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42
542화. 너만 괜찮다면
거대한 존재감이 훅 가까워진 순간, 이사도의 옷자락이 거세게 펄럭이며 신월빙백무가 펼쳐졌다.
쩌저저적……!
반경 수십 장이 하얗게 얼어붙으며 이사도의 영역으로 화했다. 염왕과의 싸움으로 부상을 당했어도 그녀의 신위는 여전했다. 단숨에 북해의 설원을 불러와 적의 기습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사도는 곧바로 경계를 풀었다. 한껏 예민해진 기감이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것과 동시에.
“사호?”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던 사호가 굳은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매섭게 치켜 올라갔던 이호의 눈매가 보일 듯 말 듯 부드러워졌다. 희미하지만 반가움마저 비치는 얼굴. 천하에서 오직 셋뿐인 친우들에게만 드러내는 방심이었다.
“갑자기 사라졌다더니 왜 여기에 있지?”
사호는 대답 대신 이사도의 손아귀에 붙잡힌 여민을 바라봤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의 의도를 오해한 이사도가 고개를 저었다.
“들어줄 필요 없어. 어차피 허공섭물로 들고 가면 그만…….”
그 순간, 사호의 손이 섬광처럼 움직여 이사도의 손목을 노렸다.
찰나지간이었다.
초근접한 간격에서 절세고수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사도는 즉시 전신에 서리로 된 호신강기를 둘렀다. 친우의 배신에 놀라기에 앞서, 절세고수의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싸아아아아-
빙백신공의 극음지기는 절정의 고수도 순식간에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만큼 지독했다.
그녀가 아직 사도라 불리기 전, 근접 박투에 자신 있어 한 혈교의 고수들이 간격을 좁혔다며 필승을 자신했다가 오히려 당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공격이 닿기도 전에 몸이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육체를 신병이기처럼 단련한 혈교의 네 번째 사도는 그 냉기를 근접 거리에서 감당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인이었다.
콰콰콰콰!
사호는 살갗에 달라붙는 얼음알갱이들을 힘으로 부숴 버리며 움직였다. 이사도의 눈이 부릅떠졌다. 손목을 제압당한 그녀가 여민을 놓치고 허점을 드러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호흡을 수십으로 나눈 것보다 짧았다.
“너……!”
조금 더 간격이 존재했다면, 혹은 오른팔이 멀쩡했다면 이렇게 맥없이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이사도는 이를 악물고 사호를 노려봤다.
“…….”
이해할 수 없었다. 수십 년간 동고동락한 친우를 공격한 배신자의 눈시울이,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붉어진 이유를.
퍼억!
복부를 후려치는 주먹에 이사도의 허리가 꺾였다. 온전하지 못한 빙백신공의 호신강기는 천하에서 가장 강맹한 주먹과 공평한 승부가 되지 못했다. 의식이 서서히 아득해졌다.
“대체, 왜…….”
이사도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힘겹게 고개를 들어 사호를 올려봤다. 사호는 묵묵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날아오는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패도적이었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절세고수임이 분명했다.
‘일호? 삼호? 아니, 이건 더…….’
까마득할 만큼 오래된 기억을 건드리는 기파였다. 그러나 이사도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
사호는 혼절한 이호를 조심스럽게 두 팔로 안아 들었다. 거의 동시에, 백수룡이 그의 등 뒤에 콰앙! 하고 내려섰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옛 스승의 목소리는 자신과 처음 만났던 날보다 훨씬 더 거칠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혼란스러운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음을.
협곡으로 향하다가 익숙한 기척들을 느끼고 급히 선회해 날아온 백수룡이었다. 그의 시야에 사호와 그에게 안긴 이호,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민이 보였다.
여민이 의식을 잃었을 뿐 무사한 것을 확인한 백수룡이 재차 물었다.
“묻지 않았느냐.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그 아이……. 이호는 왜 의식을 잃었지?”
“…….”
옛 스승의 물음에도, 사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저 의식을 잃은 친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네가 그 아이를 공격한 것이냐?”
고통스럽게 떨리는 목소리에선 분노마저 느껴졌다.
사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이사도, 아니 자신과 같은 스승 아래에서 동문수학한 이호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넷 중에서 울음이 가장 많던 소녀는 빙백신공을 익히며 눈물마저 얼음으로 만들어 버렸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은 단단한 증오와 원한으로 바뀌었고, 그것으로 미완의 신월빙백무를 완성시켰다.
쩌저적…….
그녀가 의식을 잃었어도, 신월빙백무의 잔재는 남아 있었다. 이호를 안아 든 사호의 눈썹에 새하얗게 서리가 끼고 살갗이 얼어붙었다. 사호는 그 추위를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감내했다.
“너희들은…… 서로 싸워선 안 된다.”
자신에게 감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수룡은 옛 제자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천하에 넷뿐이 아니더냐. 함께 그 시간을 견디고, 지금까지 함께 한 친우들. 그건 너희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란 의미다.”
“…….”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네가 혈교를 떠나길 바랐지만, 그 주먹이 친우들을 향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 차라리…….”
네 주먹으로 내 심장을 치는 것이 백 배는 덜 아프겠구나.
백수룡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호의 표정을 떠올렸다. 무언가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보였던 그 표정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하지만 설마 혈교를 적대하고, 다른 옛 제자들과 싸우려고 들 줄은 몰랐다.
설령 그가 천하에서 가장 든든한 원군일지언정,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 하지만 너희끼리는 그래선 안 돼. 차라리 이곳을 떠나거라. 멀리 떠나서, 내가 혈교와 악연을 매듭지을 때까지만이라도…….”
백수룡은 사호를 설득하고자 했다.
심장에 새겨졌던 혈마의 술법도 사라졌으니, 사호는 더 이상 혈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본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자 비로소 사호가 돌아서서 백수룡을 마주 봤다. 날카로운 기파가 사호의 발밑에 글씨를 새겼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사호의 품에 안긴 이호의 얼굴을 본 백수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수십 년 만이었다. 곤히 잠든 얼굴은 사호와 마찬가지로 수십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와 바닥에 새긴 글씨를 지워 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글씨가 새겨졌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친우들을 위해서입니다.
그 대답에 백수룡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고집부리지 말거라. 이런다고 그 아이들이 네 말을 들어줄 것 같으냐. 도리어 너를 배신자라며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은 너와 달라. 혈마의 술법도 그대로고, 나와 만나 본 적도 없다. 그들에게 네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는 너무도 뻔하지 않으냐!”
백수룡의 언성이 높아졌다. 흥분하자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사호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내 친우들은 내가 더 잘 압니다. 혈교로 돌아가서 친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백수룡은 잠시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과거 사호는 옛 스승에게 반항 한 번 하지 않았던 소년이었지만, 넷 중에서 가장 고집이 센 녀석이었다는 것을.
“이대로 혈교로 돌아가겠다니. 죽으러 가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 것이냐!”
“…….”
“고집부리지 말래도!”
화아아아악!
백수룡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치며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이미 붉게 물든 눈동자가 광망을 터트렸다.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혈마안이 저절로 발동했다.
역천신공이 9성에 이른 경지에서 발동된 혈마안.
모든 마공의 정점이자 마주한 상대를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요사스러운 기운이 사호를 덮쳤다.
그러나.
콰아아아앙-!
사호의 진각 한 번에 역천신공의 기운이 흩어졌다. 백수룡의 보석안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가 무슨 짓을…….”
몹시 당황한 모습이었다.
역천신공으로 사호를 억누르고 강제하려 하다니.
만약 사호의 심장에 혈마의 술법이 여전히 남겨져 있었다면…….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백수룡은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미간을 좁힌 채 그런 옛 스승을 노려보던 사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혈마가 될 생각입니까?
백수룡은 거칠게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난 그저…….”
나는 이제 혈교의 사도가 아닙니다. 설령 당신이 혈마가 되더라도, 내 행동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너…….”
혈교의 사도가 아니라는 단호한 말에, 백수룡은 울컥하고 북받치는 감정을 느꼈다.
평생 혈교 이외의 삶을 알지 못하고 살아온 사호였다. 단순히 술법이 사라졌다고 저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백룡장에 와서 경험한 것들이, 함께 한 사람들이, 고민하고 질문하고 스스로 얻은 대답들이 지금의 결론을 내렸으리라.
갑자기 어른이 된 자식을 보는 느낌이 이럴까. 백수룡은 옛 제자가 훌쩍 멀어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 넌 더 이상 혈교의 사도가 아니다. 어린아이도 아니지. 이제는 나와 술잔을 주고받을 만큼 다 큰 어른인 것을 잠시 깜빡했구나.”
백수룡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괴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비로소 굳어 있던 사호의 표정도 풀렸다. 사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린 사호가 경공을 펼치려 할 때였다.
“……사곤(謝坤).”
그 말이 가진 묘한 울림에 사호는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백수룡이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혈교와 인연을 끊겠다면, 더 이상 사도라 불릴 이유도 없겠지. 사호라는 이름도 혈교에서 부르던 숫자에 불과하고. 그러니…… 너만 괜찮다면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주고 싶구나.”
“…….”
“사곤(謝坤). 네 이름으로 지어 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답할 사(謝). 땅 곤(坤).
수천 번을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 지은 이름.
언젠가 좋은 날에 불러 보고 싶었던 그 이름을, 백수룡은 이 순간이 되어서야 용기를 내 건네주었다.
“…….”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곤.
비록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름을 입 모양으로만 몇 번 말해 보다가 기분 좋게 씨익 웃었다.
스승님은 제자들을 구하십시오. 이번에는 꼭.
“……!”
사곤은 바닥에 마지막 말을 남긴 후, 힘껏 바닥을 박찼다.
콰앙!
이사도를 안은 사곤의 신형이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백수룡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바라보다가 황망하게 웃었다.
“……끝까지 날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백수룡은 기절한 여민을 등에 업었다. 거센 기파의 충돌이 있었음에도 소녀의 몸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그의 사형이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신경 써 준 덕분이었다. 이사도가 주입한 냉기 역시 사곤이 전부 흩어 버렸다.
“조금만 참아라.”
백수룡은 새근새근 잠든 제자를 업고 경공을 펼쳤다. 곧 그의 신형이 한 줄기 섬광이 되어 협곡으로 향했다.
이제는 전쟁을 끝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