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74
574화. 사파니까
을씨년스러운 겨울바람이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 같은 눈동자에서는 야생의 살기가 번들거렸다.
흑도맹주 맹룡휘.
누구도 들어 보지 못한 강호 초출의 사내가 정파무림의 축제에 나타나,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힘으로 열고 들어가겠다며 협박했다.
그 살기에 잠시 얼어붙었던 정파의 협객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얼굴이 벌게졌다.
“저, 저자가 정녕……!”
“알량한 무공을 믿고 겁도 없이 설치는구나!”
“저 마두의 눈에는 무림맹과 구파일방의 수많은 협객들이 보이지 않나 봅니다!”
분기탱천한 정파의 무인들이 소란스럽게 노성을 터트렸으나, 그중 대부분은 겁먹은 짐승이 털을 잔뜩 부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 전, 맹룡휘는 정파무림 전체를 도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양이 깊어 의중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구파의 고수들조차,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질 정도였다.
“……저 농밀한 살기와 과격한 언행. 흑야마제를 떠오르게 하는군요.”
“맹주께서는 정녕 저자와 동맹을 논하시려는 겐가?”
“승냥이를 잡겠다고 범을 불러들인 꼴은 아닌지, 신중히 재고해 봐야 할 듯합니다.”
구파의 장문인들이 나직이 한마디씩 불만을 표출했다.
체면과 자존심의 문제였다.
흑도맹주의 협박에 못 이겨 문을 열어 주게 된다면, 앞으로 무림 전체에 조롱거리가 될 터였다.
더욱 단호해진 그들의 표정을 본 맹룡휘가 피식 웃었다.
“역시 정파 놈들은 이럴 때만 단합이 잘 된단 말이지?”
맹룡휘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정파 진영에서도 불존, 검성을 비롯해 구파일방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공력을 끌어올려 충돌에 대비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남궁수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맹룡휘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노려볼 때였다.
“강호의 동도들께 부탁드리겠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혼란스러워진 분위기를 일거에 진정시켰다.
무림맹주 야율황이었다.
맹룡휘를 지나쳐 정파의 무인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흑도맹에 초대장을 보낸 것은 바로 나, 무림맹주 야율황이요. 혈교와의 전쟁을 앞두고 한시적 동맹에 관한 대화를 논하기 위함이었소이다. 허나 정사(正邪) 간 오랜 갈등이 있음에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으니, 모두 본인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일이오.”
솔직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무림맹주가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그 모습에 다들 깜짝 놀랐다.
“이번 한 번은 내 체면을 보아서라도 흑도맹을 손님으로 맞아 주시길 바라오. 내 이렇게 고개 숙여 부탁드리겠소이다.”
“맹주…….”
“어찌하여 고개를 숙이십니까!”
“허어, 이리 난감할 데가…….”
무림맹주가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강호의 위치도 위치이거니와, 절세고수로서 결코 쉽지 않은 일.
가장 완고한 정파의 협객들마저 난감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무림맹주는 고개를 들어 맹룡휘를 노려봤다.
“흑도맹주도 이 자리에서 약조하라. 도시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노라고.”
“약조할 수 없다면?”
“순순히 왔던 길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본 맹주와 생사결을 다퉈야 할 것이다.”
야율황도 그 이상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정파의 무인들이 맹주의 당당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능구렁이 같으니.’
무림맹주를 바라보는 맹룡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일부러 유도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아는 무림맹주는 단순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기회를 놓치지 않는 영리한 사내였으니까.
“……뭐, 그렇게 하지.”
맹룡휘는 마지못해 수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에서 무림맹주의 체면을 세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두 맹주 간에 많은 눈빛이 오간 것을 눈치챘을 테지만, 여론은 이미 넘어왔다.
맹룡휘가 흑도맹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정파에서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한 우리도 자중하겠다. 흑도맹주인 나 맹룡휘, 그리고 흑도맹에 소속된 사파 종주들의 이름을 걸고 약조하지.”
내 이름은 왜 마음대로 거는 것이냐?
소지광이 작게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맹룡휘는 못 들은 척했다.
그가 다시 무림맹주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대신 너희도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내 단단히 주의를 주도록 하지.”
두 맹주는 빠르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따로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그들의 입가에 비슷한 종류의 미소가 맺혔다.
“이제 들어가도 되나?”
“따라와라. 내가 직접 안내하지.”
흑도맹은 무림맹주의 안내를 받아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맹룡휘가 이끄는 흑도맹이 당당히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인파가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나왔다.
곱지 않은 시선들이 쏟아짐에도 흑도맹의 무인들은 당당했다. 간혹 야유가 쏟아지긴 했으나, 무림맹의 무사들이 돌아다니며 분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을 조용히 끌고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녹의수사!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들어온 것이냐!”
무림맹에 마련된 숙소를 앞두고 흑도맹의 행렬을 막아선 자들이 있었다.
짙은 남색의 장포를 펄럭이는 수십의 검수들이었다. 도도하면서도 베일 듯 날카로운 기세 사이로, 문파의 엄정한 규율이 느껴졌다.
구파일방의 일좌인 청성파의 무인들이었다.
“장문인.”
무림맹주가 침중한 목소리로 물러나 달라고 부탁했으나, 완고한 얼굴의 청성파 장문인은 고개를 저었다.
“맹주께선 본파의 은원에 참견할 자격이 없으시오. 맹주의 체면이라면 저치들을 이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충분히 지켜 드렸소이다!”
“허나…….”
“개인의 원한까지 무림맹에서 막으실 것이오? 본파의 장로 중 하나가 제자를 잃고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있소이다.”
청성파 장문인의 시선이 녹의수사를 노려보았다. 녹의수사는 덤덤히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십 년 전, 네가 죽인 청성의 미래들을 기억하느냐?”
청성파 장문인 곁에서 한 중년의 도사가 앞으로 나섰다. 방금 전 원한이 가득한 음성으로 녹의수사를 부르짖은 자였다.
“오늘 내 어린 제자들의 원한을 갚고자 한다. 수치심을 모르는 사파의 마두여, 네가 무인이라면 내 검을 피하지 마라.”
검을 뽑아 내린 중년의 도사가 절절함이 가득한 음성으로 뇌까리자, 지켜보고 있던 군중들이 녹의수사에게 야유를 보냈다.
“끄응…….”
무림맹주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으나, 청성파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방금 말한 대로 이 정도면 맹주의 권위를 충분히 존중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구파의 생각도 비슷한 듯, 나서서 중재하려는 자가 없었다. 불존마저도 조용히 불호를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맹룡휘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정파무림은 여전히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있었다.
무림맹이 중심이 되기엔 구파일방의 자존심은 너무나 고고해, 당면한 전쟁 앞에서도 자존심이나 내세우는 꼴이었다.
“내 말을 듣지 못했느냐! 이 악적! 뒤에 숨지 말고 앞으로 나서거라!”
청성파의 장로가 다시 한번 녹의수사를 도발하며 불러냈다.
하지만 녹의수사는 청성파와 달리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흑도맹주에게 먼저 허락을 구했다.
“맹주님.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죽이지는 마라.”
“예.”
간단한 허락과 대답이었다.
맹룡휘에게 깍듯이 예를 취한 녹의수사가 앞으로 나섰다.
구파일방과 비견되는 모습에 무림맹주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십 년 전에 내 손에 죽은 네 제자들 말이냐? 물론 기억한다.”
뒷짐을 지고 앞으로 나선 녹의수사는 청성파의 장로와 똑바로 마주 섰다.
“공명심에 눈이 멀어 분수도 모르고 염라채의 형제들을 공격한 애송이들이었지.”
“이놈!”
“헌데 제대로 모르고 있군.”
녹림이라고 하면 흔히 무식한 산적들을 연상하지만, 그들을 다스리는 녹의수사는 누구보다 많은 학식과 기품을 가진 사내였다.
언변 또한 웬만한 재담꾼 못지않으니, 녹의수사는 군중들이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네 제자들이 죽인 사내들은 무공은 일초반식도 모르던 양민들이었다. 고을의 탐관오리로부터 도망쳐 배고픔이나 면할 생각으로 녹림에 몸을 의탁한 것이 그들이 지은 죄의 전부였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군중들의 야유가 잠시 잦아들었다. 녹의수사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가장 좁은 길에 배치시킨 것이 내 실수였다. 설마 보따리상이나 지나다니는 길에 청성파의 무인들이 찾아올 줄 어찌 알았을까…….”
“헛소리! 양민을 수탈하는 산적의 궤변이로다!”
청성파의 장로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반박했으나, 녹의수사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정강산 너머에 있는 작은 촌락에 한번 가 보거라. 네 제자들이 죽인 양민의 어미가 지금도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가서 청성파의 장로라고 말해 보란 말이다!”
“감히……!”
모욕을 당한 장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청성파 장문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녹의수사를 용서할 수 없는 악인으로 낙인찍어 처단한다는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청성파 장문인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세 치 혀를 간사하게 놀리는 것이 과연 사파의 종자답다. 허튼소리를 더 이상 들어줄 필요 없다. 청성의 장로는 검으로 말하라!”
“예!”
단호하게 대답한 청성파의 장로가 검을 중단에 세우고 경공을 펼쳐 덤벼들었다. 날카로운 기세가 사방으로 뻗쳤다.
녹의수사도 뒷짐을 풀며 두 팔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싸움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콰앙!
“쿨럭……!”
바닥에 등부터 내리꽂힌 청성파 장로가 울혈을 토했다. 십여 합도 걸리지 않았다.
녹의수사는 상대를 내려보며 가볍게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완전히 하수를 대하는 태도였다.
“애초에 격이 맞지 않았다. 나를 상대하고 싶으면 장문인이 직접 검을 들었어야지.”
그 이야기를 들은 청성파 장문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으나,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조금 전 목도한 녹의수사의 움직임에 도저히 이길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하무림의 눈과 귀가 호북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검을 섞었다가 녹의수사에게 패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청성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터였다.
“혹시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은 청성파의 신물인가? 그래서 함부로 못 뽑나 본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맹룡휘가 귀를 후비며 도발하자, 청성파 장문인의 수염이 더욱 격렬하게 떨렸다.
“볼 일이 다 끝났으면 비키지? 언제까지 손님들을 길바닥에 세워 두려고?”
“큼……!”
맹룡휘의 이죽거림에, 청성파 장문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힐 때였다.
콰앙!
하늘에서 한 자루 검이 날아와 맹룡휘의 발치에 박혔다.
“도저히 더 이상은 들어주질 못하겠구나.”
곧이어 신선 같은 풍모를 지닌 마른 노인이 맹룡휘 앞에 내려섰다.
날카로운 검과 같은 기세를 뿜어내는 노인이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백발백미에 꼿꼿하게 세운 허리는 한 자루의 검을 연상시켰는데, 형형한 눈에서 푸른 광망이 번졌다.
노인의 등장에 청성파 검객들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졌다. 군중들 사이에서도 식견이 뛰어난 자들은 노인을 알아보고 외쳤다.
“청성신검!”
“천하십대검수!”
청성신검은 장문인보다 한 배분 높은 청성의 최고수로, 청성의 절공인 청운적하검을 대성했다고 알려진 검의 달인이었다.
오직 검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강호에서는 활동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때문에 실제로 청성신검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 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한 번이라도 청성신검의 검을 본 구파의 고수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니, 검을 휘두르지 않고도 천하십대검수에 이름을 올린 절세검객이었다.
청성신검이 서슬 퍼런 눈으로 맹룡휘를 노려보았다.
“흑도맹주라 하였느냐. 내 번잡한 것을 싫어해 멀리서 지켜만 보려 하였다. 허나 사문을 모욕하는 것을 계속 두고만 볼 수는 없는바.”
스르륵.
청성신검이 손짓하자,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이 뽑혀 나와 다시 그의 손으로 돌아갔다.
“네가 과연 흑도맹주라 자처할 자격이 있는지 묻겠노라.”
피식 웃은 맹룡휘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늙은이. 불만 있으면 잔말 말고 덤벼.”
그 순간, 청성신검의 전신에서 푸른 안개 같은 기운이 번지고 검은 은은한 적광으로 물들었다.
“내 청성의 이름으로 사파의 망종을 계도하리라!”
사자후와 함께 청성신검이 일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대성지경에 이른 청운적하검의 초식이었다.
검강이 선명하게 맺힌 검세는 산조차 반으로 쪼갤 듯 강력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대경실색한 무림맹주가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검강이 맺힌 검이 맹룡휘의 눈앞에 도달했다.
그러나.
“천하십대검수라고?”
피식 웃은 맹룡휘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청성신검의 바로 옆에서 나타났다.
극상승의 이형환위(移形換位)였다.
“내 눈에는 산에서 검만 휘두른 아집 센 늙은이 같은데. 단순한 도발에 걸려들어 허초 하나 구분 못 하는.”
“……!”
경악으로 부릅떠진 청성신검의 눈동자가 뒤늦게 맹룡휘를 쫓아서 움직였다.
그 짧은 순간 맹룡휘는 수많은 허초와 변초를 섞어 움직였다.
수십 가지의 속임수 속에 실체를 숨기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단순히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당했다고 말하기에는 저자의 실력이 너무나 비범하지 않은가!
“어찌 너 같은 고수가……!”
“비겁하게 싸우냐고?”
그러나 안목이 뛰어난 고수들이나 그것을 알아볼 뿐, 수많은 군중들에게는 압도적으로 패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맹룡휘가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
“그야 사파니까.”
그것이 청성신검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쩌어엉!
반으로 부러진 검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가 바닥에 꽂혔다. 의식을 잃고 혼절한 청성신검의 얼굴 바로 옆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