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80
580화. 삼십 년 전 약조
다시 자리에 착석한 백무흔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저 망아지 같은 녀석들 때문에 얼굴을 못 들겠군.”
“으하하! 뭐가 어때서 그러냐? 난 그 시절로 돌아온 것 같아서 좋기만 한데.”
백무흔은 남의 일이라고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고주열을 흘겨봤다.
“형님은 비응객이라는 멋진 별호로 응원을 받으니 좋으시겠습니다.”
“나는 오히려 네가 부러운데 말이다. 지금도 먹힐 만하니까 옥면공자라고 불러 주는 것 아니냐?”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 고주열은 백무흔의 얼굴을 보며 과장스레 감탄해 보였다.
“수룡이도 잘생기긴 했지만, 한창이던 시절에는 역시 무흔이 네가 조금 더 나았지.”
“……제발 형님까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냥 재미있으니 놀려먹는 겁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무흔은 한숨을 쉬었다.
관중석에서는 지금도 당소소를 필두로 한 학생들이 부채를 흔들며 옥면공자와 비응객을 연호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자신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어찌나 따가운지,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을 정도였다.
“거참…….”
청룡학관에 다니던 시절에는 옥면공자라는 별호를 마음에 들어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반백 살이나 먹은 지금도 그럴 수야 없었다.
치기 어린 시절에 저지른 장난들과 불량한 행실들이 떠올라, 부끄러움에 자꾸만 얼굴이 붉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내 이 기회에 반드시 옥면공자에서 벗어나리라!’
속으로 굳게 다짐하는 백무흔 옆에서, 고주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겠으니 그만 부끄러워하고 비무나 구경하자. 주변도 좀 둘러보고.”
“예.”
마침 졸업생 친선비무의 첫 번째 비무가 시작되었다.
주작학관과 백호학관을 졸업한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올라와 마주 포권을 취했다.
“무당의 조양입니다. 강호에서는 유운검(流雲劒)이라는 과분한 별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점창의 곽진입니다. 별호는 분광쾌검(分光快劍)으로, 보잘것없는 실력이지만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보잘것없다니요? 분광쾌검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유운검의 협행에 대해서는 귀가 닳도록…….”
잠시 겸손한 인사가 오간 후, 비무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검을 빼 든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서로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까가가강!
무당의 부드러움과 점창의 날카로움이 살아 있는 공방에 관중들이 감탄사를 쏟아 냈다. 구파일방의 절기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음. 상당하군요.”
하지만 백무흔의 감상은 그것이 전부였다.
잠시 후에 자신과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상대들을 두고도, 백무흔은 비무대에서 관심을 끄고 관중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고주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혀를 찼다.
“옥면공자의 자신감은 여전하구만? 그래. 너는 실컷 한눈이나 팔아라. 나는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부릅뜨고 지켜봐야겠다.”
대답 대신 피식 웃은 백무흔은 관중석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다.
-옥면공자 백무흔!
-청룡학관의 실력을 보여 줘라!
-오라버니! 당신을 사모해요!
삼십여 년 전, 용봉비무에 올라갔던 열여덟 살 소년 백무흔이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청룡학관 학생들이 앉아 있는 곳에는 과거의 친우들이 있었다.
-우승 못 하면 청룡학관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마세요!
문득 떠오른 명랑한 목소리에 백무흔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풉…….”
백무흔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리자, 의아함을 느낀 고주열이 물었다.
“응? 저기 뭐라도 있냐?”
“약빙이 말입니다. 저쯤에 앉아 있었습니다. 참 예뻤지요. 응원하던 모습이 어찌나 예뻤는지, 자꾸만 시선을 빼앗기는 통에 집중을 못 해서 곤란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제 그곳에는 청룡학관의 까마득한 후배들이 앉아 있었다.
고주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도 정말 대단하다. 사별한 지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약빙이 아직도 그리 좋더냐?”
백무흔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아시다시피 제가 좀 일편단심이지 않습니까?”
“아무렴. 그 지극한 마음 내가 잘 알지. 옥면공자가 매약빙을 만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처자들의 마음을…….”
“형님!”
“거, 귀청 떨어지겠군. 그만하면 될 거 아니냐.”
그 사이 첫 번째 비무가 끝났다. 점창의 분광쾌검이 백여 합 만에 승리했는데, 쏟아지는 환호성 속에서 두 사람은 건성으로 박수를 쳤다.
“곧바로 두 번째 비무를 속행하겠습니다.”
친선비무의 사회자가 구멍이 뚫린 목함에 손을 넣어 이름이 적힌 대나무패를 꺼냈다. 공정함을 위해 비무 순서를 무작위로 정하는 방식이었다.
“청룡학관 졸업생, 비응객 고주열 대협은 준비해 주십시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고주열은 순간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풀기 시작했다.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낫지. 가서 일 승 챙기고 오마.”
“우승은 어차피 무리이니 너무 힘쓰지 마시고요.”
“무흔아. 너 어째 점점 옛날 성격이 나오는 것 같다?”
“옛날 같았으면 형님한테 존댓말이나 했겠습니까? 선배도 아니고 동기한테?”
“……그래. 그거라도 해 줘서 고맙다 아주.”
두 사람이 농을 주고받으며 긴장을 풀던 그때, 백무흔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음?’
천무학관 졸업생들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적갈색 승복을 몸에 휘감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단호한 인상에 머리를 짧게 쳐올려 연배를 짐작하기가 좀처럼 어려웠는데, 무릎 위에 단정하게 올려 둔 검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세월이 묻어났다.
백무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형님. 저기 있는 비구니가 조금 전부터 형님을 노려봅니다만?”
“내가 아니라 널 노려보는 거다.”
“예?”
오랫동안 무림과 담을 쌓고 살아온 백무흔이었다. 그러니 난데없이 강호의 은원을 담은 듯한 눈빛에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말입니까? 저는 삼십 년 넘게 무림과 담쌓고 살았습니다만?”
“설마 너…… 기억 못 하는 거냐?”
“무엇을요?”
“죄 많은 놈…….”
“형님. 설명이나 제대로 해 주고 욕을 하십쇼!”
고주열이 답답해하는 백무흔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혀를 찰 때였다.
사회자가 두 번째 대나무패를 뽑아 외쳤다.
“천무학관 졸업생, 아미파의 멸절신니(滅絶神尼)는 준비해 주십시오!”
동시에 관중석에서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이 친선비무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었던 인물이 누구인지를 말해 주는 듯했다.
“드디어 멸절신니께서!”
“아미파를 대표하는 척사멸마의 검!”
“내 생전에 옥허삼십육검(玉虛三十六劍)을 견식하는 날이 올 줄이야…….”
백무흔을 고요한 시선으로 노려보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환호성은 더 커졌다.
저벅.
멸절신니는 가벼운 걸음으로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다른 무인들처럼 은근히 보법을 뽐내지도 않았고, 관중들을 신경 써 온화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고고한 존재감이 군중을 압도했는데, 백무흔은 미간을 모은 채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보니 아는 얼굴 같기도 하고…….”
“끄응. 너는 고민이나 많이 해 봐라. 나는 다녀올 테니.”
한 경기는 이길 줄 알았는데 글러 먹었군.
작게 투덜거린 고주열은 비무대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화려한 경공을 보여 주며 등장한 그에게 관중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비무가 시작되자 고주열은 비응객이라는 별호답게 발 빠른 몸놀림으로 멸절신니를 견제하며 기회를 노렸다. 뛰어난 경공과 검법, 한 번씩 번뜩이는 각법이 어우러진 연환식은 관중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궁지에 몰리는 쪽은 고주열이었다. 멸절신니의 검이 느릿하게 흐르듯 움직일 때마다 그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어느새 비무대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항복하겠소!”
결국 스스로 비무대 밖으로 물러난 고주열이 기권하면서, 비무는 멸절신니의 승리로 기록되었다. 관중석이 함성으로 가득 찼다.
비무대 위에 혼자 남게 된 멸절신니는 소란이 가라앉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빈승은 아미파의 금산산이라 합니다.”
“……금산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백무흔의 머릿속에 자리해 있던 아주 오래된 기억이 조금 선명해졌다.
멸절신니가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해묵은 은원을 청산하고자 합니다. 하여 후배님들에게 청하건데, 모두 이 비무를 포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구파일방의 무인들도 놀라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은원이라고?”
“멸절신니께 대체 어떤 은원이…….”
“비무를 포기하라니요?”
아무리 구파일방이 천무제를 통해 지휘권을 걸고 내기를 하였다고 한들, 멸절신니는 이런 자리에 직접 나설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미파의 장로이자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였다. 서른에서 마흔 줄의 중견고수들을 파견한 다른 구파와 달리, 장로가 직접 나선 곳은 아미파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기꺼이 이곳에 나선 이유는, 장문인과 함께 천무제 친선비무에 출전할 명단을 고민하다가 한 사내의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기권하겠습니다.”
“저 또한 기권하겠습니다!”
“멸절신니께서 은원을 온전히 청산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눈치를 보던 구파의 고수들은 장문인의 눈짓이나 전음을 받고는 하나둘 대회에서 기권했다.
승산이 없는 비무를 계속하는 것보다, 아미파에 약간의 빚이라도 지워 놓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합장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 멸절신니는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 표정이 싸늘해져 있었다.
“백무흔 공자. 이리 올라오세요.”
정확히 자신을 지칭해 부르는 말에, 백무흔은 다소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공자?”
“뭐 하냐? 얼른 가 봐라.”
자리로 돌아온 고주열은 쌤통이라며 백무흔의 등을 힘껏 밀었다.
“이거 참…….”
“백무흔 공자.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올라온 백무흔과 멸절신니가 똑바로 마주 섰다.
둘 다 고강한 무인답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희끗희끗한 새치라든가 분위기를 보면 묘하게 동년배라는 느낌이 있었다.
멸절신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많지만 묻지 않겠습니다.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다행이지요.”
“…….”
“삼십 년이 지났는데도 놀랍도록 변하지 않았군요. 세월이 그대만 비껴간 듯 합니다.”
“…….”
“바로 시작하지요. 검을 뽑으세요.”
멸절신니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검을 뽑았으나, 백무흔은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있었다.
“나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멸절신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무흔이 목소리를 낮춰 작게 질문했다.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소?”
그 순간, 멸절신니는 간신히 유지해 왔던 부동심을 깨뜨리며 일갈했다.
“삼십 년 전. 나와 했던 약조를 잊었단 말입니까-!”
멸절신니의 내공이 담긴 포효가 관중석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후폭풍은 그것보다 더 컸다.
“무, 무슨 소리를…….”
당황한 백무흔의 동공에 지진이 크게 일어났으며.
“저, 저거 설마…….”
“진짜야? 아미파 스님이랑?”
학생들은 경악을 금치 못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우지직!
“저……. 개잡놈이……!”
청룡학관의 차기 관주가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가 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