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06
제106화
의료보험법 시행령 15조-(보험의 등급과 보장범위) 국민 의료 보험의 등급은 의료보험법 2조와 18조와 영리병원 보장법 4조에 따라 가, 나, 다, 라종으로 나눠지며 각각의 보장범위는 다음의 각호와 같다.
1. 라종보험 가입자는 당연지정제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2. 가에서 다종 보험 가입자는 당연지정제가 아닌 병원에서도 진료를 받을 수 있다.
3. 영리병원은 영리병원법에 따라 라종보험 가입자를 받지 아니할 수 있다.
4. 라종보험 가입자라도 민영보험에 의해 보장을 받는다. 이 경우 영리병원은 라종보험 가입자를 거부할 수 없다.
……
12. 보험의 등급은 응급상황의 경우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접수대에서는 번호표 색깔이나 처방전 색깔로 엄밀하게 구분하지만, 보험의 등급은 응급상황의 경우는 세세하게 적용하지 않는다.
놈들이 굳이 사고를 내고 신분을 세탁하는 건 바로 응급상황의 경우에는 보험 등급을 자세하게 검색하지 않고 일단 치료부터 먼저 하기 때문이다.
의료보험법 시행령 15조의 12호는 어디까지나 모든 국민에게 인도적인 조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범인들은 이 허점을 파고들었다.
이진영이 응급실에서 본 간호 로봇들은 모두 등급 따윈 확인하지 않고 우선적으로 치료부터 했다. 거기에 이 여자처럼 지병이 있는 경우에도 바로 그 자리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처치를 할 수 있다. 그때 위조한 보험 등급이 효과를 발휘한다.
브로커에게 돈을 준 환자는 응급실에서 밖에 있는 라종 환자들보다 훨씬 더 빨리 수술이나 처치를 받을 수 있다. 어차피 수술을 하는 건 로봇이었고 로봇은 로봇 3원칙에 따라 성실하게 수술을 집도한다.
응급실 당직의사는 반드시 보험 등급을 확인해야 했지만, 이 역시 이진영이 확인한 대로 의사들은 늘 피로에 절어있어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 그냥 숙취에 시달리며 대충 도장을 찍는 회사 부장처럼 무조건 버튼을 누를 뿐이다.
그리고 치료비는 어차피 가종보험이나 영리보험에 포함되어 청구되고 소드 타워의 여자는 뒤통수를 맞게 된다. 수술도 빨리 받게 되고 치료비도 아끼고 일석이조였다.
놈들이 이진영을 공격한 이유는 해프닝에 가까웠다. 이진영은 끄나풀인 전항매를 부르기 위해 병원에 갔지만 놈들은 거기서 이진영이 그들의 사업에 대해 뭔가를 알아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이진영은 정답에 다다르고 난 후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범죄는 각 보험 등급이 만든 우울한 범죄였다.
여자는 이진영이 인상을 쓰고 있자 딸을 걱정해서 그런 줄 알고 냉큼 전화번호 하나를 써서 줬다.
“저도 병원에서 들은 거예요.”
“병원에서요?”
“예, 난치병 환자가 있는 곳에 와서 번호만 먼저 알려줬어요.”
“그 뒤로 접촉은 이 전화로 했군요.”
“예, 사정을 잘 말씀해보세요. 그럼 아마 순번이나 치료비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래요.”
“예…… 감사합니다. 깜짝 놀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뇨, 동병상련인데요. 뭘. 아픈 사람 맘은 아픈 사람이 제일 잘 알죠. 더군다나 딸이라니…….”
이진영은 여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아파트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필터를 짓씹을 듯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 체포 안 하십니까? 공문서 위조 및 의료보험법 위반입니다.
“아픈 사람을 뭐하러 끌고 가. 너랑 나만 조용히 있으면 괜찮잖아.”
– …….
이진영은 크으으으하고 한숨을 토해내듯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간 병원에서 본 라종 환자들의 아우성을 떠올리며 그는 계속해서 한숨을 토해냈다.
“이브이,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런데. 이번에는 잡고 싶지가 않다.”
이진영은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격도 시발 건당 한화로 2천만 원이 뭐냐. 신분증 위조 비용이랑 폭탄 원가에 인건비 생각하면 거의 꽁짜네. 의적이야 뭐야?”
– 하지만 내사 혐의와 이민호 국장에 대한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놈들은 경위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
이진영은 아무 말 없이 난민지구 쪽을 노려봤다.
“이브이, 상부에는 알리지 마. 나 혼자 처리할게.”
– 혼자요?
“어, 어쩌면 놈들 일당 중 한 사람은 눈감아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브이는 이진영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른다.
– 하지만 지금 이효진 팀장은 경위님의 체포영장을 받아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체포영장? 뭐로 받았대?”
– 국가 정보보호법 위반, 불법무기소지 그리고 내란입니다.
“니가 해킹한 거 나한테 독박 씌운다는 건 알겠는데, 내란은 또 뭐야?”
– 수사관들을 일부러 구월동으로 유인해서 웡꺼에게 공격당하게 했다는 혐의 같습니다.
“인공지능 판사도 참 널럴하구먼. 그딴 게 내란이라니? 육공 애들이 다쳤다고 공안사건이야? 나 참.”
이쯤에서 EV-1이 농담으로 맞받아칠 줄 알았지만 EV-1은 조용했다. 아니, 로봇 자체가 전원이 끊어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브이. 이런, 이효진이 아예 통신까지 끊어버렸군.”
지금까지 EV-1은 온라인을 통해 로봇을 조종했지만, 아예 차단당한 모양이었다.
이진영은 계단참에 멍하니 서 있는 로봇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이번에는 나 혼자 가야 하는 거군. 차라리 잘 됐어. 그 친구…… 그 친구가 잡히는 건 나도 원치 않으니까.”
이진영은 전화번호 쪽지를 꽉 틀어쥐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예,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여쭤볼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아.”
– 뭐죠? 이 번호 어디서 알았어요? 당신 누구야?
“경찰이다, 시발놈아. 안녕 봉식아?”
수화기 저편의 누군가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끊지 마라잉.”
– 바보냐? 짭새라며? 전화 추적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추적 안 해. 나 혼자야. 니들 수법을 아는 것도 나밖에 없어.”
– 오, 이진영 경위. 누군가 했더니 당신이로군. 뭐 하자는 거지?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구만?”
– 그래서 뭘 어쩌라고?
“만나자. 나 혼자 나갈게?”
– 아니 시발 무슨 소개팅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너랑 만나서 뭐 하게?
“이 정도 조건 아니면 만나기 힘든 분들 아닌가? 그리고 나랑 안 만나면 너희들 머리 위로 블랙스와트가 떨어질 거야. 아마 전원 사살로 끝나면 다행이고, 니들 아선이나 마이크로웍스 테러 알지? 그거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다?”
– 뭐, 뭔 테러야.
“니들 수법이 하필 팬지커터라서 경찰청 본청에서는 니들이 한국 마이크로웍스 폭파한 걸로 알고 있거든.”
– 그래서 뭐 어쩌자고?
“이 세상에서 니들 범행을 아는 사람은 나 혼자야. 나만 죽이면 니들 사업이고 뭐고 다 묻히는 거야. 공안이 쫓아올 일도 없을 테고.”
– 뭐야 시간 정해서 오케이 목장의 결투라도 하자 그거냐?
“바로 그거지. 나도 나를 고자로 만들 뻔한 놈들을 체포하고 승진도 하고.”
– 미친 새끼.
“어차피 그 전쟁에서 돌아온 놈들은 다 미친놈들 뿐이야. 다들 미치지 않은 척 연기를 하고 있지만.”
– 정말로 혼자 나올 거냐? 그리고 니한테 뒷배가 없는 걸 어떻게 믿어?
“어, 못 믿겠으면 니들이 장소를 정해. 어디든 나가주마. 대신 조건이 있다. 그때 고가도로에서 나를 노린 저격수. 그놈은 반드시 나와 해.”
– 저격수? 흐흐흐, 좋지. 대가리에 빵꾸 날 걱정이나 하시지. 위치는 이 번호로 보내주마.
“오케이 깔끔한 거래 감사. 이따 봐용.”
– 미친 새끼.
놈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이진영은 한동안 눈이 내리는 신흥동 아파트 단지를 쳐다보다 사라졌다.
x6 우리 팀의 마무리 투수는 리그 최고지요.
몇 분 뒤 내사팀 수사관들이 신흥 파라다이스 아파트에 들이닥쳤지만, 이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효진은 뒤늦게 내사팀의 밴에서 내리면서 투덜거렸다.
“이 새끼 어디로 튄 거야? 그리고 이놈이 방문한 집은 또 뭐고?”
“확인해봤습니다만 그냥 일반 여성이었습니다. 전과기록도 없고요.”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대?”
“별 얘기 안 했답니다. 무슨 수술 잘하는 병원이 어딘지 알아봤다고 하더군요.”
이효진은 퉤하고 씹는 담배를 뱉으면서 파라다이스 아파트를 노려봤다.
“혹시 그 여자와 신희정과 연결고리 있는 거 아니야? 조사해.”
이효진은 여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이진영은 이미 사건의 진상과 범인까지 혼자서 훌륭하게 다다랐지만, 이진영이 한 말대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효진에게 이진영은 아직도 적과 내통한 반란 사범이었다.
“아 위치 확인되었습니다. 다시 굴다리입니다!”
“굴다리라고? 역시나 이 새끼 웡꺼와 연관 있었어. 웡꺼에게 신변보호 요청을 하러 간 건가? 어쩌면 이 새끼 해외로 튈 수도 있어.”
이효진은 아까 내사팀 요원들의 수사로 이진영이 일본인 위조상에게 갔다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 대령처럼 해외로 튀면 끝이야. 육군 지원은?”
육군 정복을 입은 장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군부는 춘절 즉 설날 전후로 일이 터지는 걸 원치 않았다. 괜히 조용히 있는 웡꺼 놈들을 자극해서 일이 커지고 군경의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간 여러 사람 목만 날아가게 된다.
군부와 경찰상부가 롱꺼와 관련하여 이렇게 저자세로 일관하는 건, 내년 7월 4일에 열리는 대통령 선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작년 여름 츠루마츠를 폭격한 사건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난민인권단체들은 폭격으로 죽은 소년병의 사진을 교묘하게 배치하여 정부가 난민을 총칼로 내쫓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반대로 여름에 죽은 순직 경찰이나 군인 유가족들은 난민 따위는 전부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난민 인권단체들과 몸싸움을 벌이기까지 했다.
결국 현재 여당인 민족민생당 내부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지나기 전까지 제발 롱꺼 패거리를 건드리지 말라는 분위기였다. 여당과 한패나 마찬가지인 육공이나 경찰 상부도 그들의 뜻에 따라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진영이 관계된 사건 두 개가 대통령 선거를 아무도 알 수 없는 도박판으로 만들었고 육공과 내사팀은 이진영을 눈앞에 두고도 정치 논리 때문에 어쩌지 못했다.
“방벽 시스템을 마크하고 그 새끼가 월미도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바로 확보해.”
“예, 알겠습니다.”
화면 속의 이진영은 마치 나 잡아보라는 듯 난민지구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는 육공이나 내사팀의 추적을 피하러 난민지구로 들어간 게 아니었다.
그는 감시카메라가 없는 굴다리 쪽으로 걸어가다가 챔피언 거리 쪽으로 들어섰다. 이곳부터는 롱꺼 패거리의 방해전파가 심해졌고 무전도 잘 터지지 않았다.
롱꺼의 무장부대가 이진영을 알아보고 뭔가 수신호를 했지만, 딱히 그를 공격할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롱꺼와 웡꺼의 부대는 성향이 많이 달랐고 이들은 경찰 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경찰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까 낮에 있었던 육공과 내사팀 요원과의 총격전으로 롱꺼 패거리들 역시 살짝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걱정 마라잉. 싸우러 온 거 아니니까.”
이진영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고 바 하나로 들어갔다. 여기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 바텐더가 무심한 얼굴로 보스턴 쉐이커를 흔들다가 이진영을 바라보고 행동을 멈췄다.
“키핑한 거 한 잔.”
이진영은 백 달러짜리 지폐를 몇 장 건넸고 마치 소림사 주방장 같은 빡빡머리 바텐더는 바 테이블 밑에서 뭔가를 꺼냈다.
바텐더가 꺼낸 건 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