 갈무리해 이룬, 무(武)의 총화였다.
“천음수……?”
불사마존이 노군상의 독문무공이라 알려진 수공의 이름을 중얼거렸으나, 그 순간 눈을 반개한 노군상이 그 이름을 정정해 주었다. 그의 눈에서 정광(晶光)이 뿜어져 나왔다.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이니라.”
천개의 손이 불사마존을 덮치는 순간, 불사마존 또한 불사마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짐승처럼 포효했다. 마치 부처와 마귀의 싸움을 보는 듯했다.
콰콰콰콰콰!
그들을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기의 폭풍이 일어나 일대를 황폐화시키기 시작했다.
* * *
곳곳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천재지변으로 진영이 뒤섞이면서, 각자도생을 위해 흩어진 무인들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충돌을 일으켰다.
높이 치솟은 흙먼지는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시야는 제한된 상황. 기척과 목소리만으로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해야 했다.
“적이다! 적의 기습이다!”
“커헉! 이 멍청한……!”
우둔한 자들은 섣불리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다가 조용히 다가온 적의 칼날에 명을 달리했고, 영리한 자들은 기척을 죽이고 적을 속여넘기면서 아군을 규합했다.
하지만 모두가 결사의 각오로 항전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혼란을 틈타 전장에서 이탈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전장의 참혹함에 질린 자들, 무리에서 떨어지자 용기가 사그라진 자들은 기회를 틈타 숨거나 도망치려고 했다.
‘내가 이딴 곳에서 죽을 것 같으냐!’
풍진호는 무너진 협곡을 빠져나가기 위해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청룡학관 강사들과 함께 있을 때는 흘러가는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혈교와 싸워야 했지만, 그는 애초에 자기 보신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인간이었다.
고작 전장에서 싸우다가 죽으려고 그 많은 재산을 축적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도망치는 게 아니야. 무림맹에 알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는 거다!’
풍진호는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뒤에 남아서 싸우고 있을 강사들 중 혹시라도 훗날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는 자가 있다면 댈 핑계이기도 했다.
그는 정말로 무림맹으로 갈 생각이었다. 물론 무림맹의 증원 병력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싸움이 끝나 있겠지만, 그건 제 잘못이라기보단 불가항력인 일이 아닌가?
‘잘하면 영웅이 될 수 있을지도…….’
손톱만 한 죄책감이나마 덜어 내기 위해 풍진호는 끝없이 변명을 만들었다. 혈교의 발호를 알리기 위해, 증원 병력을 불러오기 위해, 동료들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그들의 영웅적인 최후를 전하기 위해.
-고독이 발작하면 얼마나 아픈지 잊었나 보지? 이렇게 주기적으로 생각나게 해 줘?
순간 백수룡의 섬뜩한 웃음이 떠올랐지만, 풍진호는 고개를 휘휘 저어 털어 버렸다.
‘백수룡 그자도 이미 도망쳤다.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뻔한 일이지. 죽었으면…… 그건 그거대로 좋고.’
청룡신협이니 뭐니 해도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했으리라. 그에 비하면 자신은 목숨을 걸고 혈교도들과 싸우기라도 하지 않았던가. 백수룡은 자신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휘이익!
체력과 내공을 아껴 둔 덕분에 여력은 충분했다. 풍진호는 무너진 바위를 뛰어넘고, 피어오른 흙먼지를 헤치며 나아갔다. 낯선 기척이 느껴지면 조용히 접근해서 비수를 던졌다.
“커헉!”
철퍼덕 고꾸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가 아군인지 적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지옥 같은 곳에 같은 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게 무너진 협곡의 입구를 거의 넘어간 순간, 풍진호는 한 사내와 정면으로 얼굴이 마주쳤다. 하필이면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날려 버린 상황이었다.
“…….”
“…….”
상대는 악가의 무인으로 보였다. 한 손에 창을 쥐고 있었고, 상당히 험한 싸움을 치른 듯 무복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혈교도들의 시체가 여럿 널브러져 있었다.
“……청룡학관?”
청룡학관의 강사냐고 묻는 질문.
아니, 거의 확인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잠시간 고민하던 풍진호의 눈에 순간 아주 희미한 살기가 어렸다.
‘죽이고 간다.’
행여라도 자신이 혼자서 협곡을 빠져나간 것을 알린다면 나중에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뒤탈이 없게 하려면 없애 버리고 가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맞습니다. 청룡학관 강사 풍진호입니다.”
교활한 속내와 달리, 풍진호는 겉으로 보기에는 인상 좋은 중년인이었다. 정중하게 포권을 취한 그가 자연스럽게 악가의 무인에게 다가갔다.
“흩어진 동료 강사들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악가의 무인께서는?”
“비슷하오. 헌데, 이쪽은 협곡 밖으로 나가는 방향인데…….”
“음. 길을 잘못 든 모양이군요. 협곡이 무너져 지형이 엉망이 되는 바람에 그만.”
“그렇군.”
악가의 무인은 쉽게 수긍했다. 풍진호는 거리를 조금 더 좁히며 그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함께 움직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악한 혈교의 무리가 도처에 숨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동료들을 모아 맞서야 합니다.”
“그러지.”
“제가 이곳 지형을 잘 몰라 그러는데, 대협께서 길을 좀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악가의 무인은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풍진호가 기껏 빠져나온 협곡의 안쪽을 향해서.
‘멍청한 놈!’
풍진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에게 등을 보인 악가의 무인을 향해 벼락처럼 출수했다. 그의 손에 들린 예리한 비수가 인정사정없이 상대의 뒷목을 노렸다.
푸욱!
날카로운 쇳조각이 살을 뚫고 뼈를 끊어 놓았다. 치명상이었다. 그 자리에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커헉…….”
풍진호는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창을 내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그가 자신을 찌른 상대를 올려봤다.
악가의 무인이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창을 휘두르는 모습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단순히 빠르다 정도의 수준이 아닌, 차원이 다른 일섬(一閃).
그 순간, 풍진호는 악가의 무인이라고만 생각했던 사내의 기질이 낯설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설프군. 살기 하나 제대로 못 감추면서 기습이라니.”
그리고 뒤늦게 떠올렸다. 서둘러 죽이고 떠나야 한다는 마음에, 상대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다, 당신은…….”
기골이 장대한 체격은 제쳐 두더라도, 저런 오만한 말투와 형형한 안광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 사람들 위에서 군림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위압감.
상대의 정체를 깨달은 풍진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죽었……!”
“청룡학관 강사라고 다 그놈들 같은 건 아니었군.”
싸늘한 비웃음을 지은 사내는 창을 회수했다.
털썩.
힘없이 허물어진 풍진호는 억울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생명이 빠르게 빠져나가며 그의 눈동자가 점점 혼탁해졌다.
“재수도, 없지…….”
억울함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풍진호의 시신을 뒤로하고, 사내는 다시 협곡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활화산 같은 시선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