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42
642화. 개벽
하늘이 붉게 물든다.
마치 지옥도가 펼쳐진 지상의 풍경을 거울처럼 비추는 듯했다. 끔찍한 비명과 괴성이 끊이질 않고, 핏물이 분수처럼 치솟을 때마다 역겨운 혈향이 코를 찔렀다.
허나 그것만이 밤하늘이 붉게 덧칠되는 이유는 아니었다.
스스스슷…….
점차 규모를 키워 가는 붉은 운무가 서서히 하늘까지 잠식하고 있었다. 천하 각지에서 움튼 역천의 기운이 한곳으로 모여들면서 점점 강성해지는 탓이었다.
“시작되었나.”
범인들에게는 아득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 하늘을 원망해 온 존재가 준비한 계획.
그것의 결말을 지켜보는 사내의 입가에는 지렁이 같은 흉터가 꿈틀대고 있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천무결의 시선이 향하는 곳.
네 명의 절세고수가 하늘 위에서 천신들처럼 신위를 떨치고 있었다.
무공으로 재해를 일으키는 초인들이 생사를 다투는 공간이었다. 휘몰아치는 기파만으로도 폭풍을 만들어 냈다. 구파의 이름난 고수들도 그 주변으론 얼씬하지 않았다.
저들과 동격의 고수가 아니고서야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천무결은 어렵지 않게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쿠르르르릉!
붉은 운무로 잠식된 밤하늘에 뇌성벽력이 내리칠 때마다 어둠이 잠시 걷히고, 순간순간의 장면이 시야에 담겼다.
그 순간 천무결은 똑똑히 보았다.
피처럼 붉은 적발적안과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 권태로우면서도 나른한 웃음을 짓는 존재.
“혈마여…….”
으득.
천무결은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저 혈마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그 반대편에는 혈마와 운명으로 맞서는 사내가 있었다.
쩌저저저저정!
두 손에 검과 도를 나눠 들고 신들린 듯 휘두른다. 육신으로 펼치는 움직임에 한계가 보이지 않았고, 동시에 새하얀 기류가 사내의 몸을 보호했다.
더 이상 청룡신협이라는 별호는 저 사내를 표현하기에 부족해 보였다. 오늘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그를 무신(武神)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백수룡.”
천무학관주와 뇌신이 백수룡을 도와 합공하고 있었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혈마와 백수룡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보조가 늦어지고 있었다. 그만한 격차가 존재했다.
쿠웅- 쿠웅- 쿠웅-
혈마와 백수룡이 충돌할 때마다 조금씩 어떤 진동이 커져 갔다.
천무결의 감각에는 그 파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른 절세고수들조차 단순히 싸움의 여파로 여길 테지만, 평생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그는 그것이 어떤 징조임을 알고 있었다.
쿠웅- 쿠웅- 쿠우웅―!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까마득한 높이의 하늘에서, 압도될 만큼 거대한 소용돌이가 천천히 휘몰아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하늘이 열리려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움직임을 느끼는 것은 천무결뿐이었다.
“극한에 이른 두 역천의 힘이 충돌할 때, 천지 간의 조화가 무너지고 개변이 일어난다. 시간과 공간이 무의미해지고, 지금까지 알던 세상의 법칙들이 무너진다. 그것이…….”
개벽(開闢). 혈마가 기나긴 삶을 살아오며 바라 온 숙원이었다.
“그리고 네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이지.”
천무결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는 흑야마제와 백수룡을 동시에 시야에 담았다. 쌍둥이처럼 닮은 두 사내의 얼굴을.
쿠웅- 쿠웅- 쿠우우웅……!
하지만 하늘의 문은 진동하기만 할 뿐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백수룡이 아직까지 역천신공을 펼치지 않고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곁에 누군가를 둔 것이 약점이라고?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
천무결은 백수룡과 객잔에서 나눴던 대화를 잠시 떠올렸다.
혈마에게 잠식되기 직전까지 갔던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몸부림치며 벗어나던 모습은 꽤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틸 수 있을까?’
한 번은 그저 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운에 세상의 운명을 걸기엔, 혈마라는 존재는 너무나 위험했다.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발버둥으로 끝날 것인지, 혈마가 네게 강제한 운명을 부수고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것인지…….”
그 결과는 지켜보면 알 것이다.
어찌 되었든 천무결은 발톱을 숨긴 채 가장 치명적인 순간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 * *
“나는 널 찾아온 거란다. 나의 온전한 이해자이자 유일한 대적자여.”
피처럼 붉은 입술이 요사스럽게 속삭였다.
홍옥처럼 빛나는 눈동자도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달랐다.
무엇이든 찢어발길 것처럼 광폭하고 거친 기운 대신, 권태로우면서도 나른한 미소. 가벼운 눈짓 하나로도 사람을 홀릴 듯한 그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야 나타나셨군.”
백수룡은 흑야마제의 몸을 빌려 재림한 혈마를 노려봤다.
그런데 그 순간, 혈마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봐. 멋대로 지껄이지 말랬지?”
다시금 흑야마제의 목소리였다. 광폭해진 기운이 사납게 요동쳤다. 잠시 잦아들었던 흑야마경의 기운이 강해지며 심연 같은 왼쪽 눈동자가 타올랐다.
“……정숙하라. 나와 운명을 함께할 아이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번에는 핏물처럼 붉은 오른쪽 눈동자가 타올랐다. 다시 혈마의 목소리였다.
하나의 입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번갈아 흘러나왔다. 그때마다 기질과 기운마저 변화하는 것이 미치광이가 따로 없었다.
잠시 다투던 기운은 이내 혈마 쪽으로 기울었다. 으르렁거리던 흑야마제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요사스러운 입에서는 다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망설이는가? 네 안의 역천의 힘을 봉인한다고 해서 운명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혈마의 물음에 백수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잠시 호흡을 고르고 있던 천무학관주가 흥분해서 반응했다.
“하하하하하! 놀랍구나! 역천신공은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던가? 그 안에 영혼마저 담을 수 있었다니…….”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도 천무학관주는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주변에 호위하듯 떠 있는 신병이기들의 태반이 부러져 있었는데도 기쁜 듯 웃고 있었다.
“과연 천마신공과 더불어 고금제일마공이라 불릴 만하다. 내가 평생을 찾아온 무학이다.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면서도 눈에 비친 광기는 여전했다. 그리고 그 순간, 천무학관주의 머리카락이 치솟으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악-!
하늘을 잠식한 붉은 운무의 일부가 천무학관주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수많은 무학을 스스로 깨치고 익혀 온 광인은 역천신공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천지 간에 가득한 역천의 기운, 혈마와 직접 부딪치며 깨달은 이치, 지극히 뛰어난 오성과 무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은 불가능의 영역을 넘보게 만들었다.
“너처럼 영생을 살면서 무학의 극의를 궁구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무학에 대한 뒤틀린 광기와 집념이 맞물려 새로운 역천의 씨앗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혈마는 자신의 모습을 흉내 낸 미치광이를 간단히 표현했다.
“잡스럽구나.”
가볍게 내친 손에 실린 힘이 천무학관주를 후려쳤다. 시뻘건 강기의 소용돌이가 그를 분쇄할 것처럼 휘감았다.
“크하하하하하하!”
그러나 천무학관주는 피투성이가 되어 가면서도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사방으로 핏물이 튀었으나 상처는 금세 회복되었다.
“혈마여! 내게 더 가르침을 다오! 역천의 힘을 다루는 법을 알려다오!”
그의 역천신공에 대한 끈질긴 집착은 흑야마제와 같은 재생의 공능마저 발현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혈마의 한쪽 입꼬리가 나른하게 올라갔다.
“불순물이 섞여 열등하나, 그 또한 나름대로의 쓸모가 있구나.”
그때부터 혈마와 천무학관주는 패도적인 기파를 터트리며 격돌했다. 드높은 상공에서 충돌하는 데도 그 여파가 지상을 헤집어 놓을 정도였다.
“……백수룡.”
남궁수는 피곤이 역력한 표정으로 백수룡을 돌아봤다.
천무학관주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할 수 없게 돼 버린 상황.
아예 예상치 못한 변수는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천무학관주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사방에 가득한 삿된 기운을 느낀 것은 천무학관주만이 아닐 터였다.
“도망쳐.”
“뭐?”
순간 남궁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점점 더 붉어지는 하늘을 둘러보는 백수룡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최대한 멀리. 학생들을 데리고 도망쳐.”
“……헛소리하지 말도록. 네가 내게 했던 부탁을 벌써 잊었나?”
남궁수는 애써 냉정함을 유지했다.
비록 백수룡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머리 색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내는 삿된 존재가 아니라 청룡학관의 버릇없는 후배 강사였다.
그 순간 백수룡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취소할 테니까 도망치라고. 지금 여기가 중요한 게 아냐. 곧 있으면…….”
백수룡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을 올려봤다. 그의 손에서는 창룡신검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남궁수는 백수룡을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봤다.
콰콰콰콰콰콰……!
밤하늘이 거대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검붉은 구름이 해일처럼 휘도는 모습이 마치 신화 속의 교룡이 똬리를 트는 것 같았다. 적어도 도시 전체를 휘감을 정도의 크기는 될 것이다.
그 너머에서 절세고수의 감각조차 아득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백수룡은 그것의 정체를 직감했다.
“개벽…….”
천무학관주가 스스로 창안한 불완전한 역천신공의 기운이 하늘을 자극한 탓에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아직 하늘이 열리지는 않았으나, 그 징조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저것도 혈마의 짓인가?”
남궁수가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끝내 분노를 드러내기 시작한 하늘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해 보였다.
그 순간, 그 하늘에 도전한 존재가 선언했다.
“누구도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혈마의 몸이 더 높은 하늘로 치솟았다.
천무학관주가 괴소를 흘리며 따라붙었으나 혈마는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로소 숙원을 이루기에 충분한 힘이 모였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그저 약간의 제물이었다.
지상에서 싸우고 있는 무인들의 피, 그리고 도시에 있는 양민들의 피 정도면 충분하리라.
촤악-
스스로 손바닥에 상처를 낸 혈마는 자신의 피로 허공에 술식을 그렸다. 복잡난해한 술식이 순식간에 반경 십여 장을 가득채웠다.
“너희들의 피로써 하늘을 열리라.”
그 순간, 혈마의 몸에서 터져 나온 붉은빛이 천지를 뒤덮었다.
“크허어헉!”
천무학관주는 고통스러워하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급하게 흉내 낸 역천신공으로는 지근거리에서 폭발한 혈마의 힘을 견뎌 내지 못했다.
남궁수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내공을 끌어 올리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내상을 입은 그가 중심을 잃더니 백수룡에게 한마디를 남기곤 지상으로 추락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도록.”
백수룡도 무사하지 못했다. 혈마의 기운에 고스란히 노출된 그는 이를 악물었다. 몸 안에서 날뛰려는 역천신공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아직도 망설이느냐? 내 손을 잡거라. 나와 함께 하늘이 내린 운명에서 벗어나자.”
어느새 다가온 혈마가 백수룡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힘을 쏟아 낸 탓에 수척해 보였지만, 필사적으로 들끓는 기운을 가라앉히고 있는 백수룡보다는 훨씬 나았다.
“끄윽……. 지랄하지 마.”
혈마를 노려보던 백수룡은 뒤늦게 익숙한 기운을 느끼고 지상을 바라봤다.
쿠구구구궁……!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너른 평야였던 땅에서 기암괴석이 여기저기 솟구쳤다.
치이이익…….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유황 냄새가 지독했다. 바닥이 갈라지며 용암이 느릿하게 흐르는데, 지상에서 싸우던 무인들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윤회연옥진…….”
백수룡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범위에 펼쳐진 술법진을 바라봤다.
윤회연옥진은 과거 혈교가 네 사부들을 노릴 때 펼쳤던 절진으로, 마공을 익히지 않은 무인들은 저 안에서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저들의 운명도 네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손을 잡는다면, 모두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겠지.”
가까이 다가온 혈마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존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나는…….”
백수룡이 무언가 말하려고 한 순간이었다.
휘이이이익!
구름을 뚫고 솟구친 존재가 있었다. 넘실거리는 역천의 기운, 윤회연옥진의 영향 따위는 조금도 받지 않는다는 듯 맹렬한 기운을 전신에 두른 사내가 혈마의 뒤를 잡았다.
백수룡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사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