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41
541화. 잊지 말게
염왕의 시체는 위지열이 수습했다.
“……나는 이곳에 남겠네.”
위지열은 화령신공으로 쌓은 극양의 기운을 불어넣어 염왕이 마지막 전언을 남길 수 있도록 잠시 생명을 붙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초췌했던 위지열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불사마존에게 심한 고초를 겪고, 윤회연옥진 내부에서도 심신이 크게 지친 탓이었다. 위지열은 손등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당장 천이를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네만……. 내가 함께 가 봤자 자네에게 방해만 될 테지.”
고개를 돌린 위지열의 시선이 멀리 보이는 협곡을 향했다.
쿠르르릉!
협곡 안에선 간헐적으로 뇌성벽력이 울렸고, 땅이 흔들리고 절벽이 무너지는 광경도 계속 눈에 들어왔다. 바람을 타고 온 피비린내가 이곳까지 진동했다. 직접 보지 않아도 처절한 전장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사도와 염왕은 협곡에서 상당히 먼 곳까지 날아와 생사결을 벌였다. 그들의 힘을 협곡이 감당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럼에도 협곡의 지형은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저곳에도 절세고수들과 그에 준하는 고수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탓이었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백수룡이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위지열에게 물었다. 위지열은 초췌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산짐승에게 당할 정도는 아닐세. 혈교도들은 전부 저곳으로 몰려갔을 테니 당장 위험한 일은 없을 게야. 난 괜찮으니 어서 가게.”
“……알겠습니다.”
백수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급박했다. 위지열의 말대로 그와 함께 전장에 뛰어드는 것은 위험부담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근처에 동굴이라도 찾아 숨어 계십시오. 천이와 함께 오겠습니다.”
“내 걱정은 말게. 혈교와 무림맹의 눈을 피해 수십 년간 산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억지로 미소를 띤 위지열은 염왕의 시신을 등에 업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른 탓인지, 노인의 육신은 믿기 어려울 만큼 가벼웠다.
“그런데…….”
몸을 돌린 백수룡이 경공을 펼쳐 날아가기 전, 위지열은 새벽빛에 비친 선혈 빛 장포를 조금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정말 괜찮은 게지?”
많은 것이 함축된 질문이었다.
윤회연옥진 안에서 백수룡이 보여 준 모습은 혈마의 재림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진법에서 벗어나자마자 술법사들에게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리던 순간에는, 위지열도 순간 함께 무릎을 꿇고 명령에 따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괜찮습니다.”
백수룡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때문에 위지열은 그 순간 백수룡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쾅!
진각과 동시에 백수룡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의 신형은 전장이 된 협곡을 향해 쏘아졌고, 주변 풍경이 옆으로 휙휙 지나갔다.
백수룡은 여전히 몸 안에서 꿈틀대는 역천신공의 기운을 느끼며 생각했다.
‘역천신공이 9성의 경지에 도달했다.’
윤회연옥진 안에서 혈마의 기억을 엿보며, 그의 역천신공은 한 단계 더 성장을 이루었다. 동시에 혈마의 목적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개벽…….”
윤회연옥진 안에서 이 말을 중얼거렸을 때, 백수룡은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혈마의 존재를 느꼈다. 육체의 통제권 또한 일부는 혈마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점점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구나.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너는 나를 이해할 것이다. 언젠가, 머지않은 날에.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와 함께 하늘을 열지 않겠느냐?
지금은 사라진 것인지 잠든 것인지는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놈은 언제든 다시 튀어나올 수 있었다.
‘그때는 윤회연옥진 안이라서 멋대로 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역천신공의 성취가 높아질수록, 자주 사용할수록, 혈마의 존재가 잠식해 올 것이다. 그리고 백수룡의 자아를 흔들 것이다. 백수룡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조심하는 수밖에.”
당장 혈교와의 싸움에서 역천신공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모든 마공의 천적이자, 전쟁을 끝낼 수도 있는 무기가 바로 역천신공이기에.
-이것이 역천의 운명이다.
점점 가속화되는 혈마화를 억누르느냐 혹은 감내하느냐.
백수룡은 갈림길에 있었다.
그의 결정에 따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운명까지도 크게 바뀔 터였다.
“아직은 괜찮아.”
스스로를 설득하듯 중얼거린 백수룡은 속도를 더 높였다.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부디…….”
위지열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백수룡의 뒷모습을 좇으며, 간절히 염원했다.
“자네가 누군지 잊지 말게.”
그는 백수룡이 칼날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지금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 * *
휘이이이익!
여민은 바람을 찢으며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사마현과 대결을 펼쳤을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였다.
목덜미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빙백신공에 의해 서리로 변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뒤로 얼음알갱이가 잘게 부서졌다.
여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살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는 순간이 지금이라고. 청룡학관의 선생님들 중에서도 자신을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거라고.
문제는 그녀를 뒤쫓는 상대가 어마어마한 고수라는 사실이었다.
‘주작학관주님은 괜찮을까?’
마지막에 봤을 땐 분명히 살아 있었다.
사도가 염왕에게 최후의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여민은 자신도 모르게 빙백신장을 날렸다.
큰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마저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돌려서 달아난 게 고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여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염왕 할아버지. 빨리 도망가요. 시간을 오래 끌진 못할 것 같으니까.’
힐긋 뒤를 돌아보자 혈교의 사도가 무표정한 얼굴로 쫓아오고 있었다.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안정적인 경공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도가 입을 열었다. 높낮이가 같은 무기질적인 음성에 아주 미세한 놀람이 어려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순간 이사도가 가속하며 여민의 등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동시에 여민은 몸을 홱 돌려서 쌍장으로 빙백신장을 펼쳤다.
화아아악!
새하얀 바람이 이사도의 전면으로 쏟아졌다.
그러나 이사도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여민이 펼친 빙백신장은 산들바람처럼 흩어졌다. 심한 화상으로 오른손을 거의 쓸 수 없어도, 그녀는 여전히 절세고수였다.
“너, 어디서 빙백신공을 배웠지?”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간격을 좁힌 사도에게, 여민은 몸을 팽그르르 회전시키며 초식을 쏟아 냈다. 무희의 춤을 보는 듯 아름다운 움직임에 눈보라가 휘날렸다.
이사도는 여민의 공격을 왼손만으로 쉽게 막아 냈다. 그 순간 그녀의 얼음 같은 눈매가 파르르 떨렸는데, 그건 여민의 무공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소녀의 움직임에 깃든 오의 때문이었다.
‘신월빙백무.’
옛 스승이 빙백신공을 개량하면서 그 정수를 모아 만들어 낸 빙백신공 최고의 절학.
비록 어설프고 얕지만, 분명 그것은 ‘제대로 된’ 신월빙백무였다. 처음 보자마자 느낀 이질감의 정체였다.
‘감히.’
이사도의 눈매가 사납게 변하며 손속이 빨라졌다. 순식간에 여민의 초식을 제압한 그녀가 손을 뻗어 가녀린 목을 움켜쥐었다.
“컥, 커헉! 이, 이거 놔요!”
목이 붙잡힌 여민이 창백해진 얼굴로 버둥거렸다. 이사도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만 힘을 풀고 물었다.
“그 무공. 어디서 배웠지? 빙궁 출신인가?”
겨우 숨통이 트이자 여민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거짓을 고한다면, 손가락을 하나씩 얼려서 부수겠다.”
이사도가 서슬 퍼런 협박을 했지만, 여민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치켜뜨고 마음에 담아 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구음마녀를 알아요? 아니면 은하연. 우리 엄마 이름이에요.”
“…….”
“당신도 비슷한 처지인 거죠? 어린 나이에 혈교에 납치되고, 강제로 무공을 익히고,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 했고……. 진심으로 혈교 따위를 믿어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
여민은 진심 어린 말로 이사도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사도는 아무런 대꾸 없이 투명한 눈동자로 그런 소녀를 관찰할 뿐이었다.
“혈교에서 익힌 빙백신공에는 부작용이 있다고 들었어요. 음기를 흡수하지 못하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린다거나, 혹은 주화입마에 걸려 광증이 생긴다거나……. 하지만 치료할 수 있어요.”
비로소 진심이 통한 것일까. 그 말에 얼음장 같기만 했던 이사도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고칠 방법을, 안다고?”
여민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이사도가 구음마녀나 자신의 엄마처럼 혈교에 납치된 후, 잘못된 빙백신공을 익힌 경우라고 판단했다. 그 후유증으로 혈교 편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러니 그것만 해결해 주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저랑 같이 가요. 그럼 치료할 방법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하지만 여민의 예상 중에서 맞는 것은 절반뿐이었다.
“무공 실험장에서 도망친 것의 자식이었군.”
“……네?”
북풍한설처럼 싸늘한 목소리.
여민은 그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자신의 엄마, 그리고 구음마녀와는 본질부터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싸아아아-
이사도의 몸에서 일대를 전부 얼려 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여민의 말을 들어준 것은 주절주절 떠드는 말에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설득 따위에 혹해서가 아니었다.
“빙백신공은 북해빙궁에서도 배울 수 있다.”
같은 빙백신공을 익혔음에도 여민의 몸이 추위로 덜덜덜 떨렸다. 눈썹이 새하얗게 얼어붙고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하지만 신월빙백무. 그건 불가능해. 게다가 네가 펼친 건…….”
옛 스승이 자신에게 가르친 빈 껍데기뿐인 오의가 아니었다.
부족한 부분까지도 온전하게 채워진 것.
그게 ‘감정’에서 비롯된 심상(心像)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감정이라니.
그걸 죽이는 훈련을 받아 온 이사도는 당시에 큰 혼란을 겪었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녀는 혈교의 사도에게 어울리는 감정을 자신의 신월빙백무에 채워 넣었다.
바로 원한과 증오였다.
싸아아아아아-
점점 더 강해지는 냉기에 여민의 몸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말해라. 누구에게 배웠지?”
“으으으…….”
“말해. 이대로 얼어 죽고 싶지 않으면.”
이사도의 두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엿보였다. 얼음 같은 눈동자 뒤에 감춰진 것은 누군가를 향한 지독한 원한이었다.
그러나 뼛속까지 스며드는 끔찍한 한기에도, 여민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말, 못 해…….”
“주화입마의 고통이 어떤 건지 직접 알고 싶나?”
강제로 몸에 주입된 냉기가 전신의 혈도를 헤집었다. 그 끔찍한 고통에, 여민은 버티고 버텼지만 결국 까무러쳤다.
“…….”
이사도는 의식을 잃은 여민을 투명한 눈으로 바라봤다.
정말로 죽이지는 않을 셈이었다. 새로운 연구를 위한 귀중한 표본이니.
그 대신 혈교로 데려갈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월빙백무를 누구에게 배웠는지 알아내고야 말리라.
쿵!
그 순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사도는 곧바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