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82
582화. 삼십 년 전 약조 (3)
두 검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움직였다. 분명 두 사람의 발이 바닥을 찍었지만, 아주 작은 소리만 한 번 났을 뿐이었다.
탓!
상대에게 짓쳐드는 멸절신니에게서는 엄격함과 단호함이, 백무흔에게서는 기질적으로 타고난 자유로움이 엿보였다.
까앙!
검강이 맺혔음에도 오히려 첫 충돌보다 가벼운 소리가 났다. 그만큼 초식이 한층 정교해졌다는 의미. 두 사람은 상대를 힘으로 찍어누르지 않고, 충돌 즉시 검을 회수해 다음 초식으로 이어 나갔다.
까가가각!
두 검객이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칼날이 부딪칠 때마다 불티가 튀어 오르고, 순식간에 삼십여 합이 지나갔다.
그것만으로 사방에 날카로운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먼지가 돌개바람을 따라 비산하는 가운데, 멸절신니의 검이 백무흔의 어깨를 스치고 백무흔의 검은 멸절신니의 가사(袈裟) 자락을 베어 냈다.
관중들은 그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두 졸업생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어! 친선비무에서 이런 수준 높은 공방이라니…….”
“멸절신니의 옥허삼십육검이야 이미 유명하다지만, 대체 저 옥면공자라는 사내는 누굽니까?”
“청룡학관 졸업생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습니다.”
“언뜻 들리기로는 두 사람이 과거에도 용봉비무에서 대결을 펼쳤다는 것 같은데…….”
관중석의 웅성거리는 소음은 비무대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한 탓이었다.
멸절신니가 지닌 성품과 달리 옥허삼십육검은 실초와 허초를 구분하기 힘든, 변검의 정점에 있는 검공이었다. 느릿한 듯 보이다가도 어느새 빛살처럼 빨라지고,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사각에서 나타나는 등 실로 변화막측했다.
그에 맞서는 회풍검법은 끊임없이 휘도는 바람이었다. 언제 어떻게 날아올지 모르는 상대의 공격을 흘리고, 쳐 내고, 반격하는 모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는 바람이되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고고한 태풍이었다.
쩌어엉!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강하게 밀어낸 두 검객은 잠시 호흡을 정리했다. 허공에서 그들의 눈빛이 부딪쳤다.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백무흔이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말했다.
“삼십 년 동안 죽어라 검을 휘두른 모양이오?”
“그대야말로 강호를 등지고 유유자적하게 살아온 것치고는 검 끝이 날카롭군요.”
“무부(武夫)로 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나 삶은 투쟁이더군. 그리 녹록한 세월을 살지는 않았소.”
“…….”
짧게 검을 나눈 것이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이번에는 멸절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 가리지 못한 승부를 이제야 가리게 되었으니, 오늘이 삼십 년 전의 용봉비무 결승이라고 생각하고 임하시길.”
멸절신니의 당부가 담긴 말에, 백무흔은 저도 모르게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해의, 천무제 결승이라…….”
비무대 위에 선 두 사람을 지켜보는 수많은 관객들이 그 시절과 겹쳐 보였다.
겨울의 찬 공기를 후끈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던 열기, 목이 쉬어라 옥면공자를 연호하던 친우들.
평소의 호랑이 같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초조한 얼굴로 제자의 비무를 지켜보던 학생주임 매극렴의 모습까지.
하지만.
-꼭 우승까지 하고 와야 해요. 알았죠?
창백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약빙은 저기 관중석이 아닌 의원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용봉비무 팔강 경기가 있던 날부터 몸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본인은 익숙하다며 별것 아니라고 했지만, 백무흔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당신이 이렇게 아픈데 나보고 비무대회에 나가란 말이오? 싫소. 당신이 다 나을 때까지 옆에 있을 거요!
약빙은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그 사실이 거짓말인 것처럼 씩씩하다가도, 한 번씩 안색이 창백해지면 갑자기 피를 토하거나 숨소리가 거칠어지곤 했다.
그럼에도 당돌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지만.
-장난해요? 난 괜찮다니까요. 며칠 쉬면 다시 멀쩡해질 테니 용봉비무에 나가서 우승이나 하고 와요.
-그깟 비무대회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소. 그냥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거짓말.
-…….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한 거 알아요. 아버지랑 매일 특훈까지 했잖아요. 그래 놓고 이제 와서 관심 없었다고 하면, 내가 믿을 줄 알았어요?
-그건…….
-나 때문에 용봉비무를 포기한다면,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알겠소. 다녀오리다.
술병이 나서 기권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왜 술병이 났는지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하하. 간밤에 술이 과했는지 지고 말았지 뭐요. 속이 울렁거려서 검을 휘두를 수가 있어야지.
용봉비무의 우승자는 천무제가 끝난 이후에도 며칠간은 천무학관에 남아야 했다.
무림맹을 비롯해 정파의 명숙들과 인사를 나누는 등 온갖 행사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며칠간 아픈 약빙과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밤새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고집불통 같으니.
결국 사강에서 기권하고 돌아왔을 때, 약빙은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맨날 져 주는 척하면서 정작 중요할 땐 자기 멋대로라니까.
-몰랐소? 내가 바로 청룡학관 제일의 망나니, 백무흔이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났다.
약빙은 세상을 떠났고, 재능이 넘치던 청룡학관의 천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대부분 잊혔다.
“……고얀 녀석.”
관중석 한쪽에서 얄미운 아들 녀석이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대도 만만치 않은 고수인데, 애비 걱정이라곤 조금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백수룡이 두 손을 모아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꼭 우승해요!’
전부 알고서 꾸민 짓은 아닐 것이다.
백무흔의 마음 한편에 조금은, 삼십 년 전에 포기한 용봉비무에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방금 전까지는 몰랐으니까.
“어쨌든 기회를 만들어 준 건 고맙구나.”
피식 웃은 백무흔은 고개를 돌려 멸절신니를 바라봤다.
“기다려 주어 고맙소. 각오는 충분히 다졌으니, 결승전을 멋지게 마무리해 봅시다.”
멸절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비무대 중앙에서 겹쳐졌다. 뒤늦게 충격파가 터졌다.
쩌어어어엉-!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멸절신니의 검이 변화무쌍한 변화를 일으키며 수십 줄기의 궤적을 만들었다. 그 하나하나가 실초이자 허초였다.
그에 맞서 백무흔은 바람을 탄 것처럼 움직였다. 너울거리는 소맷자락이 검초에 베여 나갔지만 개의치 않고 상체를 슬쩍 틀어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측면으로 크게 돌아서면서 검을 연달아 쳐 냈다.
쩌저저저정!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신형이 엇갈렸다. 곧바로 돌아선 그들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백무흔의 검에 어린 푸른 강기와 옥허삼십육검의 옥빛 강기가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허공에 난마처럼 얽힌 수십 줄기의 궤적이 흐릿한 잔영을 남기고, 비무대 위에는 거미줄 같은 상흔을 새겼다.
두 검객의 품격이 느껴지는 대결이었다. 고성이나 기합, 강하게 밟는 진각 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검만으로 승자의 자격을 논할 수 있다는 듯, 그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검을 증명했다.
“…….”
“…….”
관중석의 군중들은 어느새 숨을 죽이고 비무를 지켜봤다. 눈을 깜빡이는 사람조차 드물 정도였다.
“하하하하!”
검을 휘두르던 백무흔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비무가 너무 즐거워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만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즐겁군요.”
멸절신니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평소 엄격하기로 유명한 그녀를 아는 아미파의 제자들이 작게 비명을 내지를 정도로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더 할 수 있겠소?”
“얼마든지 오시지요.”
검과 함께 어우러지는 두 사람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잠시나마 그들은 후기지수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무런 걱정 없이 무공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시절.
문파의 사형제들, 학관의 선후배 동기들과 어울려 수련하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때론 못된 장난을 치러 다니기도 하고, 누군가로 인해 가슴 설던 시절.
이젠 둘 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었지만, 지금 비무대 위에서 두 사람은 열여덟 살로 돌아가 있었다.
“……녀석. 완전히 신났구나.”
도끼눈을 한 채 사위를 노려보던 매극렴의 표정이 조금씩 부드럽게 풀렸다. 누구보다 빛나던 소년의 재능이 이제야 꽃을 피우는 모습에, 마냥 노려볼 수만은 없었다.
“이번에는 놓치지 말거라.”
쩌어어엉!
허공으로 날아오른 한 자루 검이 비무대 바닥에 꽂혔다.
멸절신니는 어느새 자신의 목에 드리워진 검을 바라봤다.
수십 년 전 자신과의 약조를 어기고 사라진 사내가, 눈앞에서 싱긋 웃고 있었다.
“내가 이긴 것 같은데?”
“망할 자식…….”
“……방금 뭐라고 했소?”
백무흔이 멍한 표정으로 묻자, 멸절신니는 정색하며 시치미를 뗐다.
“빈승이 졌습니다.”
“멋진 승부였소.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거웠소.”
“저 역시 그대와 이렇게 결말을 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시원섭섭한 얼굴이었다.
멸절신니가 패배를 인정하자 관중석에서 터질 듯한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한동안 비무대회의 사회자가 입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분위기가 겨우 진정된 후에야, 사회자는 졸업생 친선비무의 결과를 발표했다.
“오대학관 졸업생 친선비무의 우승자는 옥…….”
백무흔과 멸절신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기권했으니 방금 전의 비무가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잠깐만!”
급히 사회자의 말을 멈춘 백무흔이 그에게 귓속말로 부탁했다.
“부탁이니 그 별호는 빼고 이름만 말해 주시오.”
“예? 하지만…….”
이런 비무대회에서 별호 없이 이름만 호명하는 것은 자칫 무례하게 비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천무학관의 행사 진행에 대해서 뒷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 이름만 말해 주시오. 꼭!”
하지만 백무흔은 옥면공자라는 별호를 더 이상 공식화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원래 계획은 졸업생 비무대회에서 승을 쌓아 가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별호를 얻는 것이었는데, 첫 비무가 결승전이 되어 버리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괜찮으시다면, 빈승이 새로운 별호를 지어 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그때까지 비무대에서 내려가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던 멸절신니가 말했다.
“정말이오? 그렇다면 나야 너무 고맙지.”
백무흔이 화색이 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비무대회의 결승 상대인 멸절신니가 새로운 별호를 지어 준다면, 그 의미가 몇 배는 클 테니까.
하지만 백무흔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강호의 동도들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멸절신니가 내공을 담아 외치자 소란스럽던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멸절신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백무흔 대협은 과거에 저와 어떠한 일로 은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로 오랜 은원을 청산하게 되었으니, 자리를 양보해 준 구파의 후배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비무대회에 참석했다가 기권한 구파의 고수들이 포권으로 응답했다.
그들에게 인자하게 웃어 준 멸절신니가 백무흔을 돌아봤다.
“백무흔 대협은 과거 헌앙한 외모로 옥면공자라 불렸습니다. 뛰어난 검법을 생각하면, 외모만 지나치게 부각된 것이 너무도 아쉬웠지요.”
“음?”
뭔가 이상하다 싶었을 때 막아야 했지만, 그보다 멸절신니의 말이 빨랐다.
“하여, 저는 백무흔 대협에게 옥면신검(玉面神劍)이라는 새로운 별호를 지어 주려 합니다. 이만하면 출중한 외모와 검술 실력을 모두 대변할 수 있는 별호가 아닐지요?”
“그 무슨……!”
백무흔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으나, 멸절신니의 입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부디 청하건대, 강호의 동도들께서도 앞으로 백무흔 대협을 옥면신검이라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구파의 장로가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청하니,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관중들은 곧바로 천무제 졸업생 비무의 우승자, 옥면신검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옥면신검! 옥면신검! 옥면신검!”
그곳엔 누구보다 앞장서서 학생주임의 별호를 외치는 청룡학관 학생들이 있었다.
“금산산……!”
백무흔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멸절신니는 가볍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아미파의 금산산이 삼십 년을 기다려서 이룬, 작은 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