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69
외전 10화. 나들이
백무관 뒤편의 작은 언덕.
새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그곳에, 작은 봉분과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가는 길이 깨끗하구나.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었을 텐데.”
“촌장에게 한 번씩 정리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삯은 제대로 내고 부탁드린 것이냐?”
“물론이지요. 촌장 딸이 어렸을 때 몸이 허약해서 무공도 알려 주고, 영약도 조금 나눠 주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촌장님 딸. 몇 년 전에 시집가지 않았어요?”
“잘도 기억하는구나. 나랑 동갑인 촌장은 손자까지 보았는데 말이다. 내 아들이란 놈은 여지껏 짝도 없이 뭘 하는 건지…….”
“아니, 얘기가 왜 또 거기로 새요?”
“수룡아. 아버지 말씀 새겨들어라.”
“……넵.”
밤마실이라도 나선 듯, 세 사내가 천천히 언덕을 오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무림의 고수인 그들에게 집 뒤편 언덕은 한 호흡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셋 모두 일부러 늦장이라도 부리듯 천천히 걸었다.
언덕을 오르며 보이는 주변의 모든 풍경과 냄새, 감각을 온전히 기억에 담아 두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백무관을 떠나면 제법 오랫동안 다시 보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짧은 길을 천천히 음미하듯 걸어서, 세 사람은 매약빙의 묘비 앞에 나란히 섰다.
「짧은 생,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후회 없이 보내고 갑니다.」
“…….”
매극렴은 묘비에 적힌 글귀를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사위의 등을 툭 치듯 밀었다.
“네가 먼저 인사해라. 못나고 부족해도 남편이 아니더냐.”
“말씀을 해도 참…….”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무흔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아내의 묘비에 쌓인 눈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일이 많아서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 뭐요. 약빙. 많이도 보고 싶었소.”
부드럽게 미소 지은 백무흔은 짧게 아내에게 안부를 전한 후 옆으로 비켜섰다.
자연스럽게 백수룡이 두 번째로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백수룡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깨어난 후 이곳에 몇 번이나 왔지만, 그때는 한 번도 매약빙을 진심으로 어머니라고 불러 본 적이 없었다.
이제야 다시 기억하게 된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다 얘기하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거예요. 믿기 힘들 정도로 굉장한 이야기가 많은데……. 일단 오늘은 제 차례가 아닌 것 같아서요.”
나중에 천천히 하나씩 얘기해 드릴게요, 라고 말을 맺은 백수룡도 옆으로 비켜섰다.
“장인어른.”
“할아버지.”
백무흔과 백수룡, 두 사람이 동시에 매극렴을 바라봤다.
매극렴은 딸이 잠든 봉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어 보이는 눈동자 위로 비석에 적힌 글자가 흐릿하게 비쳤다.
“……오랜만이구나.”
목이 잠긴 목소리였다. 그리고 잠시 말이 없던 매극렴이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느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부자는 함께 백무관으로 돌아갔다.
매극렴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사위와 손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매극렴이 다시 고개를 돌려 딸과 마주했다.
이제 자리에는 부녀만이 남았다.
“하하-.”
매극렴은 억지로 소리 내어 웃어 보았다.
삼십 년 만에 만난 딸아이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아비가 많이 늦었지? 저기 두 사내놈과 함께 오느라 늦었단다.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천천히 가자며 어찌나 늦장을 부리던지……. 고얀 놈들. 필시 나를 조급하게 해서 말려 죽이려고 한 게 틀림없을 게다.”
조금씩,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 아비가 청룡학관의 관주가 되었다. 놀랍지 않더냐? 실은 몇 번이고 거절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지. 지금도 걱정이 많단다. 내가 그만한 그릇인지, 학생주임의 역할도 버겁다고 생각했거늘 관주로서 청룡학관을 책임지고 올바르게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을지……. 그래서 그런지 요즘 통 잠을 자기가 어렵구나.”
흩날리는 눈이 매극렴의 어깨 위에 소복이 쌓이기 시작했지만, 그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수룡이가 너를 닮아 인물이 훤칠하게 잘생겼더구나. 게다가 사고뭉치인 것까지 어찌 그리 똑 닮았는지……. 그 아이로 인해 강호가 들썩인 것을 아느냐? 과연 내 딸이 낳은 자식이다 싶었다. 허허. 어려서 청룡학관에 다녔다면 내내 이 아비가 위장병을 달고 살았을 게야. 개잡……, 아니 사위 놈 때문에 생겼던 위장병이 말이다.”
매극렴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고, 내용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나 삼십 년이 넘도록 쌓인 이야기와 감정을 어찌 짧은 시간에 풀어낼 수 있을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가 처음 무흔이 놈을 사윗감이라며 데려왔을 때 말이다. 처음에는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 전에도 종종 둘이 작당모의를 해서 사고를 치지 않았더냐. 그때도 그런 줄 알았지. 헌데 너희들의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아비는 평생 그날의 일을 후회했단다. 사위 놈은 기억이 안 난다고 잡아뗀다만…….”
한참을 두서없이 이야기하던 매극렴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딸의 마지막 말이 적힌 비석을 다시 읽어 보았다.
「짧은 생,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후회 없이 보내고 갑니다.」
“마지막 글귀조차 너답구나.”
시야가 점점 뿌옇게 흐려졌다. 매극렴은 소매로 눈가를 닦아 냈다. 눈이 내리는 탓인지 소맷단이 젖어 들어 있었다.
“……참, 내가 정신이 없어서 여태껏 그 말을 하지 않았구나.”
그는 딸의 뺨을 어루만지듯 비석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몹시 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도…… 사무치게 보고 싶구나.”
끝까지 밝은 모습만을 보이려 했지만, 매극렴은 결국 딸의 봉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허물어졌다.
“……미안하다, 약빙아. 이제야 온 아비를 용서하거라. 삼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가 딸의 비석을 꽉 끌어안으며 흐느꼈다.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한순간이라도 너를 안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인의 주름진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참으려 했으나 치미는 감정을 결국 주체할 수 없었다. 애끊는 목소리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딸, 약빙아…….”
매극렴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점점 더 세차게 날리는 눈발에 이제는 머리며 등이 온통 하얗게 덮이고 있었지만, 그건 석별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아버지! 아버지이-!”
“……으음?”
매극렴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이런 데서 주무시면 어떡해요. 아무리 봄 날씨여도 아침에는 바람이 차다고요.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진짜.”
어깨에 장포를 둘러주는 익숙한 손길. 귓가에 파고드는 친근한 잔소리.
매극렴은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깨운 사람을 바라봤다.
“네가 어떻게……?”
“아직도 잠이 덜 깨셨네.”
매약빙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가 부친을 부축해 일으키며 잔소리를 쏟아 냈다.
“아버지도 이제 연세를 생각하셔야죠. 고수라고 찬바람이 비껴가는 줄 알아요?”
“허허…….”
오랜만에 듣는 딸의 타박에 매극렴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매약빙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가 기억하는 딸의 모습과 조금은 달랐다.
여전히 고운 얼굴이지만 더욱 어른스럽고 건강해 보였다.
“왜요? 딸이 너무 예뻐서 눈을 못 떼시겠어요?”
“……요 녀석. 수룡이가 누굴 닮아서 그리 자신감이 넘치나 했더니, 무흔이 놈만 탓할 게 아니었구나.”
아버지의 핀잔에도 매약빙은 방긋 웃었다. 그리고 덥석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버지. 날도 좋은데 이따가 나들이나 갈까요?”
“날이 좋긴 무엇이. 한겨울에…….”
매극렴은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곤 눈을 몇 차례 깜빡거렸다.
햇살은 기분 좋을 정도로 따사롭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몸을 감쌌다. 그들이 있는 곳 주변으로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계절은 완연한 봄이었다. 노인의 완고한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래. 날이 좋구나. 햇살도 좋고 바람도 좋아서 그만 깜빡하고 평상에서 잠을 자 버린 모양이다.”
“아침 먹으러 가요. 남편이랑 수룡이가 기다려요.”
“그래. 어서 가자꾸나.”
부녀는 사이좋게 언덕을 내려갔다.
백무관에 들어서니 아침 대련을 하고 있던 백무흔과 백수룡이 동시에 돌아봤다.
“장인어른. 또 산책하다가 깜빡 잠드셨습니까? 이거…….”
“보약이라도 한 제 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부자의 걱정인지 놀림인지 모를 반응에, 매극렴이 호통을 치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놈들이? 잠 좀 많아졌다고 곧 죽을 늙은이 취급이더냐!”
그러자 둘이 동시에 후다닥 내빼는 경공이 천하일절이었다. 분명 하루 이틀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고얀 놈들…….”
매극렴은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이내 픽 웃어 버렸다.
잠시 후, 네 사람이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매극렴은 항상 하던 것처럼 사위에게 잔소리를 하고, 손주의 그릇에 반찬을 듬뿍 올려 주었다.
“무흔이 너는 내 딸과 혼인한 것을 복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덕분에 매일 이렇게 호사스러운 아침을 먹지 않느냐? 약빙아. 오늘은 이 나물이 아주 맛이 좋구나.”
“장인어른. 그거 제가 무쳤습니다만…….”
“수룡아. 이것 좀 더 먹어 보거라.”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다가 시답잖은 농담에 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백무흔과 백수룡이 함께 청룡학관으로 출근했다.
“부인. 다녀오겠소. 장인어른.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할아버지. 학관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을 배웅하고 집에 남은 부녀는 주전부리를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가 소일거리로 함께 장기를 두기도 하고, 무복이 해졌다며 바느질을 하기도 했다.
“쯧쯧. 이리 다오.”
매극렴은 서투른 바느질로 남편 무복을 누더기로 만들어 가는 딸의 손에서 옷감과 반짇고리를 빼앗았다. 오랫동안 어린 딸의 옷을 수선했던 노검객의 손이 능숙하게 바느질을 해냈다.
“아버지는 어쩜 그리 바느질을 잘하세요?”
“네가 누구 손에 컸다고 생각하는 게냐? 이리 일찍 시집갈 줄 알았으면 조금이나마 가르쳐서 보낼 것을…….”
저도 모르게 퉁명스레 말하던 매극렴은 살짝 고개를 들어 딸을 바라봤다.
매약빙은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어릴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밉지 않았더냐?”
매극렴은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매약빙은 현실이 아니며, 자신의 간절한 그리움이 만들어 낸 존재라는 것을.
그럼에도 묻고 싶었다.
단순히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또한 어쩌면, 아비의 간절한 염원에 딸아이가 잠시 꿈에라도 찾아와 준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노인은 떨리는 눈빛으로 딸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버지.”
“……그래. 말해다오.”
“늦지 않았어요.”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밉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늦지 않았다고 답했다.
뒤늦게 딸을 찾아와 미안하다며 사죄하던 아비에게 전하는 용서의 말.
매약빙은 그렇게 말하며 햇살처럼 따사롭게 웃었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앞으로 자주 올 것이다.”
그리고 잠시 말이 없던 매극렴은 평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화도 다 되었으니, 함께 나들이를 나가자꾸나.”
“그럴까요?”
함께 일어난 매약빙이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부녀는 손을 꼭 붙잡고 한가로이 마을을 거닐었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청룡학관이 되었다가, 떠나온 고향이 되었다가, 바닷가가 되기도, 때론 축제가 열린 어느 마을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천하를 유람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버지.”
“음…….”
맞잡은 손이 서서히 흐려지는 모습을 보며, 매극렴은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 가까워짐을 알았다.
“잠깐 귀 좀.”
그때 매약빙이 아쉬워하는 아버지의 귓가에 대고 작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무어라……?”
처음에는 진지하게 듣던 매극렴의 표정이 점점 괴상하게 일그러지더니, 이내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웃다가, 매극렴은 꿈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