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67
567화. 구경만 하다가
무림인은 대개 도발에 약하기 마련이었다.
‘정파에선 체면과 위신을 중요하게 여기니 더 그렇지. 하물며 자존심이 저 하늘 위 구름에 닿아 있는 구파일방이라면.’
사마외도라 불리는 사파의 무인들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도망치거나 강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정파인들은 단순한 도발도 모욕으로 여기고 지나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목숨도 거는 족속들이었다.
“자신이 없냐라……. 허허.”
난감한 표정으로 웃음 짓는 불존을 보며, 백수룡은 그가 자신의 도발에 넘어오리라 예상했다.
‘아무래도 이건 못 참겠지?’
수백 년간 무림에 군림하며 민간에는 신선으로까지 추앙받아 온 구파일방에게, 오대학관 중 꼴찌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구파의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이참에 본때를 보여 줘 청룡신협의 기를 한번 눌러 줄 기회라며 반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대답은 백수룡의 예상에서 벗어났다.
“예. 자신이 없습니다.”
“…….”
불존은 태연하게 백수룡의 도발을 받아넘기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인자한 미소에서는 도발에 대한 불쾌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를 마주 본 백수룡이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구파일방이 질 것 같아서 피하겠다는 말씀입니까?”
“허허. 그도 그렇습니다만, 호승심보다 중요한 것이 있지요. 바로 대의(大義)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말임에도 전혀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강자의 겸손이자 배려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 터였다.
‘이거 만만치 않은 땡중이군.’
불심으로 닦은 수행이 깊어서일 수도, 아니면 수십 년간 무림의 온갖 풍파를 겪어 오며 생긴 조심성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강적이었다.
“사실 부끄러운 일이지요. 무도(武道)를 수행하는 것은 본래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함인데, 어느새 무(武)만 남아 서로의 강함을 견주고 위아래를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본산의 제자들만 해도 불경을 외는 것보다 몸을 단련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태반이지요.”
백수룡에겐 ‘모든 일을 무공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부끄럽게 여겨라’라는 뜻으로 들렸다.
“물론 이 또한 시대의 흐름이겠지요. 저는 걱정입니다. 곧 시작될 혈교와의 전쟁이 천하를 난세로 만들진 않을지…….”
“허나 난세가 영웅을 만들고, 신공절학을 완성시키는 법이지요.”
조용히 있던 천무학관주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불존이 할 말이 있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천무학관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오랜 생각일 뿐입니다. 갑자기 말씀을 끊어 죄송합니다.”
“허허. 아닙니다.”
인자하게 웃은 불존이 다시 백수룡에게 말했다.
“구파일방 내에서도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강한 무인들이 다른 문파의 명령을 듣는 것을 달가워할 리 없는 까닭이지요.”
그래서 장문인들이 고민 끝에 합의점을 찾은 것이 천무제였다.
천무제에서 후기지수들끼리 무공을 견주어, 그 대리전의 결과에 승복하고 따르도록 정한 것이었다.
“만약 구파일방의 중진들이 직접 무공을 겨루고 위아래를 나누었다면 일이 너무 커졌을 것입니다. 자칫 구파 간에 감정의 골이 생기기라도 했다면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대립하게 될 수 있었겠지요. 허나…….”
“후기지수들의 대결이라면 문파의 자존심이 조금 상하는 선에서 수습할 수 있으니까요.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누가 고승 아니랄까 봐 선문답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백수룡은 불존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맥을 끊었다.
“대사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서 본론으로 넘어가면, 구파일방의 내기에 청룡학관은 끼워 주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빈승은 이 이상 경쟁이 더 과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수양이 부족한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청룡학관 학생들을 다치게 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까, 청룡학관이 주제넘게 내기에 끼었다는 사실을 알면 화가 난 구파일방 제자들에게 다칠 것이다?
“이거 참…….”
그 순간, 백수룡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음에도, 불존의 신념 어린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시주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는 짐작이 되지만, 제 생각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부드럽지만 완고한 거절에 백수룡은 난감함을 느꼈다.
소림의 불존은 악인이 아니다.
그가 무림을 지키려는 마음만은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오만한 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걸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백수룡이 무림의 중심이 구파일방이라는 불존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깨부술까 잠시 고민할 때였다.
“이쪽도 조건을 걸면 어떻습니까?”
무림맹주였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야율황은 무림맹 총사범인 백수룡을 은근히 편들고 나섰다.
“무릇 내기라면 서로 거는 게 있어야지. 만약 청룡학관이 우승하지 못한다면? 총사범 자네는 무엇을 걸 텐가? 내 말은, 구파일방도 이겼을 때 얻는 것이 있어야 구미가 당길 게 아닌가 한다는 말일세.”
“허허. 맹주.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만…….”
맹주는 다소 눈치가 없는 게 단점이었지만, 어쨌든 분위기를 환기하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예리한 지적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하던 백수룡은 모두가 놀랄 만한 것을 내기에 걸었다.
“만약 청룡학관이 우승하지 못한다면, 제 독문무공 중 하나를 구파일방에 내놓겠습니다.”
“……!”
처음 이야기를 꺼낸 맹주는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절세고수들의 눈이 전부 휘둥그레졌다.
“진심인가?”
“허어……!”
“……백수룡.”
절세고수의 무공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시주! 그랬다간 싸움이 더 과열되기만 할 것입니다.”
불존은 번뇌를 털어 버리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표정을 굳혔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는 말이 있다.
천하의 모든 무공이 소림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으로, 그 유명한 칠십이종절예를 비롯해 소림에는 익히고 싶어도 다 익히지 못할 만큼 수많은 절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림의 최고수조차 청룡신협의 무공에는 잠시나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는 것으로…….”
“청룡신협이 무엇을 걸었는지는 내기가 끝날 때까지 비밀로 하면 되지요.”
“……어찌 관주께서도?”
이번에는 천무학관주였다.
그는 기이한 열망이 담긴 눈으로 백수룡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불존을 설득하는 데 한 손을 보탰다.
“천무제는 후기지수들이 일 년간 이룬 성취를 증명하는 장입니다. 학생들의 호승심이 과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내기 하나가 더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저 또한 학생들의 안전에 각별의 주의를 기울일 것이니, 대사께서도 한 번 더 재고해 주시지요.”
“아미타불…….”
중립인 줄 알았던 천무학관주마저 백수룡을 편들고 나서자, 불존의 이마 주름이 짙어졌다.
이제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남궁수에게 향했다.
당연히 그도 백수룡의 편을 들 거라 생각했는지, 불존은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대세가의 입장을 대변해 말씀드리면, 저는 구파일방의 지휘권을 누가 갖느냐에는 관여할 마음이 없습니다.”
의외로 남궁수는 백수룡과 선을 그었다. 개인적인 친분과는 별개로 구파일방과 백수룡의 내기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아미타불.”
불존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감이 어릴 때였다.
남궁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사님. 제 생각에는 애초에 방법이 잘못된 듯합니다.”
“……잘못되었다니요?”
남궁수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구파일방의 제자들 대부분이 천무학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문파별로 순위를 매기려면 그들 대부분이 유의미한 성적을 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불존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였다.
“허나 아시다시피 올해는 천무학관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청룡학관이라는 강력한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당연한 것처럼 들리는 이야기였다.
천무학관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무림맹주는 눈을 퉁방울만 하게 뜬 채로 꿈뻑거렸다.
백수룡은 웃음을 참느라 미간에 힘을 콱 줘야만 했다.
그러나 남궁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간단히 예를 들면, 구파일방에 속한 학생들이 용봉비무 결선에 한 명도 오르지 못한다면, 어찌 그들 간에 순위를 매기겠습니까?”
“…….”
“그러니 대사께서는 구파일방의 지휘권을 결정할 다른 방법을 찾으시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아미타불…….”
자비심과 인내심이 생불(生佛)과 같다는 소림 노승의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시 우리 일타강사!’
남궁수의 도발 실력에 감탄한 백수룡이 눈으로 극찬을 전했지만, 남궁수는 백수룡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하하하하!”
돌연 쩌렁쩌렁한 음성에 모두의 시선이 같은 방향을 향했다.
전각 위로 훌쩍 뛰어오른 노인이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내 가만히 듣고 있으려 했건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도포의 오른쪽 소매가 헐렁한 도사였다. 신선 같은 풍모에 허리춤에는 한 자루의 송문검을 찼는데, 백수룡은 그가 다가오는 걸음만으로도 절세의 검객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말코는 무당의 진양자라 하네. 진즉에 뒷방으로 물러난 몸이지만, 나누는 대화가 흥미로워 염치 불고하고 끼어들었네.”
자연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한 그의 시선이 백수룡과 남궁수를 향했다. 그들의 기도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 그가 다시 불존을 돌아봤다.
“대사. 내기를 받아들입시다.”
“……검성까지 이러실 겁니까?”
검성 진양자.
전대의 십존으로, 무당파의 최고 어른이었다.
즉, 구파일방에서 불존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게 어디 소림만의 일입니까? 구파일방 전체가 도발을 당했소이다. 청룡신협이 직접 내기에 어마어마한 조건도 걸었지. 이런 말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있소?”
검성의 설득이 결정적이었다.
끝내 굽히지 않을 것 같았던 불존도 결국 고집을 꺾었다.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장문인들을 만나서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림십존이 자신의 독문무공까지 내건 마당에, 구파의 장문인들이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들이 질 리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사실상 구파일방과 청룡학관의 내기가 성립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미타불. 오늘은 이만 파하도록 하지요.”
“허허. 그럼 다음에 또 보세나.”
지친 표정의 불존과 검성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무림맹주와 천무학관주도 돌아갔다.
그들 모두가 천하에서 바쁘기로는 손에 꼽는 이들이었다. 예상보다 이야기가 길어진 터라 사사롭게 쓸 시간이 많지 않았다.
“총사범. 조만간 따로 시간을 내서 보세나.”
“나 또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
두 사람이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 후, 텅 빈 전각에는 백수룡과 남궁수만이 남았다.
“나는 뭐 구경만 하다가 끝났는데?”
백수룡은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더니, 빈 술잔에 남아 있는 술을 채웠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 편하게 마시는 술이었다.
문득 방금 전에 남궁수가 불존을 설득하던 모습을 떠올린 백수룡은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아까는 나도 한 수 배웠다. 엄청난 도발이었어.”
“……도발이라니. 정확한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이다.”
남궁수는 진지하게 그렇게 대답한 후, 마찬가지로 빈 술잔에 잔을 채웠다.
그들이 호북에 도착한 첫날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