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60
560화. 그리고 오늘
백수룡은 낭패한 기색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초일에게 걸어가며 생각했다.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질 않는군.’
처음부터 그는 초일을 주시하고 있었다.
놈이 혈교의 세작이라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얌전히 돌아갈 리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일은 관주실에서 나오자마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해 은신술을 펼쳤다.
모르고 지나쳤다면, 학관의 주요 시설에 침투하거나 누군가를 해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 말이 없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말이야.”
백수룡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그 모습을 본 초일이 표정을 굳히더니 급히 포권을 취했다.
“천무학관의 초일이 청룡신협을 뵙습니다. 부디 제게 오해를 풀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예의 바른 말투와 절도 있는 몸가짐이 정파 후기지수의 모범과도 같았다. 흔히 위선자가 풍기는 썩은 내가 물씬 난다는 의미였다.
“오해라…….”
자리에 멈춰선 백수룡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이미 초일이 매극렴과 나누었을 대화까지 짐작하고 있었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다.
‘청룡학관이 입은 피해 정도를 확인하고, 기회를 봐서 뭔가 수작을 부릴 생각이었겠지.’
지금도 조심스럽게 자신을 훑는 초일의 시선에서,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가늠하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어디 한번 장단을 맞춰 줘 볼까.
“내가 무슨 오해를 했을까?”
백수룡이 변명할 기회를 주자 초일은 과장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청룡학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외부인이 와서 꾸며진 모습이 아닌, 실제로 청룡학관 학생들이 어떻게 수련하고 공부하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정말 부끄럽다는 듯 얼굴이 빨개진 초일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천무학관에서도 지나친 호기심 때문에 혼난 적이 여러 번 있었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면서.
“천무학관주가 시킨 건 아니고?”
백수룡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슬쩍 떠보자, 초일은 절대로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맹세코 저 혼자서 한 행동입니다! 아무리 청룡학관이 올해 천무제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라곤 하지만, 저희 관주님께서 청룡학관을 염탐하라고 시키실 분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청룡학관의 위상을 자연스럽게 높인다.
백수룡은 초일이 혈교의 세작 훈련을 제법 잘 받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래 봤자 그 세작 훈련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같잖아 보일 뿐이었지만.
“호기심이 굉장히 많은 학생이었군.”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평소 존경했던 절세무인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부하는 솜씨는 영 별로네.”
“……예?”
백수룡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긴장한 초일이 침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나를 존경한다고?”
“청룡신협께서 저 간악한 혈교를 상대로 보여 주신 무용(武勇)과 희생은 저 같은 학생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언젠가는 꼭 직접 만나 뵙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말하는 내용에 따라 표정이 휙휙 바뀌는 것이, 경극 배우를 했으면 제법 잘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백수룡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촌극이나 다름없었다.
‘제 발로 기어들어 온 놈을 그냥 보내 줄 순 없지.’
방법이 문제였다. 세작 교육을 받았을 테니 웬만한 고문은 통하지 않을 것이고, 혈교의 대법 등을 통해 금제가 걸려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백수룡에겐 그 모든 것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혈마안을 사용한다면 아는 것을 전부 토해내게 만들 수 있으리라.
하지만…… 혈마안은 더 이상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언제 또 혈마가 몸을 빼앗으려고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역천신공을 사용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둬야 했다.
물론 방법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백수룡은 초일에게 말을 걸며 그의 표정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애초에 상대를 관찰해서 속내를 파악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으니까.
곧 상대가 무엇을 고민 중인지 깨달은 백수룡은 실소를 흘렸다.
‘이거 봐라?’
무게 중심이 살짝 앞으로 쏠린 몸과 미세하게 힘이 들어간 두 다리. 아닌 척하면서 주변을 힐끔거리는 시선은 한 가지를 뜻하고 있었다.
‘기회를 봐서 날 기습하겠다?’
미친놈인가?
그러나 백수룡은 곧, 초일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안색은 누가 봐도 휴식이 필요한 환자에 가까웠으니까.
천무제를 앞두고 매일같이 야근하는 건 물론, 없는 시간을 쪼개 학생들을 지도하느라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서 그런 것이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내상이 심각해서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일 법했다.
‘내상은 진작 다 나았는데 말이지.’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초일을 죽이고 그 정체를 만천하에 밝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수룡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굳이 그래서 이득이 될 것이 없을뿐더러, 가뜩이나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혈교의 움직임만 더 움츠러들게 할 테니까.
‘차라리…….’
생각을 정리한 백수룡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오해를 했나 보군. 천무학관의 촉망받는 후기지수가 도둑질 따위를 할 리 없는데 말이야.”
“아닙니다. 명백히 저의 실수였습니다. 다시 한번 사죄를…….”
“그냥 보내기가 미안한데, 한 수 지도해 줄까?”
“……진심이십니까?”
침을 꿀꺽 삼키는 초일의 눈빛이 한순간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백수룡은 놈의 머릿속 생각이 읽히는 듯했다.
‘천재일우의 기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겠지.
백수룡은 초일이 조금 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도록, 창룡신검과 적월을 풀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권패 초일. 훗날 천하제일권의 자리를 넘볼 만한 기재라고 해서 궁금했는데. 권각으로 가볍게 붙어 보자고.”
꿍꿍이가 있는 놈이라면 이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일은 잠시 망설이는 척하더니 기수식을 취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 수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준비됐으면 바로 시작해.”
말이 끝나자마자 초일이 진각을 밟으며 달려들었다. 직선적인 움직임과 호쾌한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후우웅!
코끝을 스치는 주먹을 바라보며, 백수룡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확실히 강하다.’
혈룡.
별호에 혈(血)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혈교가 초일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짜 실력을 어느 정도 감췄을 것까지 감안하면, 혈교의 장로들 바로 다음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만만한 것도 이해가 되고.’
하지만 지금까지 백수룡이 상대한 혈교의 장로들, 천살, 사도들과 비교하기엔 우스운 수준이었다.
화아악!
소맷자락이 권풍에 휘말려 세차게 펄럭였다.
초일은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백수룡이 그를 가늠하듯, 그도 백수룡을 가늠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무공은 생각 이상으로 서로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때로는 수십 번의 대화보다 한 번의 비무가 나을 정도다.
쿠웅! 쾅! 터엉!
진각이 바닥을 찍고, 허공에서 공기가 터져 나갈 때마다, 백수룡은 초일이 익힌 무공의 종류와 사문(師門)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초일은 그 사실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백수룡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점점 더 알아내고 있다는 것을.
다만 아무리 공세를 높여도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는 기분에,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깨닫고 있었다.
“쓸 만하긴 한데…… 용(龍)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큭!”
초일은 그 말을 자신이 용봉비무에서 얻은 용봉의 칭호를 비꼬는 것으로 들었다. 설마 혈룡을 빗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다 본 것 같은데. 슬슬 끝낼까?”
‘누구 마음대로!’
초일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를 꽉 악문 그의 눈에 섬뜩한 빛이 일렁인 순간이었다.
쿵……!
가벼운 진각에 일대의 대기가 떨렸다. 동시에 백수룡의 기세가 일변했다. 주로 막고 피하기만 하던 그가 보법의 방향을 바꿔, 초일의 면전으로 순식간에 다가왔다.
“역시 말로 해선 납득 못하겠지?”
나른한 미소에 맺힌 살기는 피부가 오싹할 정도였다. 초일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백수룡의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콰아앙-!
그대로 붙잡아 뒤통수를 바닥에 처박았다.
발악하듯 초일이 주먹을 휘둘렀으나 백수룡은 반항을 용납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반격을 모조리 무력화하며, 초일의 뒤통수를 몇 번이고 연달아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앙! 콰앙! 콰앙!
그것은 결코 지도대련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무자비한 폭력이자 모욕이었다.
초일이 자신의 진짜 실력을 내보이기도 전에, 백수룡은 더 이상 덤벼들지 못하도록 힘으로 찍어눌렀다.
“그, 그만……!”
초일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배우거나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공포만을 학습했을 뿐이었다.
과거, 그가 거상웅에게 절혼마장으로 주화입마를 유도했던 것처럼.
“이제 정신이 좀 드나?”
위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초일은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초일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치워졌다.
백수룡이 무심한 눈빛으로 초일을 내려보고 있었다.
“볼일 끝났으면 헛짓거리하지 말고 얌전히 돌아가라. 괜히 제자의 몫까지 빼앗고 싶지는 않거든.”
“……지도에, 감사드립니다.”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초일은 덜덜 떨며 포권을 취하더니, 허겁지겁 도망치듯 청룡학관에서 사라졌다.
“권패라고 해서 혹시나 했는데…….”
백수룡은 멀어지는 초일의 뒷모습을 보며 한 가지를 확신했다.
‘사곤에게 무공을 배우진 않았어.’
맹사부의 무공인 녹림십팔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초일이 조금이라도 사곤에게 박투술을 지도받았다면, 자신이 모를 리 없었다.
‘일호에게 간계(奸計)를 배웠다면 저렇게 멍청할 리도 없고.’
백수룡은 남궁세가에서 만났던 팔장로, 혈령자를 떠올렸다.
혈교의 장로임에도 불구하고 혈교 본단의 위치와 중요한 정보는 거의 모르던 자.
그가 초일에게서 느낀 분위기는 딱 그 정도였다. 혈교의 중심부에 있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곤…….’
백수룡은 스스로의 의지로 혈교로 돌아간 옛 제자를 생각했다.
만약 초일이 학생들에게 위해를 끼치려 했다면, 혹은 사곤이나 옛 제자들 중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인물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보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사한지 생사라도 알고 싶구나.”
백수룡이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쉴 때였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그새 사고를 쳤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수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궁수였다. 언제 온 건지,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싸움의 흔적을 살폈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백수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지?”
“쥐새끼가 한 마리 들어왔길래 쫓아냈다. 왜?”
“…….”
잠시 백수룡의 눈을 들여다보던 남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수룡이 물었다.
“그나저나 너, 용한 무당 찾아다닌다면서? 설마 나 때문은 아니지?”
“헛소리. 개인적인 일이다.”
남궁수는 단숨에 일축하며 시치미를 뗐지만, 백수룡은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사무실에 있는 부적들은 뭔데? 요즘 쓸데없는 물건이 부쩍 늘어나는 것 같은데.”
“학생들이 천무제에서 다치지 않고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부적이다.”
“그런 부적을 왜 내 자리에 붙여?”
“…….”
남궁수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사무실로 향했고, 백수룡은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끼이이이익- 쿵!
녹슨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수십 개의 묵빛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거구의 사내가, 어둠 속에 가부좌를 틀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
간혹 희미하게 들썩이는 가슴이 아니라면, 거구의 사내는 앉은 채로 숨을 거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뇌옥에 들어온 이후로 그는 시간을 잊었다.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했다.
놀랍게도 이곳에 갇힌 후로 그는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화가 나서 벽을 후려치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벽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사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사곤은 감았던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오랜 친우들이 모두 모여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