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70
외전 11화. 축하주
이틀 후.
백무관의 세간 살림을 대부분 정리한 세 사내는 다시 매약빙의 무덤 앞에 섰다.
“부인. 청룡학관에서 이곳이 멀지 않으니 자주 오겠소. 다음 방학에도 내려올 터이니, 내가 보고 싶어도 조금 기다려 주시오.”
백무흔은 아내의 비석을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내리며 웃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한결같은 그 모습에 백수룡이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친의 낯간지러운 애정 표현이 다 끝난 후에야 백수룡의 차례가 되었다.
“아버지만큼은 어렵겠지만…… 저도 시간 날 때마다 올게요.”
“불효자 녀석. 네 어머니가 장가부터 빨리 가라고 하는구나.”
“어머니. 아버지가 자꾸 어머니 팔아서 거짓말을 하시는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흥. 그렇게 일러바친다고 약빙이 네 편을 들어 줄 것 같더냐?”
“둘 다 비켜 봐라.”
매극렴이 옥신각신하는 부자를 양옆으로 밀어냈다. 그는 꽃을 좋아하던 딸을 위해 겨울 꽃을 찾아 비석 앞에 놓아 주고,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전했다.
“약빙아. 또 보자꾸나.”
사위와 손자가 백무관을 정리하는 이틀 동안 매극렴은 수시로 이곳을 찾아왔기에, 따로 긴 인사는 전하지 않았다.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전했으니까.
그저 가벼운 미소를 보여 주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만 가자.”
매극렴이 가장 먼저 몸을 돌리고, 백씨 부자가 그 뒤를 따랐다.
단출하게 짐을 챙긴 세 사람이 백무관을 나서자, 그들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배웅하기 위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무흔이. 이것 좀 챙겨가게. 우리 딸이 만든 음식일세.”
“자주 올 텐데 뭘 이런 것까지…….”
“돌아가는 길에 심심할 것 아닌가. 입이라도 덜 심심해야지.”
촌장을 비롯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일이며, 주전부리 같은 것들을 챙겨 주었다. 금세 등짐이 거북이 등딱지처럼 커다래진 백무흔은 곤란한 표정으로 거절하기 바빴다.
“으아아앙! 사부님! 가지 마세요! 아니면 저도 데려가요! 청룡학관에 들어가서 무공 열심히 배울게요!”
장이는 또 엉엉 울었다. 백수룡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자기도 청룡학관에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다.
“요 녀석아. 입관 나이가 부족해서 안 된다니까.”
장이는 얼마 전에 열한 살이 되었다. 청룡학관 입관시험은 사 년 후에나 볼 수 있었다.
겨우 백수룡에게서 떨어진 장이가 분한 얼굴로 다짐했다.
“두고 봐요! 사 년 뒤에 반드시 수석으로 입학할 테니까!”
“쬐끄만 게 포부는 크다. 천하제일학관 수석입학이 만만해 보이냐?”
천하제일학관.
아직 세간의 평가는 청룡학관을 천무학관보다 윗줄에 놓지 않지만, 사 년 뒤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천무제에서 몇 년 연속으로 우승을 한다면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자 장이가 살짝 기가 죽은 얼굴로 물었다.
“……사부님이 방학 때마다 와서 무공 가르쳐 주면 안 돼요?”
“너 하는 거 봐서. 이번에 가르쳐 준 거 돌아와서 확인해 볼 테니 열심히 수련해라.”
“네!”
장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맹세했다. 백수룡은 꼬마 제자의 볼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세 사람이 마을을 떠나는 길.
백무흔은 장인어른의 밝아진 옆얼굴을 힐긋거리며 말했다.
“장인어른.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나쁠 것이 있겠느냐? 삼십 년 만에 딸아이를 보고 돌아가는 길인데.”
“혹시 너무 서둘러 돌아가게 돼서 아쉽진 않으십니까?”
매극렴이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지난 이틀은 그에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괜찮다. 함께 나들이를 자주 다녔으니.”
“……나들이요?”
백무흔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매극렴이 지난 이틀간 자신의 꿈 이야기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강호를 유람하면서 온갖 장소를 돌아다녔다. 뿐이겠느냐. 함께 밥도 지어 먹고, 신기한 것들도 구경했지.”
분명 꿈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들이 놀랍도록 선명했다.
마치 언젠가 정말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다만 꿈에서 깰 때마다 약빙이 매극렴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는데, 그 부분만큼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뭔가 재미난 이야기를 해 준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것만 희미하구나.”
조금은 아쉬워하는 듯한 장인어른의 모습에, 백무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장인어른 꿈에 약빙이 나오기라도 했습니까?”
“부럽더냐? 함께 나들이도 하고 같이 요리도 해 먹었다. 네놈도 한 번씩 끼워 주었으니 너무 섭섭해할 것 없다.”
매극렴이 짓궂은 목소리로 사위를 놀리는데, 그 말을 듣는 백무흔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장인어른. 저도 비슷한 꿈을 꾸었는데요?”
“뭣이?”
“꿈에서 약빙을 만났습니다. 저희 넷이서 도란도란 밥도 지어 먹고, 함께 유람도 다녔습니다만…….”
“허어. 그것참 신기한 일이구나.”
두 사람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다가 동시에 웃었다.
신기하고 기묘한 일이었지만, 충분히 가능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매약빙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비슷한 꿈까지 꾸었을까 싶었다.
그런데.
“저도…… 꿈에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백수룡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뭐라고?”
“그게 정말이더냐?”
고개를 끄덕인 백수룡이 자신이 꾼 꿈에 대해서 설명했다. 두 사람이 꾼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셋 다 이틀 동안 비슷한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매극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수룡아. 혹시 짐작 가는 바가 있더냐? 혹 네가…….”
백수룡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고금제일이었을지도 모를 술법사인 혈마의 술법을 비롯해 온갖 괴력난신과 기이한 경험을 겪은 그였지만, 세 사람이 꿈에서 매약빙을 만난 이유는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
“저도 잘…….”
그 순간, 백수룡은 묘한 열기가 느껴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왜 저를 그렇게들 보세요?”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낀 백수룡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미 외조부와 부친이 자연스럽게 양옆에서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수십 년간 연수합격진을 수련한 무인들도 그렇게 한 몸처럼 움직이긴 쉽지 않을 듯했다.
“……천하제일의 술법사인 현천신녀님과 오래 붙어 다녔으니, 자연스럽게 몸에 술법의 기운이 깃든 것일지도 모르지.”
“……혹은 역천신공의 기운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심상세계에서 전생의 사부들과 만났다고 하지 않았느냐?”
두 사람은 각자의 의견을 말하며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룡이 하는 말은 그다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장인어른. 틀림없습니다. 저 녀석이 술법을 부려서 저희 꿈에 약빙을 불러온 겝니다.”
“가능성이 아주 높은 추측이구나. 그 말인즉슨…….”
백수룡을 가운데 두고 눈이 마주친 두 사내가 눈빛을 교환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의 뜻이 통했다.
매일 꿈에서 약빙을 만나는 것이 가능해질 수도 있단 말이렷다!
“그,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알겠는데. 저는 진짜 모르는 일이라니까요? 할 수 있었으면 진즉에 해 봤죠.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백수룡의 논리적인 반론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온 두 검객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장인어른. 저놈이 단방에 이실직고하게 일단 잡아서 주리를 틀까요?”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잡아서 한번 진지한 시간을 가져 보자꾸나.”
주리까지 틀 리야 없겠지만, 흥분한 두 사람에게 잡혔다가는 한동안 크게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몇 시진은 배운 적도 없는 술법을 흉내 내야 하리라.
백수룡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일단 튀자.’
쿵-!
발을 구름과 동시에 백수룡의 신형이 쏜살처럼 쏘아졌다. 두 고수의 포위망을 빠져나가기 위해 냅다 경공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매극렴과 백무흔이 바짝 뒤따라 붙었다.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수룡이 이놈! 역시 뭔가 숨기고 있는 게구나!”
세 사람 모두 웬만한 새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풍경이 옆으로 휙휙 지나가며 순식간에 바뀌었다.
백수룡이 뒤를 돌아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진짜로 모른다니까요! 내가 한 거 아니라고!”
그는 천하제일인으로 온 강호에 명성을 떨친 청룡신협이었지만, 뒤에서 악귀처럼 따라붙는 두 검객의 모습은 두렵기 짝이 없었다.
“이노옴! 누가 잡아먹는다더냐! 왜 도망을 가는 게야!”
“장인어른. 저놈 몸이 정상이 아닙니다. 멀리 못 가서 지칠 테니 그때 단박에 덮쳐서 붙잡지요!”
청룡학관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적어도 심심할 일은 없을 듯했다.
* * *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며 청룡학관이 있는 남창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수룡이 녀석.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더구나.”
“아무래도 저희가 같은 꿈을 꾼 것은 우연이었나 봅니다.”
“……아쉽기는 하다만.”
“또 기회가 있겠지요. 잠이야 매일 자지 않습니까?”
백수룡은 제자들을 만나러 곧바로 백룡장으로 가고, 두 사람은 청룡학관으로 향했다.
백무흔도 은근히 쉬고 싶은 눈치였지만 어림도 없었다. 장인어른에게 붙잡혀 온 그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관주실에 들어와 있었다.
“장인어른. 제 나이가 반백 살입니다. 애도 아닌데 귀까지 잡고 끌고 오셔야겠습니까?”
“나머지 반도 다 채운 후에 까불어라. 그리고 귀가 잡히기 싫으면 도망이나 치질 말든가?”
“끄응…….”
매극렴은 투덜거리는 사위에게 직접 우린 차를 내주었다. 그 옆에 있는 두꺼운 서류 뭉치와 함께였다.
“졸업식이 당장 내일이다.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미리 해 두어야지.”
“……이걸 오늘 다요?”
“얼마 안 된다.”
청룡학관 강사들이 모두 퇴근한 늦은 시간이었다. 남궁수 집무실의 불마저 꺼져 있었다.
매극렴은 마주 앉은 사위에게 학생주임의 업무를 알려 주고, 자신은 노군상에게 맡겨 두었던 서류 업무를 처리했다.
밀렸던 일을 어느 정도 처리한 후에야, 매극렴은 고개를 들고 후-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제법 고단하구나.”
“연세를 생각하셔야지요. 여독이 남았을 텐데 그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고얀 놈.”
쉬라는 말도 얄밉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위였다. 그를 흘겨보는 매극렴의 시선에, 백무흔이 관주실 천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이 보였다.
“뭘 찾는 게냐?”
그러자 백무흔이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말입니다. 약빙과 함께 이곳에 과실주를 숨겨 두었습니다. 단단히 밀봉해 놔서 지금쯤이면 아주 맛있게 익었을 텐데…….”
“……화낼 기운도 없구나.”
골이 지끈거린다는 듯 매극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관주실에 술을 숨겨 놓을 생각을 하다니. 그런 망나니들은 청룡학관 역사에 둘밖에 없으리라.
“그게 어디쯤이었더라.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흰소리하지 말고 일이나 빨리…….”
그 순간, 매극렴은 불현듯 희미했던 꿈속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 잠깐 귀 좀.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딸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흐릿해졌던 그 말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관주실 천장에 술을 한 병 숨겨 놨어요. 나중에 아버지가 드세요. 어디에 있냐면…….
“장인어른?”
백무흔은 갑자기 벌떡 일어난 매극렴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 순간 매극렴의 허리춤에서 검이 섬전처럼 뽑혀 나왔다.
휘익-!
검풍이 발출돼 천장의 한 곳을 밀자 그 부분이 위로 들리며 빈 공간이 드러났다.
“무흔아. 저길 한번 찾아보거라.”
잠시 후, 천장에서 단단히 봉인해 둔 술병을 꺼내 온 백무흔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장인어른을 바라봤다.
“거기 있는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매극렴은 대답 대신 껄껄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겨우 웃음을 멈춘 그는 딸이 보내 준 선물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건 취임 축하주로 마셔야겠구나.”
혹시 아는가. 이 술을 먹고 잠들면 다시 약빙을 만나는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