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02
제102화
EV-1은 역시 이진영과 따로 떨어졌고 이진영은 혼자였다.
여전히 서대문구에 있는 경찰청 본청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이었다. 벽면이 유리로 된 청사는 얼핏 보면 고급 호텔처럼 보여서 이곳으로 압송되는 고위급 범죄자들은 ‘호텔간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사 안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관공서 풍경이었다.
관용 오픈프레임 로봇들이 오고 가고 접수대에는 인체 스킨이 씌워진 안내 로봇이 있을 뿐 사람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로 늘 버글거리는 중부서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본청은 각 내사팀을 제외하면 행정부서라 사람이 많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이진영은 내사팀의 취조실에서 삼화 구급의 광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걱쭹마쎄이요우.”
이윽고 이효진을 필두로 수많은 사람들이 좌르륵 취조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진영은 그들 중 정복을 입은 군인이 끼어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야, 군바리는 또 뭐래? 언제부터 우리 짭새들이 군바리랑 친했다고?”
육군공안부의 장교는 이진영을 보고 눈을 부라렸다. 이효진은 탕하고 서류파일을 이진영의 앞에 내려놓았고 이진영을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어딨어?”
“뭐가요? 한국어는 이게 문제란 말이야. 주어를 마구 생략해.”
“니가 잡은 놈.”
“나야 모르죠. 블랙스와트가 잡아간 거 아니었어요?”
이효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 아직 제정신 못 차리니? 불법무기 소지만으로도 너 옷 벗길 수 있어.”
“무슨 불법무기일까나? 찾을 수나 있나?”
“있지. 잘 숨겨두셨더만.”
이효진은 어떻게 찾아낸 건지 이진영이 숨겨둔 불법총기류와 장구류들을 찾아냈다. 바로 츠루마츠 습격때 썼던 각종 군용총기와 장비들이었다.
“어떻게 변명하실려고? 이미 로트 번호 시리얼 넘버 다 확인했어. 군에서 손망실 당한 물자라고 그러더군.”
이효진은 육군공안부 장교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가 육공 장교를 데려온 건 불법무기 때문이었다.
“와아, 정말 개코시네. 근데 그걸로 옷을 벗기려면 힘드실 텐데? 육공에 넘기시게요? 횡령으로? 근데요 로트번호? 시리얼? 그거 저랑 상관없을걸요?”
이진영은 물건을 가지고 나올 때 이미 해병대의 물품과 각종 시리얼넘버를 포대갈이해서 나왔다. 육공이 이진영을 수사해도 이진영의 자택 근처에서 나왔다는 걸 제외한다면 그를 엮을 방법이 없었다.
“저는 제 자택을 습격한 놈들을 우우연히 주운 무기로 우우우연히 격퇴한 것뿐입니다. 용감한 시민상 이런 거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용감한 시민상 같은 소리 한다.”
“그나저나 담배나 피웁시다. 아니 으뜨케 취조의 정석을 몰라? 설렁탕 하나 시켜주고 담배 피우면 술술 말하는 거 드라마에 많이 나오잖아요?”
이효진은 씹는 담배를 짝짝 씹으며 턱으로 부하들에게 담배를 주라는 시늉을 했다.
이진영은 수갑을 찬 채로 담배를 맛나게 피웠다.
“아무튼 솔직해집시다.”
“왜? 고백이라도 하시게?”
“아, 팀장님은 미인이라 이왕 고백이라면 사랑 고백을 하고 싶군요. 어때요?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이효진은 킥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진영은 정색하고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제가 본의 아니게 본청 고위 간부를 여러 명 담갔으니 그 보복으로 이러는 거 아닌가요?”
“배짱 좋네?”
“웡꺼고 정 대령이고 다 핑계잖아요. 놈들이 나한테 총 쏘는 거 봤을 텐데 그게 연기라는 겁니까?”
“내가 칼잡이라 그거야?”
“아니면요. 굳이 저를 콕 찝어서 내사를 할 필요가 있나요? 겨우 경위 나부랭이 따위를.”
이효진은 씩 웃더니 이진영의 입에서 담배를 뺏어서 스읍하고 담배 연기를 들이켰다.
“상부에서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난 네가 부패 경찰이라고 본다.”
“어째서요?”
“넌 참전자잖아? 근데 왜 월미도, 그 지옥을 떠나지 않는 거야? 나도 그 빌어먹을 전쟁을 경험해서 잘 알아. 근데 너는 필수 근속일수를 다 채우고 나서도 거기에 있고, 니 말대로 본청 사람들을 담그고 공을 세웠는데도 승진을 마다하고 굳이 여기에 있어. 나로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이효진은 사냥개 같은 눈으로 이진영을 쏘아봤다. 공교롭게도 23팀장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그는 같은 질문에 대답하기 껄끄러웠는지 괜히 말을 돌렸다.
“그냥 월미도가 좋아서요. 디스코 팡팡 같은 놀이기구도 있고.”
이효진은 흐흐흐 하다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나더러 납득하라고?”
“당신이 납득하든 말든 난 그곳이 좋아. 적어도 사람이 사는 것 같으니까. 기본소득자들이 사는 곳은 이곳이 좀비가 나는 곳인지 아니면 사람이 사는 곳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니까.”
이효진은 탕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신희정의 위치나 말해. 접촉했지? 정 대령은 어딨어? 네가 빼돌린 거 맞잖아.”
육군 장교가 눈을 빛내면서 이진영을 쏘아봤다.
“아 취조할 때 당하는 사람은 이런 기분이구나? 그럼 이렇게 대답해드리죠. 몰라요, 어딨는지.”
“네 로봇도 사라졌어. 어디로 간 거야?”
이진영은 테이블에 담배를 비벼끄고 육군 장교와 이효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절 저격한 사건은 정 대령이나 신희정과는 무관합니다. 놀부는 따로 있어요.”
“놀부?”
“이득을 보는 자들.”
이진영은 고가도로 총격사건에서 저격을 한 범인이나 그가 체포한 놈이 정 대령과 무관하다는 걸 이미 알아챘다.
“그쪽 소설은 앞뒤가 안 맞아요. 정 대령이 자작극으로 공격한다 한들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고작해야 지서 경위 나부랭이 따위의 혐의를 풀어줘요?”
잘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진영을 공격한다 한들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이진영, 너는 잘 모르겠지만 신희정이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알아? 교란공작이지.”
“교란공작이요?”
“저게 적인이 아군인지 아리까리하게 만드는 거야. 전쟁 때는 그걸로 유명했지. 중국군에 배신자가 있다는 정황을 조작하고 놈들끼리 싸우게 만들고 대사관 직원들과 유유히 빠져나온 적도 있어.”
“들자 하니 이 팀장님은 신희정 요원을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들리는데?”
이효진은 그냥 씩 악랄하게 웃었다.
“그럼 이게 그놈의 교란공작이라는 건가요? 총격전 따위가? 그래서 내 혐의를 풀어준다? 거 스토리 한 번 요상하네. 팀장님도 소설가는 못 되겄소.”
“정확히 말하면 너와 그 로봇. 이브이 원이 자유롭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EV-1의 능력은 이진영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군용 헬기와 맞상대를 하거나 해킹으로 본청의 틸트로터까지 털었다.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이 로봇은 지나치게 오버스펙이었고 자유롭게 풀려나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도 내가 우선 목표가 아니었군. 당신들은 이브이를 막으려 한 거야.”
이진영은 육공 장교를 노려봤다.
“그래. 이진영 경위. 이제 슬슬 말하시지? 목적이 뭐야? 너희들은 왜 아선 인더스트리를 공격한 거지? 어디까지 이어졌어? 페어차일드? 랭글리? 미식스(MI6)? 아니면 짱깨?”
“아선 인더스트리는 또 뭐야?”
이효진이 사진 몇 장을 휙하고 던졌다.
“마이크로 웍스, 아선 아산 공장 등등 일련의 테러 사건들은 정 대령의 소행이다.”
위성으로 찍은 사진이라 사람이 콩알만 하게 보였지만 이진영은 빨간 베레모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정 대령이 왜…….”
“그걸 말씀하셔야지? 이진영 경위?”
이효진이 악랄하게 주먹을 쥐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뭡니까?”
육군장교가 들어온 사람을 막아서며 고압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바바리코트를 입은 사람은 안에 들어오자마자 이진영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이진영이 나와.”
이진영은 수갑을 찬 채 들어온 사람에게 경례를 붙였다.
“아이고 이 부장님, 이 아니라 지금은 직함이 뭐죠?”
“시끄러. 나와.”
바바리코트를 입은 사람은 이민호 공안부장 현재는 본청 안보수사국장이었다. 안보수사국 밑에 각 공안부가 있었고 이민호는 차기 경찰청장 후보로 손꼽힐 만큼 승진했다.
그 승진의 배경에는 아무래도 천도영 납치사건을 훌륭하게 해결한 공적이 있었고 그 사건의 공로자는 두말할 것 없이 이진영이었다.
“국장님, 이건 내사 사건입니다.”
“내사 사건인데 왜 육공이 얼쩡대는 건데? 이효진, 넘겨.”
“하지만…….”
“쓰읍, 넘기라면 넘겨.”
“국장님 저희 국장님이 정식으로 항의하실 겁니다.”
“아니, 내사를 빌미로 육공이랑 짬짜미해서 우리집 식구를 괴롭히는 게 내사냐?”
이민호는 권총을 찬 육공 장교를 노려봤다.
“듣자 하니 공안 사건 같은데 우리 안보수사국 사건 아니야?”
“…….”
이효진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이진영은 삼화 구급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흥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공 장교와 내사 11팀은 코앞에서 먹이를 놓친 맹수처럼 이진영이 방 밖으로 나가는 걸 노려봤다.
이민호는 이진영을 자신의 사무실로 데려왔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수갑을 손수 풀어주고 담배를 건넸다.
“쌔끼, 자는 데 깜짝 놀라게 하고 있어.”
“죄송함다.”
“아무튼 육공 새끼들도 침 맞은 지네마냥 발광하고 있고, 우리 수사국도 난리야. 서울에서 폭탄이 터지다니…….”
“테러 사건 말씀이로군요.”
“그래, 정 대령 진짜 어떻게 된 거냐?”
이진영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모른다는 시늉을 했다. 이민호 국장은 정 대령을 체포할 당시 총에 맞아 의식을 잃었었다.
“아무튼 몸은 괜찮냐?”
이민호는 짠한 눈으로 이진영의 의료용 엑소슈트를 바라봤다. 이 엑소슈트는 고가도로 사건 이후 새로 교체한 건데도 벌써 흠집이 장난 아니게 나 있었다.
“근데 이브이가 빼돌린 놈은 뭐야?”
“그걸 찬찬히 알아봐야지요. 지금 약에 취해 자고 있어요.”
“나한테까지 똥물 튀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뭐 임마?”
“대충 갖고 놀다 국장님 부하들에게 넘기겠습니다. 어차피 폭탄 테러범이니까 국장님 경력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췅성.”
이진영은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였다.
“잘 해라잉.”
“옙, 아무튼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민호는 이진영을 그냥 풀어줬다. 이진영은 30분 후 경찰 본청에서 나와서 다시 봉천동 자택으로 향했다. 그의 뒤에는 여봐란듯이 내사팀과 육공의 미행이 따라붙었다.
빌라 주변에도 정복 경찰들과 내사팀으로 보이는 형사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이진영을 빤히 쳐다봤다.
“자고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이진영은 집으로 돌아와 옆집 베란다로 넘어갔다. 옆집은 비어 있었고 바로 그곳에 광학위장을 한 EV-1과 벵장님이 숨겨져 있었다.
파드드득.
이진영은 이효진이 준 전기충격기로 놈의 부상당한 발등을 지졌다.
“으으윽!”
격통에 벵장님이 깨어났다.
“쉿, 쉿. 층간소음이 지랄같아서 이 빌라 난리거든. 조용히 대답만 잘 하면 살려 줄게. 오케이?”
벵장님은 고개를 못난이 인형처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이진영은 놈의 뺨을 툭툭 두드리고 씩 웃었다.
“굿 보이. 자 이제 읊어보실까? 소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