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51
551화. 성과는 있었나?
소박하게 꾸며진 내실.
오래된 물건들이 방 안의 풍경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낡은 다탁과 손때 묻은 찻주전자, 찻잔 등. 그러나 많은 세월이 닿았음에도 하나같이 깨끗이 손질된 것이, 방 주인의 검소한 성정을 짐작게 했다.
다탁을 중심으로 세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염왕 시주께서 열반에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배었다. 하얀 수염이 성성한 노승이었다. 본래 진한 황토색이었을 승복은 긴 세월을 견디며 빛이 바래 있었다.
“열반은 무슨. 사마량 그놈이 중도 아닌데 그리 높여 주실 것 없소.”
다탁에 둘러앉은 이들 중 한 사람이 비죽거렸다. 도포의 오른쪽 소매가 헐렁한 외팔의 도사로, 노승과 동년배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성질머리에 지금쯤 염라대왕과 드잡이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테지.”
퉁명스러운 말투로 고인의 흉을 보는 것과 달리, 노도장의 눈에는 쓸쓸함이 어렸다. 오랜 친우를 떠나보낸 이의 상실감이었다.
노승 또한 그 심정을 이해했기에 찻잔 속을 들여다보며 흐리게 웃었다.
“……염왕께서 홀로 사도와 맞섰다고 들었습니다.”
“미련한 놈.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만용을 부린 것이오.”
“주변에 어린 학생들이 있었다지요. 검성께서도 똑같이 행동하셨을 겁니다.”
“…….”
“…….”
두 노인은 잠시 말없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무인을 추모했다.
전대 십존으로 명성을 떨치고 시대를 풍미한 절세고수. 염왕 사마량은 그들에겐 오랜 친우이기도 했다.
검성(劍星) 진양자
불존(佛尊) 무허대사
민간에서는 구름 위의 신선이라 추앙받는 구파의 고수들 중에서도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과 무당의 최고수들.
검성은 염왕과 같은 시대를 풍미하고 은퇴한 전대 십존이었으며, 그보다 연배가 다소 낮은 불존은 여전히 십존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본신의 무위뿐만 아니라 지닌 상징성 또한 큰 무림의 거인들. 웬만한 무림명숙들도 이 자리에서는 숨도 편하게 쉬지 못할 터였다.
짧은 추모를 끝낸 두 사람은 감정의 잔재를 애써 털어냈다. 그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염왕을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혈교의 악행이 도를 넘었습니다.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습니다.”
“진작 구파가 힘을 모아야 했소. 어린 사질들에게 맡겨 놓았더니 어찌 이리도 굼뜨게 움직이는지……. 평화가 오래되니 배에 기름이 낀 게지.”
“저 역시 방장에게 따끔하게 훈계를 하였습니다. 회초리를 들까 하였으나, 그 아이도 이제 예순에 가까운 나이인지라.”
“과연 불존은 인내심이 대단하구려. 나는 남들 모르게 장문인을 몇 대 쥐어박고 왔소이다.”
“아미타불…….”
소림 방장과 무당의 장문인을 어린아이 대하듯 칭한다. 무림에서 두 사람의 배분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 주는 방증이었다.
“화산, 종남, 청성, 점창, 곤륜, 공동에 있는 말코 친우 놈들에게 연통을 넣었소. 아무리 엉덩이 무거운 도사 놈들이라도 자기네 사조들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면 조만간 움직일 터.”
“아미파에는 본문의 사대금강을 보내 방장 사태의 대답을 들어오라고 일러 두었습니다.”
“개방이야 알아서 올 것이고. 곧 구파일방이 전부 모이겠구려.”
“오십 년 만입니다. 혈교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로는 처음이니…….”
두 사람의 입에서 정파무림을 대표하는 구파일방을 집결시키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다른 누가 했다면 황당무계한 소리로 치부했겠지만, 그들의 대화는 방 안의 분위기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다탁에 둘러앉은 사람은 셋이었다.
대화를 주고받던 두 노인은 아까부터 말이 없는 한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관주께서는 어찌 아무런 말씀도 없으십니까?”
불존의 물음에,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서늘한 눈매의 중년인이었다.
“두 분을 중심으로 구파일방의 의견이 하나로 모였는데, 제 생각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그저 조용히 선배님들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겸손인지 일침인지 모르겠군. 어찌 이런 중대사를 우리끼리만 결정하겠나.”
검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중년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어딘가 영 마뜩잖은 듯 보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내 같으니.’
만병제(萬兵帝) 진량.
무림십존의 일인이자, 천무학관주로 취임한 후 지난 십오 년간 그 위치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천하제일학관으로 공고하게 다져 놓은 인물.
과거 천무학관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등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교류하기 위한 기관에 가까웠다. 그들이 사문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있으리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량이 천무학관주로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변했다. 그는 각 문파에서 모인 뛰어난 후기지수들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단순한 친목 도모를 넘어 무공 또한 진보해 왔으니, 뛰어난 후기지수가 모이는 건 당연했다. 절세의 무공과 인망을 모두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침이라니요? 감히 제가 두 분께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진량은 점잖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검성의 찌푸린 미간은 여전히 펴질 줄 몰랐다.
“구파일방의 젊은 무인들 대부분이 자네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음을 알고 있네. 허니 스스로를 낮추지 마시게. 과례는 비례라 했으니.”
“허허. 검성께서 하신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젊은 무인들에게야 우리보다 관주님의 영향력이 크지 않겠습니까?”
불존이 대화에 끼어들며 다소 날 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천무학관주의 명성은 검성과 불존이라는 전설적인 무인들과 비교해도 그다지 부족하지 않았다.
구파일방의 장문 제자들, 오대세가의 후계자들 전부가 천무학관주에게 무공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젊은 무인들에게 있어서 천무학관주의 영향력이 지대한 이유였다.
혹여나 천무학관주가 구파와 뜻을 함께하지 않거나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면,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저 또한 대의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혈교의 발호를 막는 데 천무학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독려할 터이니, 두 분은 염려를 놓으십시오.”
“흠흠. 그렇다면야…….”
“아미타불.”
비로소 두 노인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혹여라도 천무학관주가 어깃장을 놓았으면 여러모로 곤란해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맹주는 악가에 남은 혈교의 흔적을 조사하느라 바빠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소이다.”
서로의 의중을 확인한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황상을 곁에서 보필해야 하는 천검을 제외하고, 연통이 가능한 십존에게 전부 서찰을 보냈습니다.”
불존의 말이었다.
현 무림십존 중 가장 높은 배분을 가지고 있는 그는 십존을 한자리에 모으겠다는 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흑사련주와 추혼궁귀에게도 서찰을 보내셨소?”
“예. 맹주께서 적극적으로 그리하자고 하시더군요. 천무제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달라는 명분으로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허! 정말로 온다면 초유의 일이겠군.”
“대사님. 이번에 창왕을 베었다는 남궁세가의 셋째에게도 초대장을 보내셨는지요?”
“뇌신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청룡학관에 있다고 들어, 청룡신협에게 서찰을 보낼 때 함께 보냈습니다.”
“호오. 관주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시는군. 그러고 보니 그 청년도 천무학관 졸업생이었나?”
“예. 학관에 다니던 시절에도 비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말 몇 마디로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거인들의 대화였다. 언급되는 별호마다 가벼운 자가 없었다.
어느 정도 중요한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검성이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찌 되었건, 올해 천무제는 예년처럼 즐거운 행사로 끝나지는 않겠군.”
그 말대로였다. 올해 천무제는 더 이상 정파무림을 이끌 후기지수들이 실력을 선보이는 축제라고 부를 수 없었다.
정파무림이 혈교 토벌을 선언하는 선전포고의 장이 될 것이다. 천무제는 그 상징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천무제 일정은 그대로 진행할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양보해 드릴 수 없습니다.”
천무학관주의 단호한 말에 검성과 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천무제가 끝난 후에 혈교 토벌을 선언하는 것이 모양새도 더 보기가 좋을 테니.”
“관주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보란 듯이 천무제를 성대하게 열어 정파무림의 힘과 세력이 건재함을 천하에 증명할 것이다. 혼란을 틈타 세작이 들어올 여지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 역시 철저히 할 계획이었다.
“……헌데, 예년처럼 오대학관이 전부 모일 수 있겠나?”
악가에서의 일로 청룡학관과 주작학관이 많은 피를 흘렸다.
천무제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해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
검성의 걱정이 담긴 물음에, 천무학관주는 염려할 것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학관과 청룡학관에 부담을 가지지 말라는 내용의 서찰을 보내 두었습니다. 그들에겐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것입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오대학관이 전부 모이지 않으면 천무제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걸세.”
“음.”
천무학관주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다소 아쉽기는 하겠지만, 일부 학관이 참석하지 않아도 천무제가 지닌 의미는 변하지 않습니다.”
“허…….”
다른 학관이 참석하든 하지 않든, 어차피 모든 이목은 천무학관에 집중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일견 오만해 보일 정도의 자신감이었으나 실제로 결과가 그러했으니, 검성은 더 이상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존은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허허. 그러고 보니 주작학관에 검성의 제자가 있지요?”
“제자는 무슨. 심심풀이로 속가 아이에게 몇 수 가르쳤을 뿐이오.”
검성은 손을 휘휘 저었다. 말년에 얻은 제자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천무학관주에게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두고 봐라, 이놈아. 소하가 네놈 제자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것이다.’
천무학관에는 무당의 본산제자도 있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검성이었다. 그가 해가 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이만 일어납시다.”
짧지 않은 회동이 끝난 후,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성과 불존은 구파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앞으로 동분서주하게 될 터였다. 천무학관주 역시 얼마 남지 않은 천무제를 준비하기 위해 바빠질 것이다.
“아미타불. 살펴 가시길.”
불존의 배웅을 받은 검성과 천무학관주는 소림사의 초입에서 헤어졌다. 검성이 힐긋 천무학관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청룡학관에 십존인 강사가 둘이나 생겼는데, 올해도 천무학관의 우승을 자신할 수 있겠나?”
“강사의 수준만 높다고 학관의 수준이 갑자기 오르지는 않습니다. 학생들이 가진 그릇, 열의, 노력이 더 중요하지요.”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로군. 내 흥미롭게 지켜보겠네.”
“살펴 가십시오.”
검성마저 경공을 펼쳐 훌쩍 떠나고, 비로소 혼자가 된 천무학관주 진량은 잠시 걸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남긴 표식을 따라서.
붉게 노을 진 산길의 초입에 흑립을 쓴 사내가 서 있었다. 흑립 아래로 드러난 입가에 지렁이 같은 흉터가 지나가고 있었다.
“관주님.”
분명 존칭인데도 공경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 객잔의 점소이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듯했다.
무림십존이자 천무학관주를 상대로 저렇게 대할 수 있는 자는 천하를 뒤져도 몇 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천무학관의 강사들 중에서는 눈앞의 그가 유일했다.
하지만 천무학관주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만한 자격과 실력이 있는 인물에게 그는 관대한 사람이었다.
“천무결 선생. 출장이 오래도 걸렸군. 성과는 있었나?”
천무결이 흑립을 벗자 가려져 있던 강인한 인상이 드러났다. 그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자 입술의 흉터가 꿈틀거렸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습니다.”
성의 없는 대답이었으나 천무학관주의 눈에는 흥미가 어렸다. 저 사내에게서 저만큼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었다.
설마.
“……혹시 혈마의 흔적을 찾았나?”
“아마도.”
이젠 아예 반말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천무학관주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맺혔다.
성큼성큼 천무결에게 다가온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라. 정말 혈마의 흔적을 찾았느냐? 어디에서? 무공을 펼치는 것을 직접 보았나?”
그 눈에는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광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짙어진 노을빛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잠시간 붉게 물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