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61
561화. 가까이 닿아야
혈교의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들은 무너진 혈교를 재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 명 한 명이 개세(蓋世)의 무위를 지닌 절세고수인 만큼, 각각의 역할이 컸기에.
하물며 혈교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은 지금, 어수선한 내부를 단속하기 위해서라도 쉽사리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다른 모든 일을 제쳐 두고 한자리에 모였다. 사실은 흔들리는 혈교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이, 눈앞의 사내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금부터 본교의 네 번째 사도에 대한 심문을 시작하겠다.”
일사도가 메마른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의 좌우에서 이사도와 삼사도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일사도의 입에서 사곤이 저지른 죄목이 하나씩 열거되었다.
신도들을 해치고 배교 행위를 저지른 죄, 교의 대계를 방해한 죄, 혈마를 모욕한 죄…….
하나같이 즉결 처형을 해도 부족함이 없는 중죄였다. 말을 모두 마친 일사도가 사곤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사사도. 이 모든 죄를 인정하나?”
사곤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이사도와 삼사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변명조차 하지 않겠다는 거냐?”
삼사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사곤을 노려봤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살기가 뚝뚝 묻어났다.
“무슨 말이든 지껄여 보란 말이다.”
“…….”
혈교의 사도들 중에서도 강건한 육신으로는 비교할 대상이 없었던 사내가, 이제는 보고 있기조차 안쓰러울 정도로 쇠약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곤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는 친우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순간, 삼사도가 벼락처럼 도를 뽑아 친우의 목에 겨누었다. 그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말해라. 죽일 땐 죽이더라도 이유는 알고 싶으니까.”
삼사도가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지하 뇌옥을 가득 채웠다. 천장과 벽을 기어 다니던 벌레들이 파르르 떨더니 바닥에 투둑투둑 떨어졌다.
“아직 죽여선 안 돼. 적어도 우리를 배신한 이유는 알아내야지.”
이사도가 손을 뻗어 삼사도의 칼을 옆으로 밀었다. 그녀가 싸늘한 시선으로 사곤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사호. 분명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지.”
“…….”
“우리가 너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야. 본교에는 네가 아는 것 이상으로 입을 열게 할 방법이 많다. 네 정신력이 아무리 굳건하다고 한들……. 영원히 견디지는 못해.”
섬뜩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사곤은 흐리게 미소 띤 얼굴로 가만히 친우들의 얼굴을 바라볼 뿐,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를 추궁하는 이사도와 삼사도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언성이 높아졌다.
“정녕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나오겠다는 거냐?”
“……마지막 경고야. 더 이상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하지 마.”
그리고 그들보다 한 걸음 뒤에서, 일사도는 싸늘한 눈빛으로 친우들을 바라봤다.
‘변한 것은 사호만이 아니다.’
일사도가 보기에 이사도와 삼사도에게도 모종의 변화가 있었다. 그는 그 시기를 가늠해 보았다.
-……심장을 스쳤다.
삼사도가 변한 것은 흑사련주와 생사결을 벌이고 온 이후였다.
교로 돌아온 삼사도는 한동안 자신의 거처에서 두문불출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후에는 예전보다 더 살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자주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이사도의 변화는 악가에서 돌아온 이후, 아니 돌아올 때부터 시작되었다.
-빙백무……. 대체 누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이사도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그녀는 전장에서 신월빙백무를 익힌 상대를 만났다고 했다.
물론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일사도는 그 일로 이사도가 전에 없이 복잡한 표정이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희들 모두…….’
일사도는 친우들로부터 한발 물러나서 그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친우들의 변화를 표현할 만한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있었다.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도무지 믿기 힘든 일이었다.
사도들은 입교한 후 십 년이 넘도록 감정을 죽이는 훈련을 받았다.
무공이 절세의 경지에 오르며 과거 혈교에서 받은 대법이나 금제는 대부분 약해졌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받아 온 교육의 결과물이었다.
결코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
일사도가 입을 열자, 사곤을 추궁하던 이사도와 삼사도가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봤다.
그들의 눈에서 일렁이는 복잡한 감정들을 엿본 일사도는 또다시 혼란을 느꼈다.
사람의 감정은 쉽게 전염된다. 오랫동안 친밀했던 관계라면 더 강렬한 영향을 미친다.
사호에게 생긴 변화가 다른 사도들까지 흔들고 있었다.
더 이상은 그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무의미한 심문은 그만하지.”
일사도는 천천히 걸어와선 사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사곤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청룡신협. 그자 때문인가?”
“…….”
처음으로 사곤에게서 유의미한 반응이 있었다. 흐릿한 미소가 비틀리고, 눈매가 조금 일그러졌다.
슬픔.
일사도는 학습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의 표정을 보고 감정을 짐작하는 것쯤은 간단했다.
하지만 왜 그런 감정을 담아 나를 바라보는 거지?
일사도는 묻는 대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사곤에게 보여 주었다.
“사호. 네 옷에서 이걸 찾았다.”
그것은 청룡이 똬리를 튼 형상의 옥패였다. 뒷면에는 백수룡(白壽龍)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청룡패.
청룡학관 학생들과 강사들만이 지니고 다니는 물건.
“네가 종적을 감춘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아냈다. 청룡학관이 있는 남창. 그곳에서 청룡신협, 그리고 그 제자들과 여러 차례 접촉했더군.”
“…….”
사곤은 대답하지 않고 옛 스승에게 받은 청룡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사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머물렀던 숙소 역시 찾아냈다. 허름한 주점이라더군. 무공을 익히지 않은 내외가 운영하는…….”
절그렁.
처음으로 쇠사슬이 움직였다. 사곤이 치켜뜬 눈으로 일사도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들을 어떻게 했나!
어딘가에 적거나 수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모두에게 그 의미가 충분히 전해졌다.
“……죽이지는 않았다. 너에 대해서 물어보라고만 시켰을 뿐. 청룡학관 근처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본교에도 부담이 크지.”
주점 주인 내외가 무사하다는 말에 출렁이던 쇠사슬이 잠잠해졌다. 일사도는 그런 반응을 놓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청룡신협으로 인해 지금까지 본교가 입은 피해는 추정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다수의 장로들이 죽고, 번번이 계획이 틀어졌지. 대계의 완성이 이십 년 이상 미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
“…….”
“그런데 혈교의 사도인 너는 청룡신협과 사사로이 접촉했을뿐더러, 그를 죽이려고 한 나를 가로막았다. 확인된 정보로는 청룡신협은 그 싸움이 끝난 후에 며칠이나 생사의 기로를 오갔다더군.”
“…….”
그날 사호가 자신을 막지 않았다면, 반드시 죽일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단 한 명에게 본교가 이렇게까지 휘둘리다니. 단순히 운이 좋고 무공이 강하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야. 청룡신협은 마치…… 우리만큼이나 본교를 잘 아는 자 같거든.”
일사도는 조금 더 사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청룡신협의 정체가 뭐지?”
“…….”
두 사내는 서로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사곤의 눈에는 짙은 슬픔이, 일사도의 눈에는 광기가 일렁였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것도 잠시.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은 일사도였다.
“사호. 너는 내게 지존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자고 했지. 우리가 평생을 추구해 온 숙원을 부정하면서……. 다시 묻지.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끄덕.
사곤이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순간, 일사도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망설임마저도 사라졌다.
고개를 끄덕인 일사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
그 순간, 이사도와 삼사도가 흠칫했다.
그들은 깨달았다.
일사도가 무언가 큰 결단을 내리려고 한다는 것을.
“일호…….”
“시간이 있다. 더 추궁해 보면…….”
친우들의 만류에도 일사도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은 시간 낭비다.”
혈교의 첫 번째 사도는 옛 스승을 가장 많이 닮았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결국에는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얻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선택이 필요할 때마다 사도들은 항상 일사도의 결정을 따라왔기에, 이번에도 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내 오랜 친우여.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일사도의 눈에서 복잡함이 일렁였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이내 감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사라졌다.
“하지만…… 네 배신 또한 용서할 수 없다.”
일사도가 손을 뒤로 뻗어 가볍게 손짓하자, 그들의 등 뒤에 있던 문이 저절로 열렸다.
끼이이익…….
두꺼운 문이 열리자, 지금껏 들려오지 않았던 끔찍한 괴성이 들려왔다.
끄아아아아악! 크큭, 크하하하하-!
울부짖음과 광소가 섞여 있었다. 멀리서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광기에 가득 찬 음성이었다.
혈교의 지하 뇌옥 어딘가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소문의 원흉.
사도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문 바깥을 바라봤다.
“흑야마제…….”
“증상이 점점 심해지는군.”
두 사도의 말에 일사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끝날 것이다.”
흑야마경과 역천신공을 융합하겠다는 흑야마제의 시도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일사도도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일사도가 부르려는 것은 흑야마제와는 다른 괴물이었다.
“오라.”
잠시 후, 관 하나가 허공에 뜬 채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적어도 수십 년은 되었을 법한 낡고 오래된 관.
일사도가 직접 관뚜껑을 열자,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악취와 함께 가래 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클. 나를 깨운 것을 보니 문제가 생긴 모양이구나.
반쯤 썩은 육신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
무인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단전은 으깨져 있고, 사지는 왼손을 제외하고는 전부 잘려나간 모습이었다.
괴물이 자신의 왼팔로 몸을 일으키자, 지독한 악취가 뇌옥 안에 진동했다.
“마뇌…….”
이를 꽉 악문 삼사도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이사도 또한 차가운 증오를 가득 담아 괴물을 노려봤다.
혈교의 이장로, 마뇌.
그는 괴력난신의 술법을 사용하여 이미 죽었어야 할 육체에 억지로 혼을 붙들어 놓았다.
하지만 혈교에서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오직 사도들뿐이었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가 십 년 전이었던가? 이번에는 무슨 조언을 구하려고 불렀느냐?
“시킬 일이 있어 깨웠다.”
일사도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상황을 간단히 요약했다. 사사도의 배신과 현재 혈교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배교자라……. 놀랍군. 너희가 증오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인 줄 알았거늘.
마뇌의 비릿한 웃음에 삼사도가 도를 꽉 움켜쥐었다. 일사도는 고개를 저어 그를 제지하고 다시 말했다.
“사사도가 입을 열도록 만들어라. 할 수 있겠나?”
물론이다. 어린 너희를 교육하여 이토록 훌륭하게 성장시킨 게 내가 아니더냐. 머리가 크면서 말을 안 듣게 되었다만……. 클클. 넷 다 표정이 볼 만하구나.
일사도가 마뇌를 내려다보며 스산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허튼수작을 부리면 즉시 베겠다.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만들도록.”
클클. 그리하마.
마뇌는 일사도의 도움을 받아 사곤에게 다가갔다. 그는 죽은 눈으로 사곤을 살폈다. 사곤 역시 말없이 마뇌를 응시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라. 내 손이 심장에 가까이 닿아야 한다.
이내 사도들의 기운이 사곤을 속박하자, 마뇌가 그를 향해 차가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