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03
제103화
이진영은 한숨을 쉬면서 계속 말하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놈은 망설이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진영은 다시 한번 전기충격기로 상처를 지졌다. 이하성은 끄악하는 비명소리를 냈다.
“이름은 이하성이요.”
“또 이씨야? 젠장할 우리나라에 이씨가 많다더만.”
“광저우 선착부대 출신. 혀, 현재는 무직. 마약을 했다가 기, 기본소득도 끊어졌어요.”
“음 그래서 용병으로?”
“예, 치, 친구가 좋은 껀수가 있다고 하길래.”
“니들은 몇 명인데?”
“잘 몰라요. 어떤 때는 20명이 넘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훨씬 적을 때도 있고 그래요.”
“태스크포스 식이군. 대장은?”
“대장은 봉식이요.”
“봉식이? 진짜 이름이야?”
“아뇨, 코드명이요.”
“코드명? 그럼 진짜 이름을 모른단 말이야?”
“예, 얼굴도 몰라요. 만날 때는 무조건 헤드모듈을 쓰고 만나요.”
이진영은 허어하고 혀를 찼다.
기껏 놈을 잡았건만 그를 공격한 놈들의 실체를 알아내긴 다 글렀다. 놈들은 뜻밖에도 그때그때 팀을 결성하는 태스크포스 특수부대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고 내부자는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니들은 왜 폭탄을 설치했지? 그리고 왜 구급차를 대기시켰어?”
“모, 몰라요. 그냥 돈이 된다고만 알고 있어요. 작전을 하면 보, 봉식이가 돈을 입금해요.”
“아는 게 뭐냐 너?”
헤드모듈을 벗은 벵장님은 꽤나 순박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나이는 이진영 또래였고 솜씨를 보면 광저우 전쟁 때 한가락 했던 병사였음이 틀림없다.
놈 역시 이진영의 점퍼를 보고 광저우 헬 참전자라는 걸 알아보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주, 죽이는 건가요?”
“아니, 난 경찰이야.”
“겨, 경찰이라고요?”
“그것도 모르고 날 습격했나?”
이진영은 다시 이민호에게 전화를 걸어 이하성을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하성은 그걸 처리신호라고 생각했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다급하게 말했다.
“기, 기조야. 봉식이에게 얼핏 듣긴 했는데 기조야가 있대요.”
“기조야? 그건 또 뭐야?”
“저도 들은 거라 잘 몰라요. 무슨 기조야에 드는 돈이 너무 비싸졌다던가?”
이진영은 기조야라는 말에 EV-1을 쳐다봤다. EV-1은 바로 검색을 해서 알려줬다.
“기조야(偽造屋), 위조전문가를 뜻하는 일본 속어입니다.”
“기조야……. 근데 위조전문가한테 왜 돈을 주는 거지?”
“전 모른다니까요.”
사건의 진상에 다가갈수록 점점 알쏭달쏭해졌다.
놀부처럼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테러리스트.
거기에 위조전문가?
이하성을 보면 그냥 용병으로 보였고 전투 능력도 꽤 출중했다. 이런 집단이 왜 위조전문가에게 돈을 주고 뭔가를 꾸민단 말인가? 이진영은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해졌다.
가뜩이나 아선, 마이크로웍스의 폭탄 테러 때문에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놈들은 대체 뭣 때문에 이상한 짓을 벌인단 말인가?
“이브이, 기조야를 찾아야겠어. 그놈을 찾으면 뭔가 단서가 풀리겠지.”
– 또 굴다리로 들어가셔야겠군요.
위조전문가들이 있을 만한 곳은 범죄의 온상 월미도 난민지구 밖에 없었다. 그곳은 사실상 치안력이 닿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고 위조전문가들의 고객도 많았다.
난민들은 어떻게 해서든 기본소득을 받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려고 신분증 위조를 의뢰하곤 했다. 대부분은 인공지능망에 걸려 허사가 되기 일쑤였지만 위조전문가들은 그곳에서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 * *
이진영은 잠을 못 자서 퀘퀘한 얼굴로 월미도역에서 국수를 시켰다. 노인은 피폐해 보이는 이진영의 얼굴을 보고 말없이 늘 먹는 국수와 웬 도자기에 담긴 술 한 병을 올려놓았다.
“酒? 我重係勤務中哦. (술? 저 아직 근무 중이에요.)”
“呢個係疲困嘅特效藥呢. 飮啲一下? (이게 피로에는 특효약이에요. 한 번 드셔보세요?)”
이진영은 작은 술병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와오, 이거 맛이 왜 이래?”
시큼털털하면서 쓴맛에 그는 기침까지 했다. 주인은 깔깔 웃으면서도 다 마시라는 시늉을 했다. 술을 다 마시니 왠지 힘이 났다. 그는 단숨에 국수를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긴, 총도 없이 굴다리로 들어가야 하는데 제정신으로 들어갈 건 아니지.”
이진영은 술 한 병을 더 사서 홀짝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뒤에는 EV-1만 홀로 그의 뒤를 따랐다. 중부서의 형사들과 감식 로봇들은 강남과 아산에 파견되어 열심히 수사 중이었고 내사 중인 이진영만 홀로 남겨졌다.
EV-1은 밤새 SNS를 뒤져 기조야의 명단을 추렸다. 기조야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본어를 쓰는 사람은 드물었고 기조야라고 아예 대놓고 트위터에 게시해 놓고 장사를 하는 놈이 있었다.
이놈의 주소는 저번에 화려하게 폭발한 희망빌라 근처였다. 이진영은 작은 항아리에 든 술을 홀짝이며 휘적휘적 난민지구로 들어갔다.
“아, 아저씨다.”
“오, 류모성. 잘 지내냐?”
란 아주머니의 가게 근처를 지나갈 때 류모성이 아는 체를 했다. 류모성은 이진영이 술병을 들고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브이는요?”
“어, 여기.”
“그짓말. 이브이는 멋지게 생겼잖아요?”
류모성이 지금 갖고 노는 건 KF-31 신형 공격 로봇 프라모델이었다. KF-31은 EV-1의 다운그레이드 격이라 꽤 닮은 점이 많았다.
이진영은 류모성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시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갔다.
원래대로라면 EV-1은 친절하게 류모성과 대화를 나눴을 테지만 지금 EV-1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하성 패거리들이 이진영을 암살하려 하는 건 물론이고 이곳은 웡꺼의 영역이다.
천도영, 류모성 납치사건으로 이진영은 웡꺼와 공조 아닌 공조수사를 했지만 웡꺼가 딱히 이진영을 곱게 볼 리는 없었다.
웡꺼의 끄나풀들이 이진영을 보고 어디론가 무전을 쳤다. 이진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광객처럼 공예품을 구경하기도 하고, 치파오를 입은 여자 상인에게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그는 일부러 육공과 내사팀의 미행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걸었다. 총이 없는 지금 그를 지원해 줄 수 있는 건 이진영을 씹어먹지 못해 안달인 두 기관뿐이었다.
여전히 굴다리는 눈이 안 치워진 채 그대로였다. 상인들이 넉가래 따위로 대충 밀었을 뿐 난민지구는 눈에 뒤덮여있었다.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이진영의 발자국은 희망빌라로 이어졌다.
“거 참 성대하게 폭파했군.”
작년 가을 폭발이 벌어진 현장 앞에서 이진영은 술을 홀짝였다.
정 대령은 로비를 끌어내기 위해 희망빌라를 폭파하는 쇼를 벌였다. 놈들이 설치한 폭탄은 희망빌라를 통째로 날려 버렸고 거기 사는 주민은 물론 웡꺼의 필로폰 제조공장까지 박살 냈다.
“정 대령 그놈…… 그래, 하긴 그 정도 폭파 작전을 할 수 있는 놈들은 그놈들밖엔 없지.”
정 대령과 그 부하들은 최정예 육군 특수전 지원단 소속이었고 특히 놈의 부하 중에는 천수관음을 비롯해 주특기 번호가 44로 시작하는 놈들이 있었다.
이진영은 특별병과번호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천수관음의 무시무시한 솜씨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이크로웍스 본사와 한국지사를 공격할 만한 놈들은 확실히 정 대령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 대령은 왜 마이크로웍스를 쳤을까?
이진영은 신희정에게 정 대령과 페어차일드 개발과 CIA의 일부 인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고거는 내 수수께끼가 아니지. 가자 이브이.”
EV-1은 이진영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로봇은 주변의 CCTV나 각종 전자기기를 모두 해킹하고 있었고 저격 징후를 경계했다.
“고지식하기는.”
이진영은 픽 웃고는 희망빌라 옆 지하상가로 내려갔다.
이곳은 원래 신간척지구의 방공호였지만 지금은 온갖 노점들이 늘어서 있다. 입구가 딱 두꺼비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아서 사람들은 이곳을 ‘두꺼비 던전’이라고 불렀다.
두꺼비 던전 계단참에 있는 음반 가게에서는 등려군의 노래 첨밀밀이 흘러나온다. 이진영도 북경어로 된 첨밀밀을 흥얼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간다. 두꺼비 던전 안은 마치 1980에서 90년대에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음반 가게에는 오래된 레코드판이 박스에 담겨 있고 영화 포스터들도 80년대 것들이 많았다. 이진영은 VHS 비디오 테이프를 앞뒤로 돌려보며 씩 웃었다. 그가 어릴 때도 이 비디오 테이프 따위는 이미 박물관에 들어가야 할 골동품이었다.
아날로그 테이프, 구식 녹음기, 홍콩에서 떼온 간판들. 이곳 두꺼비 상가는 굴다리가 그렇듯 한국, 중국의 문화가 뒤섞여있다. 관광객들이 월미도 난민지구를 방문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두꺼비 상가 관광이었다.
이곳에는 다른 데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옛 진귀한 물건들이 잔뜩 널려있었다.
사람들은 로봇과 인공지능에 직업을 빼앗기고 또한 문화 역시 인공지능에게 밀리면서 20세기 말 문화에 열광했다. 레트로 붐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더더욱 심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보지도 않은 시절에 향수를 느끼며, 그 시절의 물건을 구하러 다녔다.
이진영은 게임 가게에서 역시나 박물관에 있을 법한 슈퍼패미컴 게임을 구경하다가 순대국밥집 옆으로 들어갔다.
육공과 내사팀은 이진영을 바짝 쫓아오고 있었었고 이진영은 놈들을 확인한 후 골목길로 들어갔다. 이쪽 골목은 오래된 전자제품들을 고치는 곳이다. 지금은 완전히 멸종한 카세트에서 노이즈가 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옆에서는 상인 한 명이 브라운관 TV를 고치고 있다.
이진영은 소니 워크맨을 수리하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偽造屋を探しに来た. あんただろう? (위조상을 찾으러 왔다. 당신이지?)”
“どないなことたい? 偽造屋っちゅうのは? (뭐꼬? 위조상이 먼데?)”
“どぼけんなよ. もうじゃんと分かっているから. 大体, ネットで営業するくせに何のまねだ? (시치미 떼지 마라. 다 알고 있으니까. 아니 넷에서 영업하는 주제에 뭐 하자는 건데?)”
“さつ? (갱찰이가?)”
“いいえ, ちょういど聞きたい事がある. (아니 뭐 좀 물어보려고.)”
이진영은 백 달러 짜리 지폐를 두 장 올려놨고 노인은 간사하게 웃으면서 지폐를 냉큼 가져갔다.
“뭘 묻고 싶은 건데?”
노인이 천연덕스럽게 한국어로 대답하자 이진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나도 그…… 뭐냐. 사업에 낄라고. 요새 굴다리에 소문이 자자하다던데.”
“뭔 사업?”
“봉식인가? 일거리 주잖아? 나도 낄까 하는데.”
“봉식이가 누군데?”
“왜 그 있잖아.”
이진영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노인에게 속삭였다.
“팬지커터로 폭파하고 다니는 애들.”
노인은 눈빛을 빛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건 어디서 들었어?”
“에헤이. 굴다리 살다 보면 다 듣게 되지. 술자리에서 옆에 사람이 하는 이야기 들었거든. 뭐라더라 일부러 폭파를 시키고 그다음에는 앰뷸런스. 맞지?”
“으음, 알긴 아나보네.”
“그니까 다리를 좀 놔 주겠어?”
노인은 검지와 엄지를 비비면서 돈을 세는 흉내를 냈다. 이진영은 백 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 더 내밀었고 노인은 지폐를 잡았다. 하지만 이진영은 지폐 반대쪽을 아직 놓아주지 않았다.
“연락처 줄 수 있어?”
“에이, 내가 위조상을 하는데 연락처를 받겠어? 경찰이 들이닥치면 줄줄이 감옥갈 텐데.”
“하긴 그것도 그렇군. 그럼 어떻게 연락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