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69
569화. 입술의 흉터
두 사내의 시선이 서로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됐다.
“…….”
“…….”
백수룡의 현생과 전생을 통틀어도 처음 보는 사내였다. 품이 넓은 감색 장포에, 허리춤에는 검을 찼다. 입가의 흉터를 제외하면 거리의 수많은 무인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풍기는 기도 또한 평범했다.
하지만 상대와 마주한 순간, 백수룡은 자신의 내면에서 살의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죽인다.’
결심과 동시에 백수룡은 살기를 감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상대를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낯선 상대를 보자마자 이렇게까지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어떤 필요에 의해서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죽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 반드시 저 존재를 말살해야 한다고 본능이 속삭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풀어주며 언제든 검파를 쥘 수 있도록 준비했다.
‘놓치지 않는다.’
백수룡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걸었다.
사내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백수룡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비틀린 입매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 같은 흉터가 신경에 몹시 거슬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십 장 안팎이었던 거리가 어느새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들 사이에 수백의 인파가 오가고 있었지만, 백수룡의 눈에는 상대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거치적거리는 것들이 백수룡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해돼. 전부 치워 버려야겠어.’
간단한 결정이었다. 백수룡의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들어 올려지고, 발밑에서 시작된 바람이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천천히 번지기 시작했다.
화아악……!
돌연히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에 감각이 예민한 무인들이 흠칫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여전히 백수룡을 주시하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멈칫.
일보(一步)로 공간을 접어 상대에게 짓쳐들려던 순간이었다. 상대의 질문에 백수룡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
도시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그들 주변에만 수백이 넘는 인파가 몰려 있었다.
좌판에서 흥정을 하는 상인과 행인들.
대목을 맞아 손님을 호객하는 점소이들과 취기가 올라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취객들.
천무제를 구경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무인들과 그들을 따라온 어린 무인들.
조금 전 당과를 쥐여준 어린아이의 기척도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당과를 입안에 냉큼 넣고 우물거리다가 아버지에게 혼이 나는 중이었다.
“…….”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인식한 백수룡은 기파를 거둬들였다. 그제서야 주위를 경계하던 무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각자 가던 길로 걷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백수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 그는 주변의 상황을 개의치 않고 전력으로 출수하려 했다.
절세고수의 손짓 한 번이면 반경 수십 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음을 알고도 말이다.
그때,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생각보다 진행이 더딘 건가. 아니면…….”
백수룡이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자, 그는 조금은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저항을 한 건가?”
말할 때마다 입가의 상처가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또다시 들끓으려는 살기를 간신히 가라앉힌 백수룡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지?”
“천무결.”
대답과 함께 이번에는 천무결이 백수룡을 향해 걸어왔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평범한 걸음걸이.
그래서 백수룡은 더욱 긴장했다.
저 평범한 걸음이야말로 상대가 완벽한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는 의미였으니까.
‘천무결?’
낯설지만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에 백수룡의 눈썹이 꿈틀댔다.
하지만 당장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존재감이었다.
그는 지금 불존, 무림맹주, 천무학관주와 한자리에 있었을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늠이…… 되질 않는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천무결이라는 사내가 십존이라 알려진 절세고수들에 못지않은 초고수라는 사실뿐.
“내 이름을 들었으면, 그쪽 이름을 알려 줄 순서가 아닌가?”
천무결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고작 일 장에 불과했다. 절세고수들에게는 상대의 숨결조차 느껴지는 지척이나 마찬가지였다.
‘침착하자.’
백수룡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주변을 살피고, 상대를 관찰한 후에 판단하는 것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지금 나는 인피면구를 썼다. 놈은 내가 백수룡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어.’
물론 인피면구를 썼다는 사실은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의 얼굴까지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수룡은 일단 상대를 한번 떠보기로 했다.
“장삼이다.”
“이거 왜 이러실까.”
천무결은 사납게 웃으며 백수룡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을 감싸는 투명한 기막이 펼쳐졌다.
“처음 뵙겠소. 백수룡 선생.”
“…….”
백수룡은 자신을 노려보는 천무결의 눈동자 너머에서 자신 못지않은 진득한 살기를 느꼈다. 천무결 역시 간신히 참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백수룡은 이내 피식 웃으며 제안했다.
“장소를 옮기는 게 어때? 사내놈 둘이 길 한가운데서 계속 노려보고 있으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일 것 같은데.”
천무결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부터 이쪽을 주시하는 놈들이 있다. 무공을 쓰지 않고 티 나지 않게 따돌릴 수 있겠나?”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냐? 이건 또 신선하네.”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솜씨를 한번 보도록 하지.”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돌리더니, 순식간에 거리의 인파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무리가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어디로 갔어?”
“아까 그놈들. 분명 한판 붙을 것 같았는데…….”
“허!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군!”
수많은 무인들이 모여드는 만큼 호북에는 무림맹과 개방, 하오문, 관군들의 눈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
혹시나 모를 혈교의 잠입, 혹은 무인들의 충돌에 대비한 방책이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나설 수 있도록.
“무공을 사용한 흔적은 전혀 없는데…….”
“그냥 인파에 섞여서 못 찾은 것 같습니다.”
“하기야. 사람이 좀 많아야지.”
무인들은 뭔가 찜찜해 하면서도 더 이상 두 사람을 찾는 데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이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놓친 무인들은 몰랐지만, 그들은 놀랍도록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달라붙은 시선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제법이군.”
“너야말로.”
감쪽같이 종적을 감췄던 두 사내는 같은 장소에 다시 나타났다. 약간의 변복을 한 모습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희미한 감탄이 어렸다. 그들은 감시자들의 눈을 따돌리면서도 상대를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움직이고 행동하는지 살피며, 무공 대신 기지(奇智)와 재치를 겨뤘다.
그러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이쪽엔 자리가 빈 주점이 없던데. 반대편에선 찾았나?”
그 짧은 시간에 일대의 주점까지 둘러보고 온 백수룡이 먼저 말을 꺼내자, 천무결이 고개를 저었다.
“이쪽에도 없었다. 차라리 걷도록 하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호북의 밤거리를 걸었다. 여전히 수많은 인파가 북적이는 와중이었다.
일 장(一丈).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상대와의 간격이 일 장 안으로 좁혀지면 언제든지 생사결이 시작될 수 있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살기가 폭발하는 순간, 이 일대가 쑥대밭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위험한 놈이다.’
백수룡은 천무결과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를 탐색했다. 걸음걸이, 들숨과 날숨, 사소한 몸의 버릇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빈틈을 드러내기도 하고, 보폭을 슬쩍 바꾸거나 인파가 많은 곳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이놈……. 나와 동류다.’
사고의 흐름과 행동이 소름 끼치도록 닮았다.
마치 같은 스승에게서 동문한 사형제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아무런 대화도 없이 서로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불쾌하군.”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서로에게 한 치의 빈틈도 내주지 않고, 조금이라도 상대가 헛점을 보이면 물어뜯기 위해 쉴새 없이 기회를 엿보는 것.
백수룡은 이런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해야만 하는 유일한 집단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혈교에도 너 같은 놈이 있었나.”
기막이 펼쳐진 채로 두 사내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천무결은 백수룡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역천신공은 어느 정도나 익혔지? 팔성? 구성?”
“천무결이라는 이름. 기억났다. 천무학관에서 올해 유일하게 시험에 합격한 신입 강사. 다른 후보들을 모두 탈락시켰다고?”
“호흡은 깊지만 눈동자가 한 번씩 탁해지는군. 슬슬 한계가 보이는 것 같은데.”
“천무학관주도 네가 혈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아니면 천무학관주도 한패인가?”
그것은 도무지 대화라고 할 수 없었다. 서로가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며,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둘 다 상대를 기만하는 데 통달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기에, 뭐라고 대답하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스스로의 판단과 직관으로 진위 여부를 가린다. 그렇게 얻은 정보로 상대의 약점을 캐낸다.
이번에는 백수룡의 순서였다.
“네 입술의 흉터. 스스로 낸 거군.”
“…….”
처음으로 천무결이 침묵했다. 흥미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에 따라 흉터가 꿈틀댔다.
백수룡은 자신이 제대로 짚었음을 확신했다.
“아마도 혈교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였겠지. 혈마 후보쯤 되었을 귀한 몸이 자해를 하면 난리가 났을 테고, 준비한 계획대로 혼란을 키웠겠군. 그렇게 혈교를 탈출했나?”
“……재미있군. 어떻게 거기까지 추측했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던 천무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한 방 먹었다는 인정이었다.
“쉽지는 않았어. 네가 그때 구한 아이들 중 한 명과 만나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겠지.”
-입가에 지렁이 같은 흉터가 있는 소년이었다. 혈교를 굉장히 증오하던……. 나는 혹시 네가 아닐까 생각했다.
악인곡에 갔을 때 벽안귀에게 들었던 이야기. 거기서부터 시작된 추리였다.
백수룡은 경계심을 다소 누그러뜨리며 천무결에게 말했다.
“천무결. 혈교를 없애고 싶다면 내게 협조해라. 나는 혈마가 될 생각이 없다.”
“……그건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무결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백수룡을 응시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멈춰서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혈마를 없앨 것이다.”
천무결의 음성에서 지독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지금 천무결은 백수룡을 죽여야 할지 이대로 두어야 할지 갈등하고 있었다.
백수룡은 그 살의를 선명하게 느끼며 코웃음을 쳤다.
“꿈도 야무지군.”
그 한마디에 천무결이 피식 웃었다. 그가 차가운 밤공기에 긴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냥 물러나지.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몸을 돌린 천무결은 인파 속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순식간에 그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졌다.
“아, 한 가지만 충고하자면.”
희미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백수룡은 표정을 찌푸렸다.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나 싶었다.
“천무학관주를 조심해라. 그 인간은 나하고는 또 다르거든.”
“……참고하도록 하지.”
“그럼 섣불리 죽지 말도록.”
천무결이 홀연히 떠난 후에도, 백수룡은 오랫동안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