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66
외전 7화. 이해해 줄 겁니다
“수룡아. 무얼 그리 생각하느냐?”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백수룡이 매극렴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요. 제자 녀석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쯧쯧. 백룡장을 비운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너무 걱정치 말거라. 마냥 어린아이들도 아니지 않더냐.”
이 순간 백수룡이 궁금해하는 제자들은 청룡오망만이 아니었지만, 그는 외조부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대신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전부 어린애는 아니긴 하죠.”
지금쯤 사곤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친우들과 함께 어디에 있을까.
건환, 감윤, 이신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하고 있을까.
종종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백수룡은 실없이 웃곤 했다.
“녀석. 싱겁기는.”
손자의 웃음을 본 매극렴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노인은 그저 손자가 자주 웃게 된 것이 좋았다.
“음식이 다 식겠구나. 어서 먹거라.”
“예……. 저, 저기, 할아버님?”
탁자로 고개를 돌린 순간, 백수룡은 어느새 자신의 앞에 잔뜩 놓인 수많은 요리들과 마주하고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그러느냐? 조금 더 시켜 주랴?”
“그게 아니라…… 너무 많은데요? 다 먹었다간 나가서 걷지도 못할 겁니다.”
백수룡이 엄살을 부려 보았으나 매극렴의 표정은 완고했다. 평생 타협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검객의 눈빛이었다.
“사내가 되어서 이 정도도 먹지 못한단 말이냐? 게다가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더욱 잘 먹어야지.”
“그래도 이건…….”
“어허!”
매극렴은 생사신의가 백수룡에게 내린 처방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신의께서 완벽하게 몸을 회복하려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면서 일 년은 족히 정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잊은 게냐?”
분명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백수룡은 생사신의가 대단히 원망스러웠다. 그가 조금 울상이 되어 말했다.
“잘 먹으라는 말이 배 터지게 먹으라는 뜻은 아니지 않았을까요……?”
백수룡이 소심하게 반항해 보았으나, 외조부의 절절한 손자 걱정을 이길 수는 없었다.
“수룡아. 네 명성이 천하에 으뜸이 되었다. 혈교가 사라졌다지만 제 이름을 높이고자 널 노리는 자들이 생길 게다. 그러니 서둘러 몸을 회복해야 할 터. 할애비와 애비가 지금처럼 항상 네 옆에 있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말하며 매극렴은 손자의 그릇에 고기반찬과 나물을 듬뿍 올려 주었다. 한 입에 먹기 힘들 정도였다.
백수룡은 일단 볼이 터져라 입 안에 음식을 넣고는 매극렴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 절세고수입니다. 완벽하게 낫지 않아도 어지간해서는 제 적수가 없는데…….”
본인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백수룡은 천하무림이 인정한 당대의 천하제일인이었다.
역천신공을 버린 지금도 그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매극렴이 그 말을 가만히 듣더니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했다. 절세고수의 소화 능력이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지. 자자, 어서 더 먹거라. 이보게, 점소이! 오리고기 한 접시만 더 내오게!”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백수룡은 꾸역꾸역 매극렴이 주는 음식을 위장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허허. 그래. 잘 먹는구나. 부족하면 말하거라. 내 얼마든지 더 사 주마.”
매극렴은 흐뭇한 얼굴로 손자가 우물우물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표정이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도 좀 도와줘요!]반면 궁지에 몰린 백수룡은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옆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음을 보냈지만, 백무흔은 한량처럼 홀짝홀짝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이 녀석아. 이게 다 네 업보다.”
백무흔은 낄낄대며 느긋하게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데,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처음으로 세 사람이 함께 떠난 여행길이었다. 전에 없이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괜한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매극렴은 손자가 잘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표정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졸업식 준비는 잘되고 있을는지 걱정이구나.”
“다른 선생님들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시겠지요. 저희보고 걱정하지 말라면서 등 떠밀어 보내지 않았습니까?”
백무흔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혈교와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후, 청룡학관의 졸업식까지 잠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 기간에 세 사람은 짧은 휴가를 받았다.
사실 예상하지 못했던, 노군상에 의해서 반쯤 강제로 주어진 휴가였다.
-이번 기회에 셋이 함께 고향에라도 다녀오게. 지금이 아니면 바빠져서 언제 또 다녀오겠나?
매극렴은 처리하고 준비해야 할 업무가 많다며 거절하려 했으나, 퇴임을 앞둔 노군상의 고집은 그 이상으로 완고했다.
게다가 부관주 곽철우, 그리고 남궁수도 세 사람을 휴가 보내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제발 좀 다녀오십시오. 검치 선배는 삼십 년간 휴가 한 번 제대로 안 쓰시지 않았습니까?
-더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서는 휴식도 필요한 법입니다.
그렇게 반쯤 떠밀려서 출발하게 된 여행이었다.
목적지는 백수룡의 생가이자 어린 시절을 보낸 강서 회창의 백무관.
강호를 유람하던 백무흔과 매약빙이 정착한 집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매극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오니 좋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음식을 먹느라 고역인 백수룡을 제외하고, 장인과 사위가 함께 흘러가는 창밖 풍경을 조용히 지켜볼 때였다.
“저기…….”
떨리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웬 여인이 긴장된 표정으로 다가와 있었다.
객잔 주인장의 딸이었다. 수줍게 다가온 여인이 조심스럽게 손에 들고 온 떡을 내밀었다.
“아, 괜찮습니다. 음식은 이미 충분히…….”
꽤나 익숙한 상황에 백수룡이 먼저 거절의 의미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여인이 내민 떡은 백수룡을 지나서 백무흔에게 향했다.
“이것 좀 드셔 보셔요. 아까부터 술만 드시고 안주는 안 드시는 것 같아서……. 그러다 속 버리십니다.”
수줍은 목소리 뒤에서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고 있었다. 고수가 아니더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하하. 고맙습니다.”
백무흔은 거절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면서 여인이 건넨 떡을 받았다. 그러자 여인이 용기를 내며 말했다.
“저기, 혹시…….”
“마침 제 처가 좋아하는 떡이군요. 가져다주면 참 좋아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순간 눈동자가 커진 여인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아……. 그, 그렇군요. 맛있게 드세요.”
부친의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능숙한 거절에 백수룡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분야에도 고수가 있다면 자신의 아버지는 분명 초절정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매극렴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사위를 노려봤다.
“……보셨겠지만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백무흔이 억울해하는 것과 별개로, 매극렴의 눈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쯧쯧. 애초에 네놈이 평소에 행실을 똑바로 했으면 생기지 않을 일이 아니냐.”
“제가 뭘 어쨌다고요?”
“객잔에서 한량처럼 술을 마시는 것부터가 잘못됐다. 네놈은 나이를 먹어도 어찌 하는 짓이 풍류공자가 따로 없구나.”
그 옆에서 백수룡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백무흔은 가만히 술만 마시고 있어도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가끔 보면 사람을 홀리는 특수한 기공이라도 익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냥 타고난 것 같지만.’
물론 당사자로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그러나 백무흔은 이런 모함조차 익숙하다는 듯, 깊게 한숨을 쉬며 술병을 기울였다.
“하아……. 잘못이 있다면 잘생기게 태어난 것이 잘못이겠지요. 범인(凡人)으로 태어난 장인어른께서 제 고충을 어찌 아시겠습니까.”
“이놈이? 뭘 잘했다고 한숨을 쉬느냐!”
수십 년이 흘러도 얄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모습에 매극렴이 젓가락을 검처럼 휘둘렀고, 백무흔도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파바바박!
젓가락과 젓가락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부딪치며 불티가 튀었다.
“하하! 언제까지 장인어른에게 쥐어박히던 백무흔이 아닙니다!”
“삼십 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보여 주마!”
백수룡은 오늘도 어김없이 옥신각신하는 외조부와 부친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들도 아니고…….”
두 사람이 수시로 싸우는 것만 제외하면, 평범하고 여유로운 여행길이었다.
* * *
세 사람은 때로는 빠르게 경공을 펼치기도 하고, 때로는 느긋하게 풍경을 구경하기도 하며 걸었다. 그들의 무위를 생각하면 졸업식 전에 고향에 다녀올 시간은 충분했다.
대부분 작은 시골 마을을 거치며 갔기에, 누군가가 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영물보다 보기 힘든 잘생긴 사내들의 등장에, 마을에만 들어가면 동네 아낙들이나 처녀들이 힐끔거리기 일쑤였다.
“사위고 손자고 강호의 큰 우환거리가 되었구나. 안 되겠다. 돌아갈 때는 인피면구라도 하나씩 구해서 써야지.”
종종 적극적인 여인들이 백무흔이나 백수룡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매극렴은 혀를 차며 탄식했다.
특히 여인들이 백무흔에게 은근히 추파를 던질 때마다 못마땅하게 눈을 흘겼다.
“네놈은 일찍이 내 딸과 혼인해서 다행인 줄 알거라. 강호에 나섰다간 필시 색마로 악명을 떨쳤을 게야.”
“수룡아, 외조부 말씀 잘 들었지? 사내가 여인을 잘 만나야 하는 이유다.”
“하여간 입은 살아서…….”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매극렴은 평소보다 말이 더 많아졌고, 백무흔에게 불쑥 시비를 걸었으며, 손자에게 먹일 음식을 더욱 많이 시켰다.
‘아무래도 심란하신 것 같죠?’
‘삼십 년 만이니 오죽하겠느냐.’
부자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로에게 눈짓을 했다.
삼십여 년 만에 딸을 만나러 가는 길.
평소처럼 덤덤한 것처럼 보여도, 간혹 주름진 얼굴 위로 드러나는 감정이나 주변을 둘러볼 때 짓는 표정은 감출 수 없었다.
지금처럼 오랜 과거를 더듬는 표정으로 이렇게 물어 올 때도 있었다.
“……무흔아. 전에도 이 마을에 들렀던 적이 있느냐?”
“약빙이 수룡이를 가진 것을 안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도 한번 왔었지요.”
“허어! 어서 자세히 이야기해 보거라.”
마을 어귀의 객잔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백수룡도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 수룡이. 어쩜 눈이 엄마랑 이렇게 똑 닮았을까?
이제는 온전해진 기억 속에서, 자신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
아주 어린 시절이었지만 선명했다. 숨이 가쁘고 힘겨운데도 불구하고, 애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작게 흥얼거리던 모습.
“……수룡아?”
“너…….”
백수룡이 저도 모르게 그 흥얼거림을 따라 하자, 백무흔과 매극렴이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그냥 기억이 나서요.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노래였던 것 같은데.”
가사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라고 말하며 백수룡이 머리를 긁적였다.
매극렴과 백무흔이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백수룡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낯선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다.
“귀주 지방에서 부르는 자장가구만. 청년 어머니 고향이 그쪽인가 봐요?”
처음 보는 노파였다. 곱게 쪽찐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는데, 빙공처럼 특수한 내공을 익혀서가 아니라 세월에 따라 자연스럽게 물든 백발이었다.
“……맞소. 내 고향이 귀주라오. 내 딸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오.”
매극렴이 대신 대답했다. 그는 동년배로 보이는 노파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동향 사람을 만나 반가운 눈치였다.
노파 역시 반달웃음을 그리며 인사를 받았다. 젊었을 적에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리라 짐작되는 여인이었는데,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더니 매극렴 앞에 살며시 무엇을 놓고 갔다.
말린 과일이었다. 매극렴이 눈을 크게 뜨고 과일과 점점 멀어지는 노파를 번갈아 바라봤다.
“갑자기 이것을 왜……?”
그러자 백발이 곱게 물든 여인이 눈을 흘기며 작게 투덜거렸다.
“거, 영감탱이 눈치 없기는. 따라 나와서 말이나 걸어 줄 것이지.”
매극렴이 그 말을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얼굴이 붉어진 그가 헛기침을 연달아서 했다.
“허, 허허엄!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음흉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백무흔이 매극렴에게 속삭였다.
“장인어른. 범인이라고 했던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아직 충분히 청춘이십니다?”
“시, 시끄럽다 이놈아.”
그러나 건수를 잡은 백무흔이 멈출 리 없었다. 능글맞은 얼굴로 계속해서 장인어른을 놀려 댔다.
“잠시 나갔다 오셔도 됩니다. 약빙도 이해해 줄 겁니다. 수룡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닥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얼굴이 붉어진 매극렴이 검집을 휘둘러 방정맞게 구는 사위 놈의 입을 힘껏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