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68
568화. 놀랍군
새벽에 청룡학관을 출발해 노을 질 무렵에야 호북에 닿았다.
직후 정파무림의 절대자들과 회합을 가지며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벌였다.
아무리 두 사람이 절세고수라도 심신이 지칠 만한 일정이었다.
“차라리 불존과 무공을 수백 합 겨루는 것이 덜 피곤했겠어.”
이제야 술 한잔 마음 편히 마실 여유가 생긴 상황에서, 백수룡은 술잔에 비친 달을 안주 삼아 목으로 넘기곤 말을 이었다.
“크으. 술이 다네. 그래도 잘 마무리됐으니, 이렇게 축하주 한잔 정도는 마셔 줘야지.”
“…….”
맞은편에서는 남궁수가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그 역시 노곤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방금 전까지 갑작스레 오대세가를 대표하는 역할이 되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티는 내지 않았어도 막중한 책임감에 긴장되고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더 이상 자신을 남궁세가의 삼공자로 보지 않을 것이다.
남궁수는 술잔을 바라보며 홀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백수룡을 바라봤다.
“구파일방의 지휘권을 가지려는 이유가 뭐지?”
“이왕이면 내가 가지면 좋잖아. 내가 원하는 대로 전쟁의 양상을 만들 수도 있고.”
백수룡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역천신공에 대해 털어놓은 후, 그는 남궁수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여겼다.
그것은 그에게 아주 중요하고 미안한 부탁을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백수룡의 대답을 들은 남궁수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설마,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싸늘한 말투가 비난처럼 들렸다.
괜한 공명심으로 학생들과 주변인들, 그리고 스스로를 위험에 던져 넣는 무모한 생각이 아니냐는 질책이 짧은 말 안에 담겨 있었다.
백수룡은 어깨를 으쓱한 후 말했다.
“물론 내가 나서지 않아도 무리 없이 혈교를 토벌할 수도 있겠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전력, 무림맹의 힘을 생각하면…… 승산은 충분하니까.”
반면 혈교는 남궁세가 혈사부터 많은 계획이 실패하며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장로들 대부분이 죽었고, 많은 무력집단이 전멸하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다.
혈교에 남은 전력 중 두려운 것은 십존을 상회하는 무공을 지녔다고 알려진 사도들.
그리고 정파무림의 거인들을 별호만으로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 혈마뿐이었다.
백수룡은 혈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불존과 무림맹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디에서도 혈마의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새로운 혈마가 탄생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아직 나서지 않았을 뿐인지…….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그 괴력난신이 다시금 강호에 나타난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피가 흐를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저는 지금도 그 괴물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미타불…….
불존과 무림맹주는 혈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내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천무학관주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갈증이 심한 듯 술잔을 연달아 비웠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에서 알 수 없는 격정이 느껴졌었다.
백수룡은 그들의 반응을 떠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혈마의 목적은 무림일통 따위가 아니야.”
휘이이잉-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전각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경은 활기가 넘쳤다. 늦은 시간임에도 곳곳에 등불이 켜져 있고, 술에 취한 취객들이 거리를 오가며 떠들어 댔다.
백수룡은 축제를 앞두고 흥겨움으로 들썩이는 인세(人世)를 물끄러미 내려봤다.
그러다 불쑥,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저 광경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수룡.”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백수룡의 고개가 다시 남궁수를 향했다.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남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검을 뽑아라.”
백수룡은 흔쾌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창룡신검을 뽑아 내렸다.
호북에서 가장 높은 전각에서 두 사람의 검무가 펼쳐졌다.
청룡학관에서 벌였던 대결과 같았다. 그들은 심상 속에서 수없이 베고 찔렀다. 그들의 숨결에서 주향이 풍겨 나왔으나, 서로를 노리는 검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어느새 목덜미에 닿은 검날을 힐긋 본 남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검은 이번에도 백수룡의 심장에 닿지 않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내리자, 전각 끄트머리에서 눈치를 보다가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무인이 있었다.
“저어…….”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무인은 두 사람에게 극도로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자세히 보니 남궁세가의 무인이었다.
“삼공자님. 가주님께서 조용히 모셔 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무림맹주가 두 사람이 호북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남궁천에게 전한 모양이었다.
“예. 며칠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청룡신협과 뇌신이 호북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도시 전체가 크게 들썩일 터였다.
때문에 괜한 소란을 피하기 위해, 남궁가주는 조용히 사람을 보내 아들을 데려오라고 전한 모양이었다.
남궁세가의 무인은 백수룡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삼공자님과 긴히 나눌 말씀이 있어, 본가의 은인이신 청룡신협께는 따로 공식적인 초대장을 보내겠다고…….”
백수룡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어차피 무림맹에 있는 숙소에서 머물 생각이었으니까.”
그 순간 남궁수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으나, 혼자서 오라는 가주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서둘러 다녀오지.”
돌아선 남궁수가 남궁세가의 무인을 따라 전각을 내려갔다.
백수룡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안 물어봐?”
남궁수는 못 들은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백수룡은 이번에는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서 물었다. 스산한 바람이 남궁수의 귀밑머리를 스쳤다.
“개벽(開闢)이 뭐라고 생각하지?”
남궁수는 잠시 멈칫했으나, 대답에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선문답을 하고 싶으면 불존을 찾아가도록.”
쓸데없는 소리는 더 이상 들어주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어린 대답이었다.
남궁수는 곤란해하는 가문의 무인에게 먼저 내려가서 잠시 기다리라고 전한 후, 돌아서서 백수룡에게 말했다.
“백수룡. 천무제 기간 동안 네 본분을 잊지 마라.”
“……내 본분?”
“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백수룡이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남궁수는 영 미덥지 않다는 시선으로 백수룡을 노려봤다.
“그러니 삿된 것과 어울릴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도록.”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수룡은 대답 대신 빨리 꺼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남궁수가 가주를 만나기 위해 떠난 후에도, 백수룡은 홀로 남아 술잔을 비웠다.
곧바로 숙소로 가기에는 전각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운치가 아까웠다.
“삿된 것이라…….”
백수룡은 피식 웃었다.
그가 혈마의 목적이 무림일통이 아니라고 했을 때, 남궁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상대가 무림맹주나 불존이었다면 곧바로 날카로운 추궁이 이어졌을 것이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그럼 진짜 목적은 무엇이냐고.
물론 그들이었다면 백수룡은 혈마의 목적에 대해 화제조차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남궁수이기에 말해 주었고, 미리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개벽(開闢).
백수룡은 이제야 어렴풋하게 알 것 같은 혈마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호북의 밤하늘은 쌀쌀하다기보단 시원했고, 별은 청룡학관에서 보던 것보다 흐렸다. 도시가 밝은 탓일 것이다.
휘영청 밝은 달은 다소 붉게 보였다.
“……혹시 내 눈에만 붉은가?”
눈을 가늘게 뜬 백수룡은 달을 유심히 살펴본 후, 고개를 돌려 도시를 바라봤다.
세상이 전부 붉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자신은 아직 혈마에게 잠식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괜찮은 것 같지?”
백수룡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허리춤의 창룡신검을 툭툭 쳤다.
기약할 수 없는 잠에 빠진 그녀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씁쓸하게 웃은 백수룡이 남아 있는 술을 병째로 들이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돌아다녀 볼까.”
간단히 변복을 하고, 인피면구를 뒤집어썼다. 남창에서 허천으로 행세할 때 쓰던 것이었다.
늦은 밤임에도 호북의 밤거리는 시끌벅적했다.
지난 수십 년간 최대의 인파가 몰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만큼 범죄나 무림인 간의 칼부림에 대비하여, 무림맹은 물론이고 관군까지 동원되어 치안을 강화했다고 들었다.
‘분명 혈교에서도 숨어들겠지.’
사람들 사이에 섞여든 백수룡은 기감을 그물처럼 넓게 펼쳤다.
운이 좋아 혈교의 세작이 눈에 띈다면 잡아다가 심문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워낙에 많은 탓인지 마땅한 성과는 없었다.
대신 구파일방의 고수들로 예상되는 기가 도시 곳곳에서 느껴졌다.
‘혈교도 어지간한 고수가 아닌 이상은 함부로 세작을 들여보내진 못하겠군.’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천무제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안전하고 편하게 축제를 즐길 수 있다면.
“여긴 벌써 축제가 시작된 것 같은데.”
천무제가 시작되기까지 아직 닷새가 남았다.
그러나 호북의 밤거리는 이미 축제가 시작된 것처럼 들썩거렸다.
“목각으로 만든 천무패! 주작패! 백호패! 현무패! 청룡패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좌판에서는 오대학관의 상징이 새겨진 물건들을 늘어놓은 채 팔고 있었다.
청룡학관과 관련된 물건은 매년 가장 인기가 없었지만, 올해는 청룡이 새겨진 기념품이나 장신구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는 중이었다.
거리 한쪽에서는 재담꾼들이 무림의 영웅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천하를 오시하는 십존과 오대학관의 후기지수들, 그중에는 백수룡과 남궁수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청룡신협과 뇌룡신검! 혈교를 상대로 보여준 쌍룡검우(雙龍劍友)의 활약을 한번 들어 보시오!”
“예끼! 뇌룡신검의 별호가 뇌신이라 불리기 시작한 지가 언젠데!”
관객들 중 누군가가 시비를 걸자, 재담꾼이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로군! 영웅호걸들이 어디 하나의 별호로 만족하던가! 청룡신협만 해도 청룡신개, 청룡무신, 옥면…… 어억! 방금 돌 던진 놈 누구야!”
백수룡은 호북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혈교의 세작을 잡겠다는 목적은 어느새 뒷전이 되었다.
‘혼자서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아버지와 둘이 손을 잡고 나온 어린아이가 자신도 청룡학관에 가고 싶다고 종알거리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문득 백무관에서 무공을 가르친 장이가 떠올랐다.
몇 년 후에 청룡학관에 입관 시험을 보러 오겠다고 했는데…….
“잘 지내려나 모르겠군.”
백수룡이 그 어린아이의 반대 손에 당과 하나를 슬쩍 쥐여주고 지나칠 때였다.
“놀랍군.”
인파에 섞인 목소리인데도 선명했다.
백수룡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홀린 듯 돌아갔다.
수백이 넘는 인파 속에서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강인한 인상을 제외하면 얼핏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많은 상상을 해 봤지만…….”
거리는 대략 십 장.
일반적으로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 거리였으나, 백수룡에게도 사내에게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방금 같은 모습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사내의 입가에 지렁이 같은 흉터가 꿈틀거린 순간, 백수룡은 상대를 향해 이유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살의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