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08
제108화
이진영은 오른손만으로 능숙하게 저격총을 조작했다. 엑소슈트에는 매니퓰레이터 암이 달려 있어 한팔을 부상 당했어도 얼마든지 총을 조준할 수 있었다.
그는 수송선 계단을 타고 올라가 매니퓰레이터 암으로 거대한 저격총만 바깥으로 내밀었다.
저격총의 적외선, 열화상 모드로 1킬로미터 밖의 열원을 볼 수 있다.
“열화상 장비 대응은 기본이겠지.”
놈들은 이진영을 습격했을 때 광학위장복과 우주복을 입고 있었다. 우주복은 안에서 물이 순환하면서 외부와 완전히 공기를 차단시키는 시스템이라 체온을 감지할 수 없다.
이진영은 총을 들고 사방을 살폈지만, 놈들이 있는 곳이 옛 항공모함의 브릿지라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다.
무위공 이순신함은 브릿지 구획만 빌딩처럼 무의도 한 곳에 덩그라니 세워져 있었다. 항공모함 주변에도 버려진 수송선들이 무슨 항공모함 호위함대처럼 널브러져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파앙!
하마터면 이진영의 저격총이 박살 날 뻔했다. 저격총 총구만 내밀었을 뿐인데도 놈은 이진영의 위치를 알아내고 연달아 사격했다.
팡팡팡팡.
또 철판에 구멍이 뚫리면서 이진영의 뺨을 스치고 레일건 탄자가 뒤로 날았다.
철판 여러 장을 관통한 레일건 탄자는 붉은 반지처럼 불타는 흔적을 만들어놓았다.
이진영은 냅다 아래로 도망치면서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가늠했다.
“브릿지 위야. 하지만 천수관음처럼 보조 로봇을 사용할 수도 있어.”
EV-1은 없지만, 이진영은 혼잣말을 하며 불안감을 떨쳐내려고 했다.
혼자다.
중부서의 든든한 동료들도, EV-1도, 신희정도 없이 이진영은 혼자서 이 폐선들의 묘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전쟁 때도 이진영은 홀로 싸운 적은 없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충직한 로봇들이 그의 썰렁한 농담을 받아주며 그와 함께 싸웠다.
“흐흐흐, 너무 객기를 부렸나?”
혼자서 범인들의 본거지에 돌입한 건 미친 짓이었다. 이진영은 혼자지만 놈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저격수가 이진영을 묶어놓은 사이 왜애앵하고 놈들도 롤러대시 모듈로 이진영이 숨어있는 수송선 잔해에 돌입했다.
군데군데 분해되다 만 잔해들 사이로 고속으로 이동하는 놈들의 하얀 우주복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이진영의 저격총이 불을 뿜었다.
즈즉.
여분의 전류가 앞으로 튀고 레일건 탄자가 철판을 뚫고 적의 우주복에 처박혔다.
“으아아악!”
한 놈의 다리가 레일건 탄자에 으스러지더니 앞에 있는 수송선 벽에 냅다 충돌했다. 놈의 우주복 헤드모듈이 충격으로 박살 나고 안에 들어있는 놈은 그 충격으로 기절했다.
이진영은 총을 쏠 때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퍽.
사람의 머리통이 수박이 깨지는 것처럼 박살 나고 머리를 잃은 시체가 눈밭에 축 늘어졌다.
“이 새끼가아아!”
화가 잔뜩 난 놈들이 이진영이 있는 곳으로 미친 듯이 총알을 난사하다가 대전차 미사일을 날렸다.
썰렁한 폐선 안에서 불꽃이 확 일어나며 밝아졌다가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철판이 무너져 내렸다. 이진영은 이미 여우처럼 뒤로 롤러대시를 가동해 뒤로 물러섰다.
철판과 파이프 구조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아예 수송선의 한 층이 붕괴했다.
“이런 바보 같은 새끼! 여기서 미사일을 쏘면 어떻게 해!”
1대 다수였지만 다 썩어가는 폐선은 이진영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이진영은 놈들의 목소리만으로 위치를 파악하고 그쪽으로 더블배럴 유탄발사기를 겨눴다.
이 유탄발사기는 H&K사의 괴작이었다. 얼핏 보면 그냥 총열을 자른 더블배럴 산탄총처럼 보였지만 두 발의 유탄이 들어가는 엄연한 유탄발사기였다.
이진영은 동시 격발 방아쇠를 누르고 두 발의 유탄을 동시에 발사했다.
쾅쾅!
유탄 두 발이 연달아 터지면서 고함을 지르는 놈들의 목소리 역시 폭음에 묻혀 사라졌다.
쿠구궁.
이제 들리는 거라곤 폐선이 붕괴하며 철판과 파이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안 되겠어. 그냥 이 배를 다 부숴버리자! 애기아빠! 우리 나가면 식스팩으로 박살 내버려!”
애기아빠?
놈들은 자기들끼리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고, 이진영은 애기아빠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고가도로에서 그를 거의 죽일 뻔했던 저격수. 이미 이진영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EV-1은 은연중에 이진영에게 범인의 힌트를 알려줬다.
식스팩이라는 것도 애기아빠가 그 사람이 맞다는 또 다른 증거였다. 식스팩은 주로 ‘중장기병’ 엑소슈트에 장비하는 미사일 팩의 이름이었다.
슈슈슉.
항모 쪽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여섯 발의 대전차 미사일이 폐선의 옆을 때렸다.
가뜩이나 해체되다 중단되어 불안정한 수송선이 미사일을 견뎌낼 리 없었다.
북중국군의 집요한 폭격을 피해 월미도까지 항해한 수송선은 부채꼴처럼 날아오는 식스팩 미사일에 산산이 박살 났다.
지금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지만, 무의도의 해변은 갯벌로 유명했다. 수송선 기둥이 박살 나면서 한쪽에 무게가 쏠리며 수송선 반대쪽이 서서히 뻘에 처박히며 기울어졌다.
이진영은 짚라인 모듈로 벌써 수송선 위쪽에 다다랐고 서서히 옆으로 기우는 수송선을 미끄럼틀 삼아 내려왔다.
수송선 옆 벽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펑펑 아래로 내려앉고 이진영은 롤러대시를 절묘하게 사용해서 무너지는 발판을 피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걸 애기아빠가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EBR-11E가 연속으로 이진영을 따라가다가 연속으로 다섯 발을 발사했다.
즈즈즈즉.
출력을 높였는지라 보병용 지정사수소총이라고 해도 이진영의 저격총과 거의 맞먹는 위력이었다.
그러나 이진영도 바깥으로 나오면 저격수가 노릴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였다. 그는 뻥 뚫린 선체 안쪽으로 일부러 들어가서 저격을 피했다.
“영리하군.”
애기아빠는 이진영이 먼지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걸 보고 씩 미소를 지었다.
거대한 수송선은 마침내 옆으로 완전히 쓰러졌고 거대한 고래가 피를 뿜어내는 것처럼 쌓여있는 먼지와 눈가루를 휘날렸다.
“해치웠나?”
적 패거리 중 한 명이 눈밭 위에서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하지만 시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였다.
퍽.
담배가 터지면서 놈의 얼굴을 담뱃가루가 뒤덮고 곧이어 놈의 이마가 깨져나가면서 뇌수와 피가 담뱃가루와 뒤섞여 뒤로 퍽하고 날아간다.
“뭐, 뭐야 이 새끼!”
놈들은 수송선에서 빠져나와 눈밭에 멍청히 서 있었고 아까 이진영과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퍽퍽퍽.
소리 없이 날아오는 레일건 탄자가 놈들의 다리를 집요하게 노렸다.
“으아아아악! 이 새끼! 다리를 노리고 있어!”
이진영은 전문 저격수가 아니었지만, 광저우에서 전문 저격수들에게 실컷 당했다. 일부러 다리를 박살 내고 구하러 오는 동료들을 하나하나 줄이는 건 정말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 끔찍한 현장이 지금 재현되고 있었다.
놈들은 반사적으로 동료를 구하려고 달려들었고 이진영은 흙먼지 속에서 정확히 놈들을 노렸다.
“으아아아악!”
원래는 다리를 노렸지만, 하필 사타구니를 관통했다. 놈은 가랑이를 붙잡고 고통에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작살 날 뻔한 내 불알의 복수다.”
이진영은 다른 한 놈 역시 다리를 박살 냈다. 저격총은 다리를 관통하는 게 아니라 레고 다리를 뜯어놓듯 뜯어버렸다.
두터운 우주복 안에 있던 다리가 피를 흩뿌리며 팽그르르 돌다가 눈밭 위에 처박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놈들의 동료들은 냅다 폐선의 잔해로 달려 몸을 숨겼다.
“놈이 아직 저 안에 있어!”
“애기아빠, 뭐 하는 거야! 비싼 돈 주고 갑옷까지 사줬는데 이러기야!”
팡팡팡.
이진영의 대구경 저격총에 골머리를 앓던 놈들이 애기아빠에게 불평을 토해냈다. 하지만 애기아빠도 신출귀몰한 이진영을 잡기는 힘들었다. 이진영은 어느새 다른 폐선의 잔해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 봉식아! 쎄잉꺼에게 지원을 요청해!”
놈들은 이진영을 죽이기 위해 40명이나 용병을 동원했지만, 차례차례 이진영에게 죽어갔다. 그러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봉식이는 아까 괜히 엄한 말을 했다가 담배를 문 채로 죽었다.
“이런 시부랄!”
애기아빠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곳은 쎄잉꺼의 땅이고 이들은 쎄잉꺼에게 보호비를 내고 사업을 했다. 깡패들이 늘 그렇듯 쎄잉꺼 역시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보호비를 내는 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체면은 구겨지고 범죄조직들이 우습게 본다. 쎄잉꺼의 조직은 웡꺼만큼 호전적이지는 않지만, 이들도 엄연한 롱꺼 휘하의 무장집단이었다.
저 멀리서 픽업트럭에 탄 쎄잉꺼의 부대가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진영은 팔의 부상도 그렇고 점점 더 일이 꼬여가고 있었다.
그는 군용통신기를 보며 이를 갈았다. 지금이라도 이민호에게 지금 상황을 말하면 분명 블랙스와트를 보내줄 것이다. 이곳은 굴다리와 가깝긴 했지만, 굴다리의 핵심 영역은 아니라 군대가 개입할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이진영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 사람은 살려야 해.”
이진영이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구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 사람은 이진영의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했다.
파앙!
애기아빠는 이진영의 위치를 찾아내고 무자비하게 몰아붙였다. 철판이 관통당하고 이진영은 하마터면 머리에 총을 맞고 죽을 뻔했다.
“빌어먹을!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데!”
이진영은 화풀이하듯 저격총을 쐈다. 하지만 보험 사기 패거리들도 나름 참전자들이었고 이진영이 정말로 혼자라는 걸 알게 된 후 지구전으로 작전을 바꿨다.
게다가 쎄잉꺼의 조직원들이 가세해주기만 한다면 이진영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기 힘들었다.
이진영은 저격을 피해 또 다른 폐선의 유조탱크로 들어갔다.
“추위 때문에 배터리도 빨리 닳는군.”
아무리 보병용 엑소슈트라도 무한정 가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배터리가 벌써 반이나 소모된 걸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희정은 정 대령을 놔준 혐의로 쫓기고 있었고, 다른 중부서 식구들은 지금 테러 현장에서 한창 수사 중일 것이다.
“분명 보고 있을 텐데 개자식들.”
수송선이 쓰러졌으니 아마 정보국이나 경찰청은 무슨 일인가 하고 무의도 일대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이효진 역시 이곳에서 이변이 발생한 걸 눈치챘을 텐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진영은 눈보라 너머로 희미하게 틸트로터 몇 대가 선회하는 걸 발견했다. 경찰의 수직이착륙기가 분명했지만, 그냥 선회할 뿐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대선이 뭔지 제기랄.”
이진영이 통신기를 들고 망설이고 있을 때 점점 더 상황은 나빠졌다. 쎄잉꺼의 조직원들이 도착해서 광동어로 뭐라뭐라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신상을 까발렸겠군.”
놈들은 경찰 24시 덕분에 이진영의 신분을 알아챘고 쎄잉꺼는 ‘레이쬔에잉’, 이진영의 광동어 이름을 부르면서 그를 도발했다.
쎄잉꺼의 조직원들과 합세한 보험 사기단 놈들이 이진영이 숨어있는 유조선으로 속속 들어왔다.