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46
646화. 이곳은 너의 지옥이다
한순간에 바뀐 풍경을 둘러보는 혈마의 입에서 희열 어린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놀랍구나…….”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전장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폐허가 된 땅에 시산혈해가 배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흉수의 증오가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잔인하게 베이고 찢겨 나간 시체들, 산사태라도 맞은 것처럼 무너진 건물들과 뒤집힌 땅거죽, 곳곳에 얼어붙은 시체들이 보였다.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짙은 혈향까지도 완벽했다.
이곳에는 하나의 세계가 온전하게 구현돼 있었다.
“왠지 익숙하지 않나?”
역천신공의 기운을 잠시 가라앉힌 듯, 백수룡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특별히 추억할 만한 장소로 준비했거든. 아, 나랑은 다르게 전생이 누더기처럼 너저분해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역천의 운명이여. 너와의 기억은 내게도 특별한 것을.”
화아악-
혈마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살풍경한 공간에 새로운 그림이 덧입혀진다. 수많은 인물들이 반투명한 형상으로 나타나 움직이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뇌옥의 죄수들이 탈옥했다!
배교자다! 죄수들을 풀어 준 배교자가 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
백수룡은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무심히 바라봤다.
뇌옥에서 탈출한 이십칠호와 네 명의 사부들이 자신들을 포위한 혈교도들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곳은 그들이 마지막 싸움을 벌였던 장소이자, 혈마가 이십칠호의 심장에 혈마검을 꽂아 넣은 곳이었다.
“가장 강렬했던 전생의 기억과 분노를 연료로 이곳을 구현해 냈구나. 참으로 갸륵하다.”
혈마의 목소리에서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이 묻어 나왔다.
백수룡은 무공의 영역을 초월한 이적을 펼쳤다.
그것은 하늘을 기만하는 경지에 닿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너는 진정으로 역천신공을 대성(大成)하였구나.”
백수룡을 향해 다가가는 혈마의 새빨간 보석안에서 혈루(血淚)가 흘러내렸다.
아득한 삶을 반복하며 준비한 순간을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자신을 흉내 내 또다른 윤회지옥을 만들어 낸 존재와의 만남.
어찌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 이곳이 너의 지옥이구나.”
너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서글픈 말투에, 백수룡은 같잖다는 듯 비웃었다.
“이렇게 되길 바라고 몇 번이고 보여 준 게 아니었나? 아니라면 날 너무 얕봤군.”
백수룡이 허공에 손을 휘젓자 전투를 벌이던 환영들이 전부 먼지처럼 푸스스 흩어졌다.
사라지는 네 사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백수룡은 이내 고개를 돌려 혈마를 바라봤다.
극성에 이른 혈마안이 상대를 꿰뚫을 것처럼 붉게 번뜩였다.
“죽여 주마.”
진득한 살의를 담은 한마디와 함께, 백수룡은 그동안 힘겹게 억눌러 왔던 기운을 모조리 해방했다.
전신을 휘감은 기류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피에 젖은 무복이 미친 듯이 펄럭이고, 머리끝부터 붉게 물든 적발이 하늘로 솟구쳤다.
쿠르르릉……!
두 발을 디딘 지면이 요동치기 시작하고, 바닥의 흙먼지와 돌멩이 따위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저 기운을 풀어 낸 것만으로 천지 간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
혈마의 웃음소리에 대기가 진동했다.
상상 이상의 신위를 드러내는 백수룡의 모습에 놀랐으나, 그조차도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충돌하는 두 역천의 기운이 강하면 강할수록, 개벽에 더욱 가까워지리라.
“그래. 오직 너만이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너만이 나와 대등하기에. 허나 그조차도 내게는…….”
“주절대는 그 주둥이부터 찢어 주지.”
나직한 경고와 함께, 백수룡의 모습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혈마의 몸이 수십 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콰가가가가가!!
검을 맞댄 두 사내의 얼굴이 거의 닿을 듯 가까웠다.
혈마를 밀어붙이는 백수룡 맞은편으로, 어느새 혈마의 손에도 백수룡과 같은 혈마검이 들려 있었다.
“……아릿한 통증.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로군.”
혈마는 입술에 난 상처를 혀로 핥았다. 입술엔 핏방울이 맺혀 있었는데, 그 전과 달리 상처가 쉽게 재생되지 않았다.
“벌써부터 아프면 안 되지. 이제부터 시작인데.”
백수룡의 입가에도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왼손의 적월을 벼락처럼 휘둘렀다.
촤아악!
붉은 머리카락 몇 올이 허공에 흩날렸다. 그 순간 둘로 찢어진 혈마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이형환위의 잔상이었다.
‘놓치지 않는다.’
백수룡의 눈동자가 즉시 혈마를 좇아 움직였다. 바로 지척이었다. 몸을 옆으로 트는 순간 미간을 노리고 찔러 오는 검극이 보였다.
새빨간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친 찰나의 순간,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로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푸화악!
서로의 몸에 핏물을 번지게 한 그들은 곧바로 돌아섰다. 두 신형이 재차 충돌했다. 끊임없이 부딪치고 교차하면서 흐릿하게 섞여 들었다.
쿠구구궁……!
진작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월자들의 싸움은 일대를 폐허로 만들었다. 힘과 힘이 부딪쳐 생긴 여파로 인해 땅에 깊은 고랑이 생기고, 이미 무너진 건물들이 산산이 조각나 먼지로 변했다.
쩌저저저정! 콰아아앙-!
어느 쪽도 서로를 압도하지 못하는 가운데 수백 합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늘을 찢고 산을 조각낼 공격을 서로의 몸으로 감당했다. 호신강기조차 큰 의미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육신은 핏물로 젖어 들었다. 인간이라면 진즉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가 수십 갈래로 새겨졌다.
그러나 둘 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역천신공의 공능으로 벌어진 상처를 붙들고, 꿰매고, 지져 버리면서 검을 휘두르기를 반복했다.
“……이토록 고전하게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정녕 놀랍구나. 처음으로 이 몸뚱이가 비천하게 느껴질 정도이니.”
혈마는 거칠게 호흡하면서도 기쁜 듯 중얼거렸다. 핏물처럼 일렁이는 혈마 안에서 악의 어린 어떤 탐욕이 느껴졌다.
백수룡은 대꾸하지 않았다. 싸움에 온전히 집중한 그는 오로지 하나의 일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반드시 이 안에서 죽여야 한다.’
혈마의 수법을 흉내 내, 역천신공으로 심상의 영역을 구현하여 그 안에 가둔다.
그것이 백수룡이 세운 계획의 핵심이었다.
이 안에서라면 백수룡은 신과 같은 권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상대가 숨을 쉬지 못하게 하는 것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혈마에게는 그 대부분이 통하지 않았다.
‘통하지 않을 거란 건 예상했어.’
혈마가 역천신공의 창안자이자 그 자체이기 때문일 터였다.
백수룡에게 절대적인 영역 안에서도 놈은 역천신공으로 호흡하며 그 힘을 거의 비슷하게 다뤘다.
하지만 백수룡은 실망하지 않았다.
‘최소한 대등한 조건은 만들었다. 이 안에서의 통제력은 미세하게나마 내가 더 위야.’
혈마와 직접 수백 합 이상 부딪치면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상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던 전장을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었다.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스스로의 무력함에 화가 나는가? 나 또한 오랜 시간 그런 기분을 느껴 왔다. 하늘이 나를 외면하고, 거부하고, 문을 닫아 버렸을 때부터.”
매혹적인 미소를 띤 입술이 핏물을 머금은 듯 붉었다. 혈마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로부터 역천(逆天)이 시작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준비된 너와 나의 운명이지. 비로소 개벽(開闢)이 시작되리니, 하늘을 보아라.”
백수룡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콰콰콰콰콰콰-!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밤하늘의 중심에서, 무수한 별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저 하늘만큼은 백수룡이 기억하는 과거와 유일하게 달랐다. 그가 의지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구현한 모습 또한 아니었다.
극한에 이른 두 역천의 힘이 충돌함에 따라, 끝내 하늘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거부할 필요 없다. 전생에서 현생으로 이어지는 너의 모든 운명조차 내가 안배한 것. 내게 순종하는 것 또한 정해진 일일진저.”
백수룡과 혈마는 허공에서 손속을 나누며 점점 더 하늘 높이 상승했다. 마치 무언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이 그들을 위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콰콰콰콰콰콰-!
어느새 그들은 거대한 기파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 안에서도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빛이 번쩍일 때마다 핏물이 허공에 흩날리고, 의복은 완전히 쓸모를 다해 상처투성이인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쩌저저적……!
풍경조차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개벽의 여파는 백수룡이 구현해 낸 심상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금쯤 바깥에서도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공간에서의 싸움은 찰나 같기도 하고, 끝나지 않을 영원 같기도 했다.
“어째서…… 멈추지 않는 것이냐?”
혈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벼린 듯한 기세가 그대로였다.
지금쯤이면 이 하릴없는 싸움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도 남았을 텐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 무지몽매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이 개 같은 역천신공을 익히면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게 하나 있는데, 뭔지 알아?”
백수룡은 전신에서 핏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그가 히죽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역천의 운명은 하늘조차 알 수 없다.”
“…….”
“하늘도 모르는 걸 너 같은 미치광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나?”
혈마는 설득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막대한 역천의 기운이 혈마검으로 스며들었다.
우우웅-!
저 안쓰러운 발버둥을 멈추게 하려면 결국에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때였다.
“이봐. 흑야마제.”
갑자기 역천신공을 거둔 백수룡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혈마의 얼굴에 순간 곤혹스러움이 어렸다.
“듣고 있지? 너 같은 미친 새끼가 순순히 사라졌을 리 없잖아. 분명 나오고 싶어서 그 안에서 아득바득 이를 갈고 있겠지.”
“……소용없는 짓을 하는구나.”
백수룡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흑야마제를 불렀다.
“혈교도들을 우르르 몰고 왔을 때만 해도 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그게 끝이었나?”
백수룡은 지금까지 혈마와 역천신공을 끊임없이 부딪치며 그 기운을 상당 부분 소모하게 만들었다.
“실망스러운데. 이건 뭐, 혈마가 잡아먹기 좋게 키워 놓은 돼지 새끼에 불과했군.”
“……멈춰라.”
백수룡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혈마는 푸들거리는 팔을 내려보며 경고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혈마라고 하더라도, 백수룡이 만들어 놓은 심상 영역 안에서 힘을 보전하며 싸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소모한 기운을 당장 회복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혈마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역천신공 그 자체인 혈마의 절대성을 훼손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바로 불순물을 섞어서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싸움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소모전이었다.
백수룡이 피식 웃으며 도발에 쐐기를 박았다.
“병신 같은 놈. 계속 그렇게 처박혀 있다가 뒈지시든가.”
그 순간 혈마의 몸이 기이하게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괴소를 흘렸다.
“크크크크…….”
그것은 그 전과는 확연히 다른 짐승의 울림이었다. 조금 전까지 혈마였던 존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만 재미 보면 내가 좀 섭섭한데?”
그 한쪽 눈동자가 심연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